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지독히도 사랑한 일본인, 영화관이 곧 집이었던 마끼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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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대해 쓴
'노바디' 영화인 쯔지다 마끼를 애도하며
'노바디' 영화인 쯔지다 마끼를 애도하며
일본인 쯔지다 마끼(土田眞樹). 올해가 환갑이라 했지만 내가 알기에 그는 1965년생일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 나이를 생각하며 그렇게 얘기하거나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10월 21일 그나 나나 다소 어울리지 않는 영화 ‘베놈 : 라스트 댄스’ 시사를 보기 위해 서울의 한 극장에 가는 길에서 조우했다.
용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부딪혔고 서로 겸연쩍게 웃었었다. “너도 이 영화 보러 왔어? 늦었네?” “형도? 응 늦었네요.” 그때 그는 잘 걷지를 못했다. 시사 시간은 이미 늦어 있었지만,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고 난 그에게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는 때 이른 롱 파카를 입고 있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대체? 지금 추워? 몸이 아파서 추운 거 아냐?” “심장이 안 좋아서 잘 못 걷겠어요. 그나저나 형은 괜찮아?” 나는 연신 혀를 끌끌 찼다. “나댕기지 마라. 너 이러다 죽겠다. 그리고 난 괜찮아.” 일본 집에 좀 가 있으면서 한동안 쉬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럼 나처럼 회복할 수 있다고도 했다. 힘내!, 라고도 말했다.
극장에 들어서서 그는 아이맥스 관임에도 불구하고 맨 앞줄에 앉았다. 계단을 올라갈 힘조차 없어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때 난 살짝 이상한 부음(訃音)을 느꼈다. 그날 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일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쯔지다 마끼는 영화기자이자 평론가, 코디네이터, 프로듀서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확하게 명명할 이름은 없다. 무엇보다 한국 대중들에게 그는 우리 모두 대개가 그렇듯이 그냥 ‘노바디’이다. 한국을 엄청나게 사랑했고…까지는 모르지만 일본 영화와 한국 영화 모두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규정한다면 일본인이기도 한국인이기도 원치 않았던 코스모폴리탄 영화인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그가 죽었다. 10월 29일,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쯔지다 마끼는 일본 유바리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쯔지다 마끼의 죽음은 예상보다 훨씬 더 국내의 많은 ‘노바디’ 영화인들의 슬픔과 이상한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를 죽인 건 건강이 아니라 영화인으로서의 곤궁했던 사실상의 삶 때문이다. 그의 지난 4~5년은 현진건의 <빈처> 같은 삶이었다.
누군가가 머리라도 잘라 팔아서 먹고살게 해줘야 했음 직한 생활이었다. 살이 많이 빠졌을 때도 그는 운동해서 뺐다고 얘기했지만 잘 못 먹고(나중에는 식욕을 많이 잃었던 모양이다.) 간간이 과도한 음주를 했던 탓에 건강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빨이 빠졌고 안경테는 부러져 한쪽 테로만 쓰고 다녔으며 극장 한구석에 앉아 고시텔에서 가져온 찬합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홈리스 모습 그대로였다.
쯔지다 마끼는 일본 감독 코즈루 노리코와 ‘다이아몬드 셰이크’라는 8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지난 9월 초 제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했다. 1980년대 일본의 전설적인 록커 다이아몬드 유카이와 코구레 타케히코에 대한 얘기였지만 한국 영화제 관객들에게는 너무 낯선 이야기였다. 주목받지 못했다. 쯔지다 마끼는 평생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열심히 영화에 관해 쓰고, 열심히 양국 영화를 홍보마케팅해주고 살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주변부의 삶을 살았다. 당연히 제대로 된 돈을 벌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화가 나는 건 한국이든 일본이든 영화산업에조차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행태, 양극화된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철저하게 도입된 곳에서는 마끼처럼 아무리 열심히 영화 일을 하며 살아가더라도 늘 ‘노바디’의 존재에 불과하며 치과에 가서 대공사를 하기에도 돈이 턱없이 모자라는 빈궁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쯔지다 마키의 죽음은 아무리 세계화다 뭐다, 한류가 어쩐다 저쩐다 해도 극단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으로 변질해 가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픈 의미를 지닌다. 난 그의 죽음이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마끼의 집은 극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영화제가 수백개에 이르고 주요 영화제만 해도 20여 개가 넘는다. 1년 일정을 잘 짜면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잠을 잘 수 있으며,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작품으로 초청받거나 통역이나 코디네이터 일자리가 생기면 (싸구려) 호텔과 리셉션에 들어갈 수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리포터로서 통신원으로서 기자회견장을 출입할 수 있다. 그의 1년 스케줄은 영화제와 주요 영화 시사회 현장이었으며 그렇게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셈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화를 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와 더위를 피하고 눈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극장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그를 대개 극장에서 만났고 영화제에서 만나 술을 마셨으며 그는 한국말을 잘했지만 우리는 굳이 일본 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점도 만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우리 둘의 관계에서 미안한 일 중 하나에 속한다. 그가 나에게 성의를 다한 것만큼 나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그걸 미안해할 방도가 이제는 전혀 없다. 실로 허무하고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두살 위이지만 한·일 영화가 흥망을 거듭한 지난 30년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한·일 국가 자체가 지닌 흥망의 의미를 같이했다는 점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만에 하나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서 전쟁을 벌인다 해도 그는 일본 쪽 군함에서 내게 뭔가의 신호를 보내며 “형 나 여기 있어, 형은 거기서 나와 있어!”라고 할 친구이다. 그럼 나는 “마끼야 빨리 피해, 빨리 도망가!”라고 할 것이다.
그가 20년을 더 살고 나도 그럴 수 있었다면 한·일 관계는 엄청나게 호전되고 발전했을 것이다. 국가 간 평화는 외교나 군사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쯔지다 마끼와 우리는 역설적으로 지난 30년을 그런 삶을 살아 온 관계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진정,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
마끼 잘 가라. 곧 따라가게 될 터이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엔 내가 일본 말을 배워서 갈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그때까지 부디 안녕. 오동진 영화평론가
용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부딪혔고 서로 겸연쩍게 웃었었다. “너도 이 영화 보러 왔어? 늦었네?” “형도? 응 늦었네요.” 그때 그는 잘 걷지를 못했다. 시사 시간은 이미 늦어 있었지만,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고 난 그에게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는 때 이른 롱 파카를 입고 있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대체? 지금 추워? 몸이 아파서 추운 거 아냐?” “심장이 안 좋아서 잘 못 걷겠어요. 그나저나 형은 괜찮아?” 나는 연신 혀를 끌끌 찼다. “나댕기지 마라. 너 이러다 죽겠다. 그리고 난 괜찮아.” 일본 집에 좀 가 있으면서 한동안 쉬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럼 나처럼 회복할 수 있다고도 했다. 힘내!, 라고도 말했다.
극장에 들어서서 그는 아이맥스 관임에도 불구하고 맨 앞줄에 앉았다. 계단을 올라갈 힘조차 없어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때 난 살짝 이상한 부음(訃音)을 느꼈다. 그날 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일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쯔지다 마끼는 영화기자이자 평론가, 코디네이터, 프로듀서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확하게 명명할 이름은 없다. 무엇보다 한국 대중들에게 그는 우리 모두 대개가 그렇듯이 그냥 ‘노바디’이다. 한국을 엄청나게 사랑했고…까지는 모르지만 일본 영화와 한국 영화 모두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규정한다면 일본인이기도 한국인이기도 원치 않았던 코스모폴리탄 영화인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그가 죽었다. 10월 29일,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쯔지다 마끼는 일본 유바리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쯔지다 마끼의 죽음은 예상보다 훨씬 더 국내의 많은 ‘노바디’ 영화인들의 슬픔과 이상한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를 죽인 건 건강이 아니라 영화인으로서의 곤궁했던 사실상의 삶 때문이다. 그의 지난 4~5년은 현진건의 <빈처> 같은 삶이었다.
누군가가 머리라도 잘라 팔아서 먹고살게 해줘야 했음 직한 생활이었다. 살이 많이 빠졌을 때도 그는 운동해서 뺐다고 얘기했지만 잘 못 먹고(나중에는 식욕을 많이 잃었던 모양이다.) 간간이 과도한 음주를 했던 탓에 건강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빨이 빠졌고 안경테는 부러져 한쪽 테로만 쓰고 다녔으며 극장 한구석에 앉아 고시텔에서 가져온 찬합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홈리스 모습 그대로였다.
쯔지다 마끼는 일본 감독 코즈루 노리코와 ‘다이아몬드 셰이크’라는 8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지난 9월 초 제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했다. 1980년대 일본의 전설적인 록커 다이아몬드 유카이와 코구레 타케히코에 대한 얘기였지만 한국 영화제 관객들에게는 너무 낯선 이야기였다. 주목받지 못했다. 쯔지다 마끼는 평생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열심히 영화에 관해 쓰고, 열심히 양국 영화를 홍보마케팅해주고 살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주변부의 삶을 살았다. 당연히 제대로 된 돈을 벌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화가 나는 건 한국이든 일본이든 영화산업에조차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행태, 양극화된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철저하게 도입된 곳에서는 마끼처럼 아무리 열심히 영화 일을 하며 살아가더라도 늘 ‘노바디’의 존재에 불과하며 치과에 가서 대공사를 하기에도 돈이 턱없이 모자라는 빈궁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쯔지다 마키의 죽음은 아무리 세계화다 뭐다, 한류가 어쩐다 저쩐다 해도 극단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으로 변질해 가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픈 의미를 지닌다. 난 그의 죽음이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마끼의 집은 극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영화제가 수백개에 이르고 주요 영화제만 해도 20여 개가 넘는다. 1년 일정을 잘 짜면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잠을 잘 수 있으며,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작품으로 초청받거나 통역이나 코디네이터 일자리가 생기면 (싸구려) 호텔과 리셉션에 들어갈 수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리포터로서 통신원으로서 기자회견장을 출입할 수 있다. 그의 1년 스케줄은 영화제와 주요 영화 시사회 현장이었으며 그렇게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셈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화를 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와 더위를 피하고 눈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극장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그를 대개 극장에서 만났고 영화제에서 만나 술을 마셨으며 그는 한국말을 잘했지만 우리는 굳이 일본 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점도 만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우리 둘의 관계에서 미안한 일 중 하나에 속한다. 그가 나에게 성의를 다한 것만큼 나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그걸 미안해할 방도가 이제는 전혀 없다. 실로 허무하고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두살 위이지만 한·일 영화가 흥망을 거듭한 지난 30년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한·일 국가 자체가 지닌 흥망의 의미를 같이했다는 점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만에 하나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서 전쟁을 벌인다 해도 그는 일본 쪽 군함에서 내게 뭔가의 신호를 보내며 “형 나 여기 있어, 형은 거기서 나와 있어!”라고 할 친구이다. 그럼 나는 “마끼야 빨리 피해, 빨리 도망가!”라고 할 것이다.
그가 20년을 더 살고 나도 그럴 수 있었다면 한·일 관계는 엄청나게 호전되고 발전했을 것이다. 국가 간 평화는 외교나 군사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쯔지다 마끼와 우리는 역설적으로 지난 30년을 그런 삶을 살아 온 관계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진정,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
마끼 잘 가라. 곧 따라가게 될 터이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엔 내가 일본 말을 배워서 갈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그때까지 부디 안녕.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