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욱 작가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양정욱 작가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나 작품에 점수를 매겨 순위를 정하는 건 미술계에서 금기시되는 일이지만, 유일하게 이런 행동이 환영받는 곳이 있다. 주요 미술관이나 유력 재단에서 ‘올해의 작가’를 뽑아 상을 주는 행사다. 영국 대표 미술관인 테이트 브리튼이 매년 수여하는 터너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거장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이름을 딴 이 상은 매년 네 명 안팎의 후보를 뽑아 전시 기회를 준 뒤 최종 수상자를 선정한다.

수상자가 발표되는 매년 12월 초가 되면 영국 미술계는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경쟁의 형식을 빌려온 탓에 미술계 관계자들은 물론 일반 관객들까지 저마다 우승자를 점쳐보고 응원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는 ‘올해의 작가상’(올작)은 ‘한국의 터너상’ 격인 국내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이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중견 작가 중 특별히 유망한 작가를 뽑아 세계 무대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게 이 상의 취지”라고 설명한다.

12년째를 맞은 올작이 올해 꼽은 네 명의 최종 후보는 권하윤(43)과 양정욱(42), 윤지영(40)과 제인 진 카이젠(44). 이 네 사람이 각자 구축해온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지금 사간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VR·움직이는 조각에 담긴 이야기

권하윤은 가상현실(VR)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지난해 스위스 제네바 국제영화제의 몰입형 작품 부문에서 금상을 받고 리움미술관에서도 소규모 전시를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가 VR 작품을 만드는 건 ‘개인의 경험’을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어서다. 권 작가는 “전쟁이나 식민 지배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VR로 실감 나게 보여주고, 이를 통해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생각보다 뚜렷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권하윤의 '옥산의 수호자들'을 관람 중인 관람객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권하윤의 '옥산의 수호자들'을 관람 중인 관람객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예컨대 이번 전시 대표작인 ‘옥산의 수호자들’은 20세기 초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배하던 시기, 대만에서 있었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본에 저항하던 대만 원주민 부족장인 아지만과 일본인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 맨 처음 아지만은 모리를 적대하지만, 대만의 자연에 대한 모리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은 친구가 된다. 관람객들은 VR 기기를 차고 대나무 등을 든 채 권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따나가게 된다.

이번 전시 작가 중 유일한 순수 국내파인 양정욱의 ‘움직이는 조각’들도 흥미롭다. 김세중청년조각상(2020) 등을 수상한 양 작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텃밭, 주차장에서 만난 주차 요원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로 움직이는 추상 조각들을 만든다.

예컨대 ‘서서 일하는 사람들 #9’은 주차 요원으로 일하게 된 퇴역 군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만든 작품. ‘각’이 잡힌 듯 하면서도 조금은 어색한 조각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잡아끈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부단히 반복하는 작은 몸짓이 모여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양정욱의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양정욱의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조각과 영상에 담은 소원과 그리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전에도 출품했던 윤지영은 이번에 조각 작품들을 선보인다. 대표적인 작품이 ‘간신히 너, 하나, 얼굴’이다. 작가가 친구 네 명의 목소리를 밀랍으로 된 레코드에 녹음한 뒤, 이를 녹여 자기 얼굴 모양으로 빚어낸 작품이다. 친구들의 마음을 담은 목소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제작 과정이 담긴 영상 작업도 함께 나와 있다. 이주연 학예연구사는 “소원을 빌거나 소원 성취에 감사하며 바치는 ‘봉헌물’에 주목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여러 사연과 의미를 듬뿍 담은 게 윤지영 작품의 특징이다.
윤지영의 '간신히 너, 하나, 얼굴'.
윤지영의 '간신히 너, 하나, 얼굴'.
제인 진 카이젠의 '이어도(바다 너머 섬)'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제인 진 카이젠의 '이어도(바다 너머 섬)'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제인 진 카이젠은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덴마크로 입양돼 지금도 덴마크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가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는 총 7점의 영상으로 이뤄진 연작 ‘이어도’를 처음으로 전체 공개한다. 작품은 700m 깊이 용암동굴 내부와 바다 생물들, 해녀로 일해온 노년의 여성들, 제주의 오름에서 꼭두(상여를 장식하는 인형)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 등을 다루고 있다. 극히 지역적인 주제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소외된 이들과 회복 등 보편적인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는 현재 구스타프 클림트 등 오스트리아 분리파 예술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빈의 제체시온에서 열리는 전시에도 참여하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최종 수상자는 내년 2월에 발표된다. 경연 형식의 행사가 모두 그렇듯, 참여 작가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매력에 주목하며 나름대로 우승자를 예측해보는 재미가 있는 전시다. 관람료는 2000원, 전시는 내년 3월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