한국이 인구 10만 명당 석·박사급 이상 핵심 인재의 미국 영주권 신청이 가장 많은 나라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석·박사와 C레벨 인재에게 발급하는 EB-1·2 취업비자 규모에서 인도, 중국, 브라질에 이어 4위를 기록했으나 10만 명당 기준으로는 이들 국가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고급 인재가 한국을 등지는 ‘두뇌 유출’(brain drain)이 만성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2023년 고급 인력 취업 이민 비자인 EB-1·2를 발급받은 한국인은 5684명이었다. 지난해 미국 정부는 전 세계 11만4130명을 대상으로 영주권인 EB-1·2 비자를 발급했다. 한국은 인도(2만905명), 중국(1만3378명), 브라질(1만1751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다. 하지만 인구 10만 명당으로 환산하면 한국은 10.98명으로, 대표적 인구 대국인 인도(1.44명)와 중국(0.94명)을 10배가량 앞질렀다. 일본의 EB-1·2 승인은 1066명으로 절대 규모에서 한국의 5분의 1, 10만 명당으로는 13분의 1(0.86명)에 불과했다. 국내 핵심 인재의 해외 유출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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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1·2 비자는 미국 정부가 고숙련·고학력 인재에게 발급하는 취업비자이며 가족에게도 영주권을 준다. 5684명을 ‘4인 가족’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지난해 최소 1400~1500여 명의 최고급 두뇌가 미국으로 빠져나간 셈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3318명으로 떨어진 한국인의 EB-1·2 비자 발급은 2022년부터 다시 5000명대로 껑충 뛰었다. 최근에는 국내 주요 대기업 이공계 엔지니어와 연구직 사이에선 ‘EB-2 열풍’까지 불고 있다. 한 이민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10년차 전후 엔지니어뿐 아니라 변호사, 의사, 상경·예술계 인재의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인구 대비 압도적으로 높은 인재 유출이 첨단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한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는 “인공지능(AI)이 일상화되는 기술 가속화의 시대에 핵심 인재들이 한국을 등지는 상황을 방치하면 미래 성장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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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 직원들은 대박이 났다는데 나는 쳇바퀴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정보기술(IT) 대기업의 10년 차 연구직 A씨(39)는 국내 이직을 고민하다가 지난달 미국 현지 이민 전문 로펌을 선임해 고학력자 독립이민(EB-2)을 준비 중이다. 매년 수천 명의 국내 최고급 인재가 A씨처럼 미국행을 택하는 것은 성과 보상에 인색하지 않은 미국 기업에서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어서다. 갈수록 떨어지는 국내 기업의 혁신 활력과 자녀의 교육 문제도 이들이 미국행을 재촉하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한국의 ‘두뇌 유출’을 제어할 방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한국 고급 인력 ‘美 엑소더스’

27일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고급 인재 이민 비자인 EB-1·2를 획득한 한국인은 2016년 이후 매해 4000~6000명을 유지하고 있다. 2020년 5604명에서 코로나 시기인 2021년 3318명으로 줄었지만, 이듬해 5514명으로 다시 늘었다.

두뇌 유출 속도가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지난해 EB-1·2 비자용 I-140을 미국 이민국에 제출한 한국인은 2982명이다. 이들 이민이 모두 받아들여진다고 단순 가정하면 3인 가족 기준 8946명, 4인 가족 기준으로는 1만1928명이 한국을 떠나는 셈이다. 이민업계 관계자는 “당장 내년에는 EB-1과 2를 합쳐 6000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이민국이 2022년부터 자격을 완화한 뒤 ‘인재 대국’인 중국과 인도 등에서도 고급 이공계 인재 유출이 문제가 됐지만, 한국보다 심각하지는 않다. 2023년 EB-1·2로 이민한 중국인은 1만3378명, 인도인은 2만905명으로 한국인(5684명)보다 절대 수는 많지만 10만 명당 기준으로 전환하면 한국 고급 인력 유출이 각각 8배, 11배 많다.

○ 고급 인력 “실패해도 연봉 두 배”

이민 업계에선 최근 2~3년 새 삼성, SK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카카오, 네이버 등의 최고급 인력 사이에서 미국 국익 면제(NIW) 인증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고 전한다. 한 반도체 대기업에선 ‘박사급 연구원 절반이 NIW를 준비 중’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돈다.

EB-2(NIW)는 2010년 이후 국내 전자 대기업 전문연구원이 엔비디아, 퀄컴, 마이크론 등으로 이직하면서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반도체 회사 연구원 B씨는 “2022년 최고조에 달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나고, 국내 대기업은 인공지능(AI) 혁명에 올라타지 못하면서 엔지니어들의 동요가 더욱 심해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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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착에 실패하고 귀국하더라도 몸값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5년 차 프로그래머 이모씨(30)는 “국내 개발자 사이에서는 미국 빅테크 취업 경력을 ‘연봉 두 배 이벤트’라고 부른다”며 “굳이 이민이 아니더라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미국 취업 노력을 하는 게 대세”라고 말했다.

EB-2 비자 막바지 절차를 밟고 있는 10년 차 변호사 C씨는 캘리포니아주 IT기업에서 사내변호사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스톡옵션까지 포함하면 당장 연봉이 60%가량 오른다”며 “한국 대기업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지만 미국 로스쿨 동기와 연봉이 세 배 넘게 벌어지다 보니 미국행을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 핵심 인재 이탈하는 국내 기업 어쩌나

문제는 국내 기업의 미래 성장 동력을 책임질 핵심 연구 인재가 이민을 택하고 있지만 이들의 유출을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되고,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면 ‘석박사’ 인력이 구조조정 1순위에 오른 과거의 학습경험도 해외 이탈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술 분야에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자가 우선”이라며 “고숙련 인재를 정당히 대우하고 존경해주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시온/안정훈/정희원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