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천경자가 그린 그림입니다. 젊은 여자가 뱀을,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무더기로 몰려있는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려 발표합니다. 천경자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징그러운가요? 무섭진 않으세요? 수많은 뱀이 엉켜 있습니다. 가운데를 잘 살펴보면 고개를 꼿꼿이 든 채 혀를 날름거리며 우리를, 아니 세상을 똑똑히 마주하는 뱀이 있습니다. 천경자는 그 뱀이 자신이라고 합니다. 화려한 슬픔이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느껴지나요?
천경자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51,5×8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51,5×8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제 저와 함께 화려한 슬픔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껴보러 떠나 볼까요. 천경자의 뱀 그림은 어디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까요? 6·25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이었어요. 1952년 부산은 전쟁 중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인구가 40만 명에서 단숨에 1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도 전쟁을 피해 모여들었죠.

천경자는 피난을 오지는 않았지만,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전시하러 내려옵니다. 28점 그림을 들고 생전 처음 타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죠. 개인전이 열리기 전 3월에 부산 칠성 다방에서 열린 《대한미협》 전시회에 <생태>, <개구리>, <닭>을 출품하자, 주최 측은 <생태>는 자극적이라고 주방 구석으로 밀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방에 여자가 그린 뱀이 있다고 소문이 나, 그것을 보려고 인파가 몰려듭니다. 뱀 그림을 선전하여 손님을 몰고 온 이는 공초 이상순 시인이었어요. 얼마 후 부산 국제구락부의 개인전에서도 <생태>의 인기로 밤 아홉 시까지 문을 닫을 수 없는, 성황을 이루는 개인전이 됩니다. <생태>가 걸려있는 국제구락부로 이동해 볼까요?
1952의 부산 국제구락부 / 사진출처. 부산일보
1952의 부산 국제구락부 / 사진출처. 부산일보
‘구락부’는 ‘클럽’이라는 말을 일본식으로 음역한 거예요. 국제구락부(당시 주소는 남포동 2가 25번지, 현주소는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길 34)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대항했던 곳으로 유명한데, 경양식집이었어요. 전쟁 중의 다방, 경양식집 등은 남으로 밀려온 피난민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즐겨 찾았습니다. 갈 곳 없는 화가, 문인들의 객실이자 거래처이며 숨구멍이었답니다.
[왼쪽]953년 부산의 다방 외관 [오른쪽]다방의 실내 모습 / 사진. ⓒ임응식 작가, 출처. 임시수도기념관
[왼쪽]953년 부산의 다방 외관 [오른쪽]다방의 실내 모습 / 사진. ⓒ임응식 작가, 출처. 임시수도기념관
‘에덴’, ‘오아시스’, ‘레인보’, ‘희망’, ‘망향’, ‘등대’, ‘루네쌍스’, ‘햇피’ 등의 다방 이름은 끔찍한 전쟁 속에 고향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국제신문 김희국 기자에 의하면 부산의 20여 곳 이상의 다방들은 불이 꺼지지 않았답니다. 오디오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에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이 다방이었거든요. 또 전문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전혀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지요.

예술가들은 다방을 이용해 시 낭송회, 시화전, 서화 전시회, 실내악 연주, 연극 공연을 합니다. 심지어 일부 다방은 일 년 내내 전시회를 열었다 하니, 한마디로 다방은 종합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칠성 다방’에서 고희동을 대표로 하는 《대한미협》전이 열리고 ‘국제구락부’에서 천경자의 개인전이 열린 것이지요. 어찌 되었든 개인전은 성황리에 마칩니다.

천경자는 그림을 팔아 모은 돈 30만 환으로 방 두 칸짜리 흉가 같은 집을 겨우 장만합니다. 20대에 전시회를 성공시킨 여성 화가가 어렵사리 집을 장만한 사연은 무엇일까요? 동양화 <생태>의 강렬한 색감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걸까요? 왜 꽃다운 20대가 뱀을 그렸을까요?

궁금증을 풀어보려 1924년 11월 11일 천경자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남도 고흥읍 서문리로 가봐야겠습니다. 정확히 100년 전입니다. 천경자는 1924년 11월 11일 푸른 바닷가 고흥의 소록도가 내려다보이는 봉황산 밑 서문리에서 태어납니다.
전라남도 고흥의 푸른 앞바다 / 사진출처. 고흥군 관광 블로그
전라남도 고흥의 푸른 앞바다 / 사진출처. 고흥군 관광 블로그
천경자의 어머니는 유복한 집안의 무남독녀로 자랐습니다. 수놓고 먹 치는 취미를 키우며 고흥 에서 귀하게 자랐지요. 외조부는 귀한 딸 가까이 두려고 고아지만 똘똘해 보이는 총각에게 시집 보내 끼고 살았지요. 덕분에 천경자는 어린 시절 금이야, 옥이야 하며 외조부의 무릎에서 자랍니다. 본명은 천옥자입니다. 유학 시절 창씨개명 때 아버지가 보내준 ‘천전옥자’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본인이 거울 보는 여자란 의미의 ‘경자’로 바꿉니다.

고흥의 푸른 바다와 산, 할아버지가 가꾼 멋진 정원의 갖가지 꽃들, 달리아, 연둣빛 밥티꽃(수국), 엄마의 조각 비단 바구니 등이 천경자 그림의 채색의 기원이 됩니다. 어린 날 처음으로 바다의 빛을 보고 무서우면서도, 짙은 코발트 그린의 신비스러운 색감에 빠져들었던 기억, 봉황산 푸른 소나무 빛. 곱고 건강한 그 빛들을 표현해 보고자 채색 화가가 되어 화려한 꽃뱀 무더기를 그린 채색화가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필 왜 뱀이었을까요? 고흥보통학교(현 고흥초등학교) 시절, 나물 캐러 갔다가 꽃뱀이 비단띠인 줄 알고 집으려다 뱀에게 물려 죽는 친구를 보게 됩니다. 친구가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 후에는 커다란 능구렁이가 집 대문 밖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걸 보기도 합니다. 동네 남자들이 뱀을 몰아쳐 죽이는 장면도 목격합니다. 그렇게 유년 시절에 뱀에 대한 강렬한 기억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뱀 이야기는 잠깐 접고, 천경자가 화가가 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명문 여고를 다녀 집안의 자랑이었으나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성적이 뚝뚝 떨어져 아버지한테 혼이 나기도 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기숙사에서 탈출해 긴 댕기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와 퇴학당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아도 친구와 함께 읍내로 놀러 가는 배짱 좋고 낙천적인 소녀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미술 수업에서 특히 두각을 보였습니다. 김임년 미술 선생이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추천했으나, 1941년 학교 분위기는 여자를 일본에 유학 보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담임인 군국주의자 오쿠다 선생은 뺨을 여러 차례 때리며 못마땅해합니다. 천경자 집안의 재력도 일본 유학을 보낼 만큼은 아니었기에 아버지가 반대하지요. 그러자 천경자는 다듬잇돌 위에 앉아 울부짖다가 큰소리로 깔깔 웃기를 반복하며 실성한 듯한 연기를 합니다. 이에 어머니가 “어매, 이 집 난리났네에..., 이러다 다 큰 자식 죽이겄네에...”하며 딸 편을 듭니다. 아버지는 다 키운 딸을 망치나 싶어 할 수 없이 유학을 보냅니다.

이렇게 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 고등과로 입학했습니다. 입체파, 야수파 등이 유행하던 시절이지만 천경자는 곱고 섬세한 것, 아름다운 색을 마음껏 표출하고 싶어 일본화를 선택합니다. 선배 박래현을 만나 조선미술전람회를 알게 되고, 1942년 <조부>, 1943년 <노부>로 연이어 입선하여 아버지에게 면목이 서게 되었습니다. 조선인 수상자 비율이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던 조선미전 입선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천경자는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멋지게 등단합니다.
천경자 <노부>, 1943, 종이에 채색, 118×14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 <노부>, 1943, 종이에 채색, 118×14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전쟁으로 일본 상황이 열악해지자 어렵게 귀국합니다.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노름으로 폭삭 망해 있었습니다. 스무 살 과년한 천경자는 운명의 남자를 꿈꿨지만, 몇몇 중매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국선을 탈 때 도와준 이형식('이철식'이라는 가명으로 부름)이라는 동경제국대학교 학생이 운명의 남자인 듯한 환상에 빠져 그가 찾아오자,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인 줄 알았던 이철식은 의사도 아니고 집안도 어려우며 무능한 데다가 떠돌이 생활까지 하는 사람이었어요. 덜컥 아이는 생기고, 천경자는 부모님과 할머니, 여동생과 남동생에, 이젠 아기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 것입니다.

집안도 망하고, 결혼까지도 창피하게 되어 버리니 고향을 떠나 광주로 셋방살이를 옵니다. 가장이 되어 모교인 전남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천경자는 짬짬이 그림에 몰두하여 전남여고 강당에서 첫 전시회를 엽니다. 화가였으니까요, 화가인 정체성을 잊으면 죽을 것 같았을 테니까요.

1950년 6·25가 터집니다. 도움도 안 되면서 애를 뺏어가려고 위협하던 남편은 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고, 여동생 옥희는 폐병에 걸립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약을 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 눈물로 나날을 보냅니다. 의사 공부를 안 하고 쓸데없이 그림을 그린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치면서요.

이때 그린 그림이 뱀 그림입니다. 하루라도 사는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 뿐, 광주역 앞 납작한 한옥 뱀 집에 유리 상자를 놓고 그 안에 독뱀들을 넣어 그리기 시작합니다. 옥희의 병은 심해지고 가난으로 약을 구할 수는 없고….

“누이동생도 죽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의학을 공부 못해 오만가지 저주를 받은 것이고,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낸 나는 악이 받쳤던가, 꽃향기 찾아 스치는 뱀 두 마리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무더기 뱀을 그림으로써 살 용기와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랜덤하우스 중앙, 2006)

한가운데 꼿꼿이 머리를 치켜든 뱀을 중심으로 무더기 뱀을 그려 넣은 여자, 어지럽게 뭉쳐 있는 뱀의 머리 위에 성냥개비를 올리며 세어 보니, 서른세 마리. 윗부분에 다시 두 마리의 뱀을 더 그립니다. 누군가가 서른다섯 뱀띠였거든요.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이렇게 죽기 살기로, 아니 살기 위한 안간힘으로 25일 만에 약 25호 크기로 탄생한 작품이 위에서 보여드린 <생태>입니다. 화려한 초록 물이 투두둑 슬픔으로 떨어져 신비로운 뱀 무더기들로 태어납니다. 섬뜩하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한 아름다움으로 삶을, 생을 표현합니다.

김경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