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의 고통 속에 살던 프리다 칼로, 영원불멸의 그림을 낳았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오범조·오경은의 그림으로 보는 의학코드
<헨리 포드 종합병원>(1932)과
<나의 탄생>(1932)에서 볼 수 있는
'난임'으로 인한 프리다 칼로의 사회적 고립과 고통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회복하는데 착수할 수 있다"
칼로는 자신이 겪은 건강 문제를 수용하고
신체/정신적인 회복을 위해 예술을 사용
<헨리 포드 종합병원>(1932)과
<나의 탄생>(1932)에서 볼 수 있는
'난임'으로 인한 프리다 칼로의 사회적 고립과 고통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회복하는데 착수할 수 있다"
칼로는 자신이 겪은 건강 문제를 수용하고
신체/정신적인 회복을 위해 예술을 사용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미디어의 관심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다. 칼로는 종종 초현실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사실 그녀의 작업은 무의식 세계 속 꿈같은 이미지를 다루기보다는 본인의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칼로가 남긴 많은 작품이 자화상으로, 그 안에는 칼로가 느낀 신체적 고통, 정서적 고립감, 현재 상태에 대한 이해의 노력, 그리고 회복에 대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 시티의 코요아칸 지역에서 넉넉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6살이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와 발에 상당한 장애를 남기기는 했지만, 가족들의 애정과 도움 속에 그녀는 밝고 명랑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의대 진학을 꿈꾸던 18세의 그녀에게 1925년 9월, 삶을 바꿀 사고가 일어난다. 타고 있던 버스가 트롤리와 충돌하는 사고였는데, 이때 척추, 늑골, 어깨뼈 등이 골절되거나 탈구되었을 뿐 아니라, 차체의 금속 난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하여 골반이 부서지고 자궁을 포함한 여러 장기기관이 손상되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극심한 피로와 만성 통증에 시달렸으며, 총 32회에 걸쳐 여러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신체 이미지와 자아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병상에서 회복하던 시기, 그녀의 어머니는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이젤을 마련해 주었고, 이젤 위에 거울을 설치해 자신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나는 자주 혼자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고립된 회복의 시기에 그림은 칼로가 존재에 대한 질문과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법이 되어주었다. 1927년이 되어서야 병원 침대 신세를 면하게 된 칼로는 이미 대학생이 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만난 아티스트들과의 한 파티에서 1928년 당대 유명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를 소개받는다. 리베라는 멕시코시티의 공공건물에 노동자들의 삶을 대담하게 묘사한 거대 프레스코화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21살의 나이 차와 리베라에게 이미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같이 연애하고 1929년 결혼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 리베라는 해외 수주를 자주 받게 되는데 특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시에서 대형 벽화 프로젝트들을 맡아 칼로와 함께 미국 생활을 하였다. 1932년, 24세의 칼로는 본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칼로의 첫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본인의 신체 조건상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일정상의 어려움, 리베라가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방치해왔음 등의 이유로 임신 중절이 이성적 판단이라 여겼다.
이에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종합병원의 의사인 프랫 박사와 상담 끝에 자궁 수축 유도제로 파마자유와 퀴닌(quinine, 과거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쓰였으며 임산부가 섭취했을 경우 기형아-특히 청각장애-가 생길 수 있으며 과량 섭취할 경우 유산할 수 있음)을 처방받아 의학적 낙태를 실행한다. 그러나 그녀는 약 6일간 경미한 출혈을 보일 뿐이라 다시 프랫 박사를 찾아갔다가 임신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소견을 받은 후 잠시 소파술 등을 고민하다 결국 뱃속의 아이를 지키겠다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6월 말경에 찾아왔다. 칼로는 하혈, 경련, 구역질 등의 문제 증상을 겪고 있었으나 프랫 박사에게 다시 가는 것을 거부한다. 7월 4일 밤, 칼로는 심한 통증과 함께 대량 출혈을 보였고, 리베라는 다음 날 아침에 구급차를 불러 칼로를 헨리 포드 종합병원으로 이송한다. 당시 이들 부부와 함께 거주하던 화가 루시엔 블로흐는 자신의 일기에서 칼로가 "출산의 고통 속에... 그녀가 만든 핏물 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핏덩이들" 사이로 칼로가 의사에게 이송되었다고 묘사했다. 칼로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는 태아가 "형체를 이루지 못한 채 분해되어 나왔다"고 표현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뱃 속 태아가 생존가능성이 없다는 판단하에 소파술을 가한 것으로 이해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유산-임신중절의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칼로는 그림을 그렸다. 이때 그린 첫 작품이 <헨리 포드 종합병원>이다. 하얀 병원 침대에 선명한 붉은 색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프리다 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집중시킨다. 특히 뒤쪽이 조금 들린 듯이 그려진 흰 침대는 금방이라도 칼로의 몸을 굴려 떨어뜨릴 듯 불안정하여, 칼로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보는 이들도 공유하도록 초대하는 역할을 한다.
그림 속 칼로가 복부 쪽에서 움켜쥐고 있는 붉은 실은 여섯 개의 토템 상징물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상징들은 명백히 본인이 경험한 유산/임신중절술에 대한 언급이다. 이 중 상단 중앙에는 눈도 채 뜨지 못한 남성 태아를 배치했다. 이에 연결된 실에만 리본 매듭이 없어 칼로의 탯줄로 이어졌던 자신의 아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하고 있다. 리베라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던 보라색 카틀레야 난초꽃은 뱃속 태아 역시 그처럼 리베라를 통해 자신에게 깃든 축복이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상단 좌측의 여성 생식기관 해부 모형, 하단 좌우의 금속 의료장비(아마 멸균기로 추정)와 인간 골반뼈 등은 자신의 산부인과적 체험을 드러낸다. 또한 수술과 회복 과정이 더디고 느리게 느껴졌음을 달팽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명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도상들에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우리만치 내밀하고 개인적인 상징성을 부여해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또한 이 그림은 아이를 잃는 경험의 신체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서적 측면도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침대 위에서 눈물과 피를 흘리는 칼로의 모습에서 갑작스러운 신체적 변화를 대하는 인간으로서의 혼란과 공포, 지키리라 어렵게 결심했던 뱃속의 생명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 등의 개인으로서의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른 한 편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면 칼로가 당시 느낀 사회적 차원에서의 감정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병원 침대는 병원 실내가 아닌 야외 풍광 속에 떠 있는 듯 그려져 있는데, 세상과 괴리된 흰 침대는 칼로가 느낀 무력감, 고립감을 시사한다. 이와 대조되는 풍광은 멀리 지평선과 그 위에 서 있는 포드 자동차의 디트로이트 리버 루즈 공장을 묘사한다.
인류학자 린다 레인은 자신의 저서 『잃어버린 모성: 미국 내 임신 중단에 관한 페미니스트 회고』에서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여성을 사회로 편입시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경계적 사회적 위치에 갇힌 느낌을 받는다"고 서술한 바 있다. 포드 부부가 리베라에게 벽화를 수주하며 디트로이트에서 후원자들의 환대 속에 지낼 때에, 칼로는 유창한 영어 실력 덕에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자신을 ”우리 부부 중 리베라는 아이, 나는 큰 화가“라 자신만만히 설명하던 젊은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임신, 중절 시도, 비자발적인 중절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녀는 점점 더 고립되는 느낌을 받고, 다시 사회적인 존재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 속에 고통받은 것 같다. 인생에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칼로는 이 테마의 연작을 그리는데, 그중 하나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나의 탄생>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실내 공간에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 출생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칼로는 이 그림을 가리켜 “내가 상상한 나의 탄생”을 그렸다 언급한 적도 있고 다른 한 편 자신이 스스로를 낳는 장면이라 설명한 바도 있다. 그녀는 일기에 “스스로를 낳은 자...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다.”고 적었다. 모체 밖으로 머리부터 아기 칼로가 나오고 있는데 눈을 감고 고요한 표정을 한 모습이 앞서 본 <헨리 포드 종합병원> 속 사산된 태아의 모습과 유사하여 또다른 사산의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얼굴이 흰 시트로 덮여 있어 이 출산 장면 속 어머니와 아이 모두의 죽음의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읽어볼 수 있다.
침대 머리 맡벽에는 <비탄의 성모> 그림이 걸려 있다. 성모는 죽은 엄마와 아이를 위해 슬픔과 연민으로 눈물을 흘려주지만,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무기력함에 괴로운 얼굴이다. 특히 이 그림은 자신의 유산 직후 어머니의 장례마저 치렀던 상황에서 그려졌다는 점에서 칼로가 어머니와 자식, 생과 사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심도 높은 성찰을 진행 중이었다고 해석해 볼 만 하다. 이 작품은 미국 팝가수 마돈나가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돈나는 잡지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이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칼로가 이 작품에 새겨넣은 정서와 삶에 대한 고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에 깊이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난임으로 인해 칼로가 경험한 여러 삶의 사건들은 그녀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최근 UCLA 의료 센터의 외과 병리학자 페르난도 안텔로는 그 난임의 원인에 대한 병리학적 가설을 제시해 우리의 흥미를 끈다. 그는 칼로에게 애셔맨 증후군(Asherman’s Syndrome)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애셔맨 증후군은 자궁 내막에 유착이나 흉터 조직이 형성되어 불규칙한 월경, 불임, 그리고 태반 이상을 유발하는 희귀한 의학적인 상태를 말한다.
애셔맨 증후군을 일으킬 위험 요인으로는 자궁근종 제거술, 임신중절수술(소파술), 제왕절개, 자궁 내 피임장치, 외상, 감염 (골반염, 생식기 결핵), 비만 등이 있다. 수술이나 감염의 결과로 불규칙한 생리주기, 자궁 통증, 난임과 같은 증상을 경험하게 되며, 손상조직으로 인해 자궁 내 공간이 줄어들면서 착상 공간이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료기술로는 초음파와 자궁경검사를 통해 손상조직의 존재, 위치, 자궁내 유착 정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애셔맨 증후군을 진단하며, 수술을 통해 자궁 내 손상조직을 제거한 후 자궁 내 풍선을 약 2주 정도 설치하여 새로운 손상이 형성되는 것을 예방하는 치료법이 있으나 이는 칼로가 살았던 시대에는 불가한 것이었다. 안텔로는 미술사학자들이 오랜 기간 칼로의 불임을 18세 때의 교통사고와 연관을 시켰으나 대부분 손상된 골격이나 작은 난소와 같은 모호한 언급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 구체적인 진단을 위해 칼로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고 남아있는 그녀의 의학 기록을 연구했다. 그 결과 인텔로는 칼로의 난임을 일으킬 인자 중 몇 가지를 배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개복술을 집도한 의사의 기록에 난소 내 낭종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앓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 유산을 일으키는 혈액 응고 문제에 대한 언급이 수십 개의 의료기록에 전무한 점 등이다. 여러 난임의 조건들을 순차적으로 배제하여 안텔로는 트롤리의 난간이 칼로의 자궁 내벽을 손상시켰으며 이로 인해 흉터 조직이 형성되어 임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으리라 결론 내린다.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의 생식 내분비학자 헤더 허들스턴은 만일 칼로가 애셔맨 증후군을 앓았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꼭 트롤리 사고라 볼 순 없다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칼로가 이전 유산 시 자궁에 남아 있던 태아 조직이 감염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칼로의 난임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현대의 의료인에게 추정의 영역일 뿐이지만 이에 대한 의료인들의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칼로는 난임, 출산, 유산 등의 문제에서 출발해 자신의 신체적, 감정적 고통을 꾸준히 탐구했던 아티스트다. 그녀의 작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예술이 병을 가진 혹은 갖게 될 이들과 의료인들 모두에게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어준다.
인디애나 대학교 의과대학 영상의학과 교수인 리처드 군더맨은 2008년 Radiology 저널에 쓴 논문에서 "이러한 의료적 재난에 직면한 환자들을 돌볼 때, 우리는 단순히 부러진 뼈나 찢어진 조직만이 아니라 존엄성과 자율성을 잃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변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회복하는 데 착수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칼로는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인해 자신이 잃은 것을 고통스럽게 이해하고 마침내 수용한 뒤 신체적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했다. 이는 그녀의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선사할 뿐 아니라 의료인에게는 환자의 회복을 위한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오범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가정의학과 부교수
오경은 상명대학교 계당교양교육원 미술사학 조교수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 시티의 코요아칸 지역에서 넉넉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6살이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와 발에 상당한 장애를 남기기는 했지만, 가족들의 애정과 도움 속에 그녀는 밝고 명랑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의대 진학을 꿈꾸던 18세의 그녀에게 1925년 9월, 삶을 바꿀 사고가 일어난다. 타고 있던 버스가 트롤리와 충돌하는 사고였는데, 이때 척추, 늑골, 어깨뼈 등이 골절되거나 탈구되었을 뿐 아니라, 차체의 금속 난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하여 골반이 부서지고 자궁을 포함한 여러 장기기관이 손상되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극심한 피로와 만성 통증에 시달렸으며, 총 32회에 걸쳐 여러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신체 이미지와 자아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병상에서 회복하던 시기, 그녀의 어머니는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이젤을 마련해 주었고, 이젤 위에 거울을 설치해 자신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나는 자주 혼자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고립된 회복의 시기에 그림은 칼로가 존재에 대한 질문과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법이 되어주었다. 1927년이 되어서야 병원 침대 신세를 면하게 된 칼로는 이미 대학생이 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만난 아티스트들과의 한 파티에서 1928년 당대 유명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를 소개받는다. 리베라는 멕시코시티의 공공건물에 노동자들의 삶을 대담하게 묘사한 거대 프레스코화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21살의 나이 차와 리베라에게 이미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같이 연애하고 1929년 결혼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 리베라는 해외 수주를 자주 받게 되는데 특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시에서 대형 벽화 프로젝트들을 맡아 칼로와 함께 미국 생활을 하였다. 1932년, 24세의 칼로는 본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칼로의 첫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본인의 신체 조건상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일정상의 어려움, 리베라가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방치해왔음 등의 이유로 임신 중절이 이성적 판단이라 여겼다.
이에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종합병원의 의사인 프랫 박사와 상담 끝에 자궁 수축 유도제로 파마자유와 퀴닌(quinine, 과거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쓰였으며 임산부가 섭취했을 경우 기형아-특히 청각장애-가 생길 수 있으며 과량 섭취할 경우 유산할 수 있음)을 처방받아 의학적 낙태를 실행한다. 그러나 그녀는 약 6일간 경미한 출혈을 보일 뿐이라 다시 프랫 박사를 찾아갔다가 임신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소견을 받은 후 잠시 소파술 등을 고민하다 결국 뱃속의 아이를 지키겠다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6월 말경에 찾아왔다. 칼로는 하혈, 경련, 구역질 등의 문제 증상을 겪고 있었으나 프랫 박사에게 다시 가는 것을 거부한다. 7월 4일 밤, 칼로는 심한 통증과 함께 대량 출혈을 보였고, 리베라는 다음 날 아침에 구급차를 불러 칼로를 헨리 포드 종합병원으로 이송한다. 당시 이들 부부와 함께 거주하던 화가 루시엔 블로흐는 자신의 일기에서 칼로가 "출산의 고통 속에... 그녀가 만든 핏물 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핏덩이들" 사이로 칼로가 의사에게 이송되었다고 묘사했다. 칼로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는 태아가 "형체를 이루지 못한 채 분해되어 나왔다"고 표현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뱃 속 태아가 생존가능성이 없다는 판단하에 소파술을 가한 것으로 이해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유산-임신중절의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칼로는 그림을 그렸다. 이때 그린 첫 작품이 <헨리 포드 종합병원>이다. 하얀 병원 침대에 선명한 붉은 색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프리다 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집중시킨다. 특히 뒤쪽이 조금 들린 듯이 그려진 흰 침대는 금방이라도 칼로의 몸을 굴려 떨어뜨릴 듯 불안정하여, 칼로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보는 이들도 공유하도록 초대하는 역할을 한다.
그림 속 칼로가 복부 쪽에서 움켜쥐고 있는 붉은 실은 여섯 개의 토템 상징물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상징들은 명백히 본인이 경험한 유산/임신중절술에 대한 언급이다. 이 중 상단 중앙에는 눈도 채 뜨지 못한 남성 태아를 배치했다. 이에 연결된 실에만 리본 매듭이 없어 칼로의 탯줄로 이어졌던 자신의 아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하고 있다. 리베라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던 보라색 카틀레야 난초꽃은 뱃속 태아 역시 그처럼 리베라를 통해 자신에게 깃든 축복이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상단 좌측의 여성 생식기관 해부 모형, 하단 좌우의 금속 의료장비(아마 멸균기로 추정)와 인간 골반뼈 등은 자신의 산부인과적 체험을 드러낸다. 또한 수술과 회복 과정이 더디고 느리게 느껴졌음을 달팽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명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도상들에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우리만치 내밀하고 개인적인 상징성을 부여해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또한 이 그림은 아이를 잃는 경험의 신체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서적 측면도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침대 위에서 눈물과 피를 흘리는 칼로의 모습에서 갑작스러운 신체적 변화를 대하는 인간으로서의 혼란과 공포, 지키리라 어렵게 결심했던 뱃속의 생명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 등의 개인으로서의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른 한 편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면 칼로가 당시 느낀 사회적 차원에서의 감정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병원 침대는 병원 실내가 아닌 야외 풍광 속에 떠 있는 듯 그려져 있는데, 세상과 괴리된 흰 침대는 칼로가 느낀 무력감, 고립감을 시사한다. 이와 대조되는 풍광은 멀리 지평선과 그 위에 서 있는 포드 자동차의 디트로이트 리버 루즈 공장을 묘사한다.
인류학자 린다 레인은 자신의 저서 『잃어버린 모성: 미국 내 임신 중단에 관한 페미니스트 회고』에서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여성을 사회로 편입시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이 경계적 사회적 위치에 갇힌 느낌을 받는다"고 서술한 바 있다. 포드 부부가 리베라에게 벽화를 수주하며 디트로이트에서 후원자들의 환대 속에 지낼 때에, 칼로는 유창한 영어 실력 덕에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자신을 ”우리 부부 중 리베라는 아이, 나는 큰 화가“라 자신만만히 설명하던 젊은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임신, 중절 시도, 비자발적인 중절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녀는 점점 더 고립되는 느낌을 받고, 다시 사회적인 존재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 속에 고통받은 것 같다. 인생에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칼로는 이 테마의 연작을 그리는데, 그중 하나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나의 탄생>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실내 공간에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 출생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칼로는 이 그림을 가리켜 “내가 상상한 나의 탄생”을 그렸다 언급한 적도 있고 다른 한 편 자신이 스스로를 낳는 장면이라 설명한 바도 있다. 그녀는 일기에 “스스로를 낳은 자...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다.”고 적었다. 모체 밖으로 머리부터 아기 칼로가 나오고 있는데 눈을 감고 고요한 표정을 한 모습이 앞서 본 <헨리 포드 종합병원> 속 사산된 태아의 모습과 유사하여 또다른 사산의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얼굴이 흰 시트로 덮여 있어 이 출산 장면 속 어머니와 아이 모두의 죽음의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읽어볼 수 있다.
침대 머리 맡벽에는 <비탄의 성모> 그림이 걸려 있다. 성모는 죽은 엄마와 아이를 위해 슬픔과 연민으로 눈물을 흘려주지만,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무기력함에 괴로운 얼굴이다. 특히 이 그림은 자신의 유산 직후 어머니의 장례마저 치렀던 상황에서 그려졌다는 점에서 칼로가 어머니와 자식, 생과 사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심도 높은 성찰을 진행 중이었다고 해석해 볼 만 하다. 이 작품은 미국 팝가수 마돈나가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돈나는 잡지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이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칼로가 이 작품에 새겨넣은 정서와 삶에 대한 고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에 깊이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난임으로 인해 칼로가 경험한 여러 삶의 사건들은 그녀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최근 UCLA 의료 센터의 외과 병리학자 페르난도 안텔로는 그 난임의 원인에 대한 병리학적 가설을 제시해 우리의 흥미를 끈다. 그는 칼로에게 애셔맨 증후군(Asherman’s Syndrome)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애셔맨 증후군은 자궁 내막에 유착이나 흉터 조직이 형성되어 불규칙한 월경, 불임, 그리고 태반 이상을 유발하는 희귀한 의학적인 상태를 말한다.
애셔맨 증후군을 일으킬 위험 요인으로는 자궁근종 제거술, 임신중절수술(소파술), 제왕절개, 자궁 내 피임장치, 외상, 감염 (골반염, 생식기 결핵), 비만 등이 있다. 수술이나 감염의 결과로 불규칙한 생리주기, 자궁 통증, 난임과 같은 증상을 경험하게 되며, 손상조직으로 인해 자궁 내 공간이 줄어들면서 착상 공간이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료기술로는 초음파와 자궁경검사를 통해 손상조직의 존재, 위치, 자궁내 유착 정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애셔맨 증후군을 진단하며, 수술을 통해 자궁 내 손상조직을 제거한 후 자궁 내 풍선을 약 2주 정도 설치하여 새로운 손상이 형성되는 것을 예방하는 치료법이 있으나 이는 칼로가 살았던 시대에는 불가한 것이었다. 안텔로는 미술사학자들이 오랜 기간 칼로의 불임을 18세 때의 교통사고와 연관을 시켰으나 대부분 손상된 골격이나 작은 난소와 같은 모호한 언급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 구체적인 진단을 위해 칼로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고 남아있는 그녀의 의학 기록을 연구했다. 그 결과 인텔로는 칼로의 난임을 일으킬 인자 중 몇 가지를 배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개복술을 집도한 의사의 기록에 난소 내 낭종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앓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 유산을 일으키는 혈액 응고 문제에 대한 언급이 수십 개의 의료기록에 전무한 점 등이다. 여러 난임의 조건들을 순차적으로 배제하여 안텔로는 트롤리의 난간이 칼로의 자궁 내벽을 손상시켰으며 이로 인해 흉터 조직이 형성되어 임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으리라 결론 내린다.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의 생식 내분비학자 헤더 허들스턴은 만일 칼로가 애셔맨 증후군을 앓았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꼭 트롤리 사고라 볼 순 없다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칼로가 이전 유산 시 자궁에 남아 있던 태아 조직이 감염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칼로의 난임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현대의 의료인에게 추정의 영역일 뿐이지만 이에 대한 의료인들의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칼로는 난임, 출산, 유산 등의 문제에서 출발해 자신의 신체적, 감정적 고통을 꾸준히 탐구했던 아티스트다. 그녀의 작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예술이 병을 가진 혹은 갖게 될 이들과 의료인들 모두에게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어준다.
인디애나 대학교 의과대학 영상의학과 교수인 리처드 군더맨은 2008년 Radiology 저널에 쓴 논문에서 "이러한 의료적 재난에 직면한 환자들을 돌볼 때, 우리는 단순히 부러진 뼈나 찢어진 조직만이 아니라 존엄성과 자율성을 잃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변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회복하는 데 착수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칼로는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인해 자신이 잃은 것을 고통스럽게 이해하고 마침내 수용한 뒤 신체적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했다. 이는 그녀의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선사할 뿐 아니라 의료인에게는 환자의 회복을 위한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오범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가정의학과 부교수
오경은 상명대학교 계당교양교육원 미술사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