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직선을 만들지 않는다.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신의 것이다. 스페인의 예술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말이다. 산, 강, 바다, 구름, 꽃과 나무 그 어디를 봐도 직선이 없다. 만유의 천태만상(千態萬象)은 부드러운 곡선의 연속이다. 대지의 표면을 흐르는 물길이, 땅 위 수많은 논두렁 길과 산길이, 하늘과 산이 만나는 등고선이 모두 굽이굽이, 구불구불하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몸의 형상도 직선이 없다. 육신을 휘돌아 흐르는 피의 길이, 육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지체의 형상이 곡선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호선을 그리듯 자연스럽게 휘어진 기와지붕. 한옥의 미는 주변 산의 능선, 하늘의 구름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신이 만든 자연 속에는 오직 ‘곡선’만이 존재한다. / 사진. ⓒ홍지수
호선을 그리듯 자연스럽게 휘어진 기와지붕. 한옥의 미는 주변 산의 능선, 하늘의 구름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신이 만든 자연 속에는 오직 ‘곡선’만이 존재한다. / 사진. ⓒ홍지수
한국 공예품을 보아도 지배적 요소는 직선보다 곡선이다. 한국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연을 닮아 직선보다는 곡선을 중시하고 곡선으로 율려를 표현해 우주의 질서를 예술에 담고자 했다. 서양의 예술이 수의 원리에 따라 공간적 조화, 정제된 화음을 중시했다면, 한국의 예술은 자연스러운 율동 즉, 율려를 중시한다. 한국의 음악이 악기 줄을 흔들어 울림을 내는 농현(弄絃)을 중시하고 한국의 춤이 음결과 몸결이 일치되는 가운데 맺고 어르고 푸는 자연스러운 율려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정지된, 완결된 형태가 아닌 순간적인 분위기, 상황에 따라 맞추고 변화해야 하는 율려의 미학은 전통 무용, 음악뿐 아니라 범종의 비천상, 고구려 고분 벽화의 비천, 선인의 표현, 한옥의 물결치는 곡선 등 한국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라 달항아리, 숟가락, 한복, 버선, 부채, 소반 다리 등 생활공예품에도 부드럽고 율동적인 곡선은 중요한 특징이다.
고구려 벽화 <현무도>의 선, 강서대묘, 평양, 7세기 초
고구려 벽화 <현무도>의 선, 강서대묘, 평양, 7세기 초
우리 한복의 곡선미와 겹침의 미학 / 사진제공. 홍지수
우리 한복의 곡선미와 겹침의 미학 / 사진제공. 홍지수
이를 두고 한국 예술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던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는 한국 특유의 곡선이 고독과 비애의 정서에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이것은 오해다. 이것은 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고 이치를 미적 이상으로 삼았던 한국민의 신명이 원천이다. 한국인만큼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며 한바탕 어울리는 신명에 특화된 민족이 어디 있는가? 수년간 여러 아티스트가 돌아가며 빌보드,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등 글로벌 차트를 섭렵하는 K-팝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명은 비애가 아니라 불쾌를 시원하게 풀어내야만 생기는 쾌(快)다. 진정 쾌하려면 창작자가 기술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야 하며 산만한 듯하여도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조화와 질서를 일구는 몰입과 신기를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요즘 K팝에만 있겠나. 한국 공예가들 역시 K-공예의 힘을 세계 안팎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통공예 유산의 형태, 색, 문양 등을 복원, 모방하는 구시대적 차원의 시도가 아니라 요즘 시대 미감에 걸맞는 용도, 형태, 색 등으로 변형하여 밀라노디자인위크, 파리디자인위크, 영국 콜렉트 등 아트/디자인플랫폼 그리고 주요 글로벌 명품브랜드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K-공예를 이끄는 공예가들이 갖는 공통점은 전통에 기반하되 현대 이미지에 맞게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기도 하고, 조형예술의 차원에서 새로운 심미성과 조형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공예의 쓰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고민의 흔적도 엿보인다.
김혜정 <carpel-心皮>, 2011, 도자
김혜정 <carpel-心皮>, 2011, 도자
양점모 <산(山, Mountain)>, 2021, 지태 칠기, 300×460×180mm
양점모 <산(山, Mountain)>, 2021, 지태 칠기, 300×460×180mm
하이브리드의 시대라 공예가들 역시 다양한 신소재, 방법을 동원해 작업하나, 여전히 자연과의 친화성을 앞세워 자연 소재를 선호한다. 그러나 용도와 형태, 가공법은 전통공예품 제작과는 달라 공예가들은 재료 상태, 자신만의 작업 방식, 의도에 따른 변수, 문제에 따라 수시로 맞닥트리고 해결 해야 할 크고 작은 숙제를 모두 고민하고 산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이나 전개가 당황스럽고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지만 위기가 기회라고 여기며 의도치 않게 얻는 좋은 결과, 새로운 작업을 기대하며 의연하게 작업한다. 그것이 공예가의 즐거움이요, 작업실에 들어가는 동력이다.

작업이 즐겁고 도전할 만한 것이 되려면 반복보다 즉흥(improvisation)이 도움이 된다. 공예가들의 ‘즉흥’을 달리 말하면, 자연스러움, 자유분방함이다.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만큼 거슬림 없고 조화로우며, ‘자유분방함’을 느낄 만큼 막힌 것이 없이 시원, 쾌하려면 우선 공예가가 재료에 대한 이해, 기교, 동작을 자유롭게 행하고 구사하는 데 거침이 없어야 한다. 치밀한 계획이나 기교에 의존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관객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 단계에 맞닥트려도 당황하지 않고, 공예가가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신명을 발휘할 때 자유롭고 자연스러움이 보는 사람에게도 전이된다. 이는 마치 실력이 좋은 가수가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데 급급한 것을 넘어 스스로 즐기며 능수능란한 애드리브와 노래의 강약을 조절하고 춤을 출 때, 청중도 가수의 퍼포먼스와 하나 되어 감동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태훈 <Early spring dandelion seeds>, 2024, 유리 블로잉, 콜드워킹, 310×310×260mm
이태훈 <Early spring dandelion seeds>, 2024, 유리 블로잉, 콜드워킹, 310×310×260mm
안정윤 <물의 기억>, <바람의 기억>, 2024, 28×21×30(cm), 400×200×100mm
안정윤 <물의 기억>, <바람의 기억>, 2024, 28×21×30(cm), 400×200×100mm
재능을 바탕으로 신명은 현대미술, 음악, 무용, 영화 등 오늘날 국제 예술계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한국의 예술가, 창작자들의 DNA다. 우리가 오랫동안 찾았던, 외국과의 차별화된 ‘한국적인’ 혹은 ‘한국만의’ 것은 특정 문화유산의 외형,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 신명의 정서에 있다.

홍지수 공예평론가•미술학박사·CraftMI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