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의 화가가 되고 싶다" 브라질의 창조적 식인 거인이 된 타르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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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
"나는 내 땅의 화가가 되고 싶다."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 (Tarsila do Amaral, 1886-1973)
<아바포루>는 브라질 모더니즘의 상징,
독특한 인물 묘사를 통해 문화적 독창성을 강조
전형적인 브라질 캐릭터 찾기 위해
모양과 색상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 구축
"나는 내 땅의 화가가 되고 싶다."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 (Tarsila do Amaral, 1886-1973)
<아바포루>는 브라질 모더니즘의 상징,
독특한 인물 묘사를 통해 문화적 독창성을 강조
전형적인 브라질 캐릭터 찾기 위해
모양과 색상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 구축
수년 전 파타고니아 여행길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라틴 아메리카 미술관(MALBA)을 관람했는데, 이 미술관의 대표 작품 중 대표 작품이 특이했다. 마치 밑에서 한없이 위를 바라보듯 손발이 유독 강조된 둥글둥글한 거인이 캔버스 좌측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의 머리에 거의 닳을 듯이 레몬 슬라이스 같은 해가 떠 있는데 그의 맞은편에는 땅에서 솟은 듯 초록의 연장으로 거인 키만 한 선인장이 서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라틴 아메리카 미술관이라지만 브라질 화가의 작품을 뱃머리에 두고 항해하는 아르헨티나의 배라니!
그리고 다시 수년 뒤 상파울루에 도착해 이 도시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상파울루 미술관(MASP)과 피나코테카에 가니 이 화가의 작품들이 모두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예술가 중 한 명이면서 현대적인 스타일로 브라질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브라질의 열망을 가장 잘 달성하고 그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자부심의 이름표를 안겨준 이 화가는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다.
브라질에 모더니즘을
타르실라는 1886년생으로 상파울루주의 작은 마을 카피바리 출신이다. 때는 브라질에서 노예 제도가 종식되기 2년 전이었고, 그의 가족은 커피를 재배하는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상파울루로 돌아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에서 조각, 드로잉, 페인팅을 배웠으며 미래 중요한 동지가 될 화가 아니타 말파티도 만났다. 보수적인 상파울루를 떠나 1920년 파리로 향했고 아카데미 쥘리앙(Académie Julian)에 다니며 다다이스트, 미래파의 작품들을 접했다. 1922년 파리에서 상파울루로 돌아온 그녀는 아니타 말파티를 통해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 마리우 지 안드라지, 메노치 데우 피치아 등을 만나 5인회(Grupo dos Cinco)를 구성했다. 타르실라가 상파울루에 도착하기 직전, 이 그룹은 모던아트위크(Semana de Arte Moderna)를 조직해 브라질 고유의 것들을 포함해 브라질 문화를 특징적으로 표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유럽 문화를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의 구체화
1923년부터 파리를 오가는 동안 타르실라는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에 노출되었다. 당시 유럽 예술가들 사이에 아프리카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자 그녀 또한 그때까지 체득한 모던한 스타일을 통합하면서 자국의 토착 형태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흑인 여인(A Negra)>(1923)이다. 공간을 평평하게 만들고 배경을 기하학적 형태로 채워 입체파의 영향이 보이는 이 그림은 큰 가슴을 가진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데 아마라우는 이 여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 유모였다고 밝힌다. 이 시기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점점 더 브라질 사람처럼 느껴져요. 나는 내 땅의 화가가 되고 싶어요. 어린 시절 내내 농장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시절의 추억이 제게 소중해졌어요. <...> 그들이 여기에서 원하는 것은 각자가 자국의 가치로 공헌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러시아 발레, 일본 그래픽, 흑인 음악의 성공을 설명하지요. 파리는 파리 예술에 지쳤어요.”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와 연인 사이가 되어 카니발 기간의 리우, 미나스 제라이스 광산 마을 등 브라질 전역을 여행하며 파리에서 영감을 얻은 초현실주의 스타일을 민족주의 예술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이주민, 다양한 혼혈인을 둘러싼 신화 및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사회, 정체성, 인종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었다. <파벨라 언덕(Morro de Favela)>(1924)도 이때의 그림이다. 여행 중에 쓴 오스바우지의 시와 타르실라의 삽화가 결합해 <파우 브라질(Pau Brasil)>(1924)이 세상에 선보였다.
같은 이름의 선언문(파우 브라질 운동: 1924-25)에서 안드라지는 브라질 문화가 유럽 문화를 수입한 산물이라고 강조했고, 브라질 나무가 전 세계에 중요한 수출품이 된 것처럼(파우 브라질은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토착 수목에 붙인 이름으로 ‘불붙은 숯과 같은 나무’라는 뜻이다. ‘브라질’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브라질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예술가들에게 브라질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평론가 세르지오 밀리에는 이 시기 아마라우의 작품들에 대해 “(유럽 지향의)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이전에 부끄러워했던 감상적이고 순진한 브라질 현실의 종합적 포착”이라고 말했다. 타르실라가 즐겨 쓴 색상은 마을 곳곳에서 목격되는 살아있는 색상이었다. “미나스를 돌아보며 나는 어렸을 때 좋아하던 색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그 색깔들이 추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들을 내 캔버스에 적용함으로써 저 억압에 대해 복수했다. 가장 순수한 파란색, 보랏빛이 도는 분홍색, 밝은 노란색, 노래하는 초록색 등으로.”
1926년 타르실라는 오스바우지와 결혼했고 그들은 유럽과 중동 전역을 계속 여행했다. 파리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고 그녀의 작품은 이국적이고 독창적이며 순진한 동시에 지성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브라질에서 제작된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아바포루
타르실라는 남미 특유의 미학 운동인 식인주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글머리에 묘사한 유명한 그림인 <아바포루(Abaporu)>로 오스바우지가 “식인주의 선언(Manifesto Antropófago: 1928-29)”을 낳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바포루>는 1928년 타르실라가 오스바우지에게 생일 선물로 준 제목 없는 그림이었는데 그는 이 이미지의 형태가 뭔가 특별한 것을 나타냄을 감지했다. 타르실라는 그것이 무의식의 이미지이며, 어린 시절 흑인 유모가 들려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투피-과라니어 사전을 뒤져 그 그림에 ‘아바포루(사람을 먹는 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를 계기로 오스바우지는 ‘타 문화를 삼켜 브라질적인 것으로 변형하자’라는 운동을 주창한다. ‘식인 의식’은 적의 자질을 흡수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가 혼합된 브라질의 역사가 곧 브라질의 정체성
그림은 기형적으로 손과 발이 거대한 형상으로 표현된 인간이 초록색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의 머리는 상대적으로 작다. 이 인간은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다. 파리 시절 타르실라의 스승이었던 페르낭 레제 스타일의 큐비즘, 피카소나 미로의 초현실주의 영향도 엿보인다. 타르실라는 머리는 작지만 팔과 다리가 큰 브라질인을 상징물로 삼아 육체적 힘은 탐구되나 지적 능력은 탐구되지 않았던 경향성을 오히려 당당히 비웃는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식인종”으로 부르며 야만적이라 매도할 때, 그렇게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한 것에 대해, 이들은 오히려 “식인주의”로 대응한다. 다른 문화를 왕성하게 먹어 치우고 흡수해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낸 것이 브라질의 힘이니 그렇게 소화해내겠다는 대담한 선언이었다. 마리우 지 안드라지는 소설 <마쿠나이마>를 써서 식인주의를 문학적으로 펼쳐 보였다. 브라질 현대문화의 주춧돌이 이렇게 놓였다.
문화 중심지와 주변부의 경계를 환기
이듬해에도 선언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타르실라는 <안트로포파지아(Antropofagia)>(1929), 즉 ‘식인주의’를 그렸는데, 여기에는 <아바포루>의 인물과 <흑인 여인>의 인물, 브라질 바나나 잎, 선인장, 레몬 조각 태양이 등장했다. 이제 타르실라는 사물에서가 아니라 관계에서 교훈을 추출한다. 브라질의 시각성이란 무엇인가. 환경을 입체주의적 열쇠로 코드화하는 동시에 어린 시절 농촌 생활에 기반을 둔 서정성의 표현을 포기하지 않는다. 입체파의 각진 기하학에 바로크 전통의 구불구불한 리듬감을 자연스럽게 겹친다. 1929년 뉴욕 증권 거래소의 위기로 브라질 커피 사업도 직격탄을 맞았고 타르실라 가족의 커피 농장도 파산했다. 리우와 상파울루, 뉴욕과 파리에서 활발히 전시 활동을 벌이던 타르실라도 난관에 봉착하고 1930년에는 오스바우지와도 이혼한다.
1931년 소련을 여행하고 <이등석(Segunda Classe)>(1931), <노동자들 (Os Operarios)>(1933) 등을 그리며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브라질로 돌아와서는 제툴리우 바르가스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지만 1950-60년대에 상파울루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1973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의 얼굴이 되었던 것은 브라질의 창조적인 식인 거인이었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타르실라는 1886년생으로 상파울루주의 작은 마을 카피바리 출신이다. 때는 브라질에서 노예 제도가 종식되기 2년 전이었고, 그의 가족은 커피를 재배하는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상파울루로 돌아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에서 조각, 드로잉, 페인팅을 배웠으며 미래 중요한 동지가 될 화가 아니타 말파티도 만났다. 보수적인 상파울루를 떠나 1920년 파리로 향했고 아카데미 쥘리앙(Académie Julian)에 다니며 다다이스트, 미래파의 작품들을 접했다. 1922년 파리에서 상파울루로 돌아온 그녀는 아니타 말파티를 통해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 마리우 지 안드라지, 메노치 데우 피치아 등을 만나 5인회(Grupo dos Cinco)를 구성했다. 타르실라가 상파울루에 도착하기 직전, 이 그룹은 모던아트위크(Semana de Arte Moderna)를 조직해 브라질 고유의 것들을 포함해 브라질 문화를 특징적으로 표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유럽 문화를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의 구체화
1923년부터 파리를 오가는 동안 타르실라는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에 노출되었다. 당시 유럽 예술가들 사이에 아프리카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자 그녀 또한 그때까지 체득한 모던한 스타일을 통합하면서 자국의 토착 형태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흑인 여인(A Negra)>(1923)이다. 공간을 평평하게 만들고 배경을 기하학적 형태로 채워 입체파의 영향이 보이는 이 그림은 큰 가슴을 가진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데 아마라우는 이 여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 유모였다고 밝힌다. 이 시기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점점 더 브라질 사람처럼 느껴져요. 나는 내 땅의 화가가 되고 싶어요. 어린 시절 내내 농장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시절의 추억이 제게 소중해졌어요. <...> 그들이 여기에서 원하는 것은 각자가 자국의 가치로 공헌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러시아 발레, 일본 그래픽, 흑인 음악의 성공을 설명하지요. 파리는 파리 예술에 지쳤어요.”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와 연인 사이가 되어 카니발 기간의 리우, 미나스 제라이스 광산 마을 등 브라질 전역을 여행하며 파리에서 영감을 얻은 초현실주의 스타일을 민족주의 예술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이주민, 다양한 혼혈인을 둘러싼 신화 및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사회, 정체성, 인종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었다. <파벨라 언덕(Morro de Favela)>(1924)도 이때의 그림이다. 여행 중에 쓴 오스바우지의 시와 타르실라의 삽화가 결합해 <파우 브라질(Pau Brasil)>(1924)이 세상에 선보였다.
같은 이름의 선언문(파우 브라질 운동: 1924-25)에서 안드라지는 브라질 문화가 유럽 문화를 수입한 산물이라고 강조했고, 브라질 나무가 전 세계에 중요한 수출품이 된 것처럼(파우 브라질은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토착 수목에 붙인 이름으로 ‘불붙은 숯과 같은 나무’라는 뜻이다. ‘브라질’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브라질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예술가들에게 브라질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평론가 세르지오 밀리에는 이 시기 아마라우의 작품들에 대해 “(유럽 지향의)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이전에 부끄러워했던 감상적이고 순진한 브라질 현실의 종합적 포착”이라고 말했다. 타르실라가 즐겨 쓴 색상은 마을 곳곳에서 목격되는 살아있는 색상이었다. “미나스를 돌아보며 나는 어렸을 때 좋아하던 색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그 색깔들이 추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들을 내 캔버스에 적용함으로써 저 억압에 대해 복수했다. 가장 순수한 파란색, 보랏빛이 도는 분홍색, 밝은 노란색, 노래하는 초록색 등으로.”
1926년 타르실라는 오스바우지와 결혼했고 그들은 유럽과 중동 전역을 계속 여행했다. 파리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고 그녀의 작품은 이국적이고 독창적이며 순진한 동시에 지성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브라질에서 제작된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아바포루
타르실라는 남미 특유의 미학 운동인 식인주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글머리에 묘사한 유명한 그림인 <아바포루(Abaporu)>로 오스바우지가 “식인주의 선언(Manifesto Antropófago: 1928-29)”을 낳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바포루>는 1928년 타르실라가 오스바우지에게 생일 선물로 준 제목 없는 그림이었는데 그는 이 이미지의 형태가 뭔가 특별한 것을 나타냄을 감지했다. 타르실라는 그것이 무의식의 이미지이며, 어린 시절 흑인 유모가 들려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투피-과라니어 사전을 뒤져 그 그림에 ‘아바포루(사람을 먹는 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를 계기로 오스바우지는 ‘타 문화를 삼켜 브라질적인 것으로 변형하자’라는 운동을 주창한다. ‘식인 의식’은 적의 자질을 흡수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가 혼합된 브라질의 역사가 곧 브라질의 정체성
그림은 기형적으로 손과 발이 거대한 형상으로 표현된 인간이 초록색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의 머리는 상대적으로 작다. 이 인간은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다. 파리 시절 타르실라의 스승이었던 페르낭 레제 스타일의 큐비즘, 피카소나 미로의 초현실주의 영향도 엿보인다. 타르실라는 머리는 작지만 팔과 다리가 큰 브라질인을 상징물로 삼아 육체적 힘은 탐구되나 지적 능력은 탐구되지 않았던 경향성을 오히려 당당히 비웃는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식인종”으로 부르며 야만적이라 매도할 때, 그렇게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한 것에 대해, 이들은 오히려 “식인주의”로 대응한다. 다른 문화를 왕성하게 먹어 치우고 흡수해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낸 것이 브라질의 힘이니 그렇게 소화해내겠다는 대담한 선언이었다. 마리우 지 안드라지는 소설 <마쿠나이마>를 써서 식인주의를 문학적으로 펼쳐 보였다. 브라질 현대문화의 주춧돌이 이렇게 놓였다.
문화 중심지와 주변부의 경계를 환기
이듬해에도 선언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타르실라는 <안트로포파지아(Antropofagia)>(1929), 즉 ‘식인주의’를 그렸는데, 여기에는 <아바포루>의 인물과 <흑인 여인>의 인물, 브라질 바나나 잎, 선인장, 레몬 조각 태양이 등장했다. 이제 타르실라는 사물에서가 아니라 관계에서 교훈을 추출한다. 브라질의 시각성이란 무엇인가. 환경을 입체주의적 열쇠로 코드화하는 동시에 어린 시절 농촌 생활에 기반을 둔 서정성의 표현을 포기하지 않는다. 입체파의 각진 기하학에 바로크 전통의 구불구불한 리듬감을 자연스럽게 겹친다. 1929년 뉴욕 증권 거래소의 위기로 브라질 커피 사업도 직격탄을 맞았고 타르실라 가족의 커피 농장도 파산했다. 리우와 상파울루, 뉴욕과 파리에서 활발히 전시 활동을 벌이던 타르실라도 난관에 봉착하고 1930년에는 오스바우지와도 이혼한다.
1931년 소련을 여행하고 <이등석(Segunda Classe)>(1931), <노동자들 (Os Operarios)>(1933) 등을 그리며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브라질로 돌아와서는 제툴리우 바르가스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지만 1950-60년대에 상파울루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1973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의 얼굴이 되었던 것은 브라질의 창조적인 식인 거인이었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