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기억을 모으는 몸짓, 가을의 아상블레(assembl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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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무대 위에서 무중력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북유럽 발레 스타일을 정립한
무용수 오귀스트 부르농빌(1805~1879)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점프,
'아상블레', '브리제', '가브리올'을 볼 수 있는
부르농빌의 대표 안무작 <라실피드>(1836)
무대 위에서 무중력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북유럽 발레 스타일을 정립한
무용수 오귀스트 부르농빌(1805~1879)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점프,
'아상블레', '브리제', '가브리올'을 볼 수 있는
부르농빌의 대표 안무작 <라실피드>(1836)
북유럽의 스웨덴에서 날아온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 과시욕과 허영심의 표출이 되고 있는 상황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소식으로 출판계와 서점들은 오랜만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몇 년 전 읽었던 한강의 글들이 생각났다. 아프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뜻 집어들 수 없었던 한강의 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그 문장들 안에서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기도 했던 기억, 한강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는 미술 작품들. 여러 기억의 조각들이 한 자리에 모아지다가 그 끝에는 수상 소식을 전한 스웨덴과 북유럽의 발레사를 떠올렸다.
발레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태동해서 러시아에서 고전발레의 기틀을 잡는 동안 북유럽에서도 발레에 대한 애정은 깊어갔고, 그 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된 데에는 한 무용수 부자(父子)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였던 아버지 앙투안 부르농빌(Antoine Bournonville, 1760~1843)과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이 그들이다. 특히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은 발레에서 북유럽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신화의 시작은 역시 사랑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구스타프 3세(Gustav III, 1771~1792)에 의해 시작된 스웨덴왕립발레단(Royal Swedish Ballet)이 있다. 구스타프 3세의 초청으로 스웨덴왕립발레단의 감독으로 활동했던 앙투안 부르농빌은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하자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던 그 길에 잠시 들른 덴마크에서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던 그 무용수와는 결국 헤어졌지만, 그는 남은 생애를 덴마크에서 보냈고, 덴마크왕립발레단(Royal Danish Ballet)에서 융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는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태어난다. 무용수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부르농빌은 유전자의 위력을 증명하듯 춤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고,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 북유럽의 발레를 정립시켰다. 스웨덴왕립발레단에서 게스트 발레마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18세기부터 역사를 이어온 스웨덴왕립발레단과 덴마크왕립발레단을 거점으로 부르농빌 부자는 북유럽 발레를 성장시켜 나간 것이다.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정립한 북유럽의 발레는 그만의 색깔이 있다. 이탈리아의 발레가 화려하고, 프랑스의 발레가 황실의 기품을 담고 있고, 러시아의 발레가 인간의 몸을 과학적이고 확장적으로 사용하고, 미국의 발레가 역동적이라면, 북유럽의 발레는 무대 위에서 무중력의 움직임을 실현함으로써 몽환, 낭만, 환영을 자아냈다. 작품 안에서 그 점이 두드러지게 된 건 부르농빌이 무용수 시절 누구보다 뛰어나게 잘 구사했던 ‘깃털 같은 발놀림’ 덕분이다. 이 점은 부르농빌의 안무작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역동적인 점프보다는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점프를 선보였고, 테크닉 면에서는 아상블레(assemblé), 브리제(brisé), 가브리올(cabriole)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농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실피드(La Sylphide, 1836)>에서도 이 부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상블레는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이자 발레 용어로, 한 다리로 바닥을 쓸어서 나갔다가 공중에서 두 다리가 만나서 모아진 후에 착지하는 동작이다. 브리제는 두 다리를 모은 상태에서 상체를 살짝 기울여서 공중으로 몸을 띄우되, 뒷다리가 공중에서 앞다리를 만나 교차한 후에 내려오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뒤로하기도 하는데 제자리가 아니라 이동하면서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가브리올은 앞이나 뒤로 차올린 다리를 나머지 다리가 따라붙듯이 부딪히고 내려오는 동작이다. 이 세 동작은 작은 스텝이라 빠른 발놀림과 정확성이 요구된다. 브리제와 가브리올은 몸이 접히거나 휘어진다면 아상블레는 몸을 거의 수직으로 세우는데, 세 동작 모두 다리가 공중에서 모아지는 타이밍이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 중에서 아상블레는 공중에서 다리를 모으는 가장 기본적인 점프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작들은 공중에 가볍게 뛰어올라야 하는 게 특징이라 움직일 때,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자아내야 하기 때문에 큰 동작 못지않게 근력과 풀업이 몸에 장착되어 있어야 한다. 큰 스텝이나 회전과는 다른, 발레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동작들이다. 포인트슈즈(토슈즈)의 탄생과 포인트슈즈가 만들어내는 환상도 잦은 발놀림에서 시작됐다. 1832년, 필리포 탈리오니(Filippo Taglioni, 1777~1871)가 안무한 <라실피드(La Sylphide, 1832)> 원작은 여성 무용수가 처음 포인트슈즈를 신고 등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라실피드>에서는 요정의 어른거리는 환영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특히 부르농빌이 재안무한 <라실피드>는 남성 무용수의 매력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한다.
선이 굵고, 힘차고, 강하고, 에너지가 폭발하는 미를 추구하지 않고, 요정과 사랑에 빠진 인간의 꿈과 요정을 따라잡기 위해 숲을 헤매는 낭만적 자태가 허공에 사뿐 뛰어오르는 몸짓, 작고 빠른 발놀림 사이에서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낭만 발레'라고 이름 붙인 것도 당연지사다. <라실피드>에서 요정을 쫓아가는 인간의 헛된 꿈도 낭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다리를 모아 중력이 없는 듯이 공중에서 날아오르는 그 몸짓처럼, 한 해의 기억을 아상블레 하는 가을이다. 낙엽은 지난날의 흔적. 찬란한 여름이 남기고 간 편지. 낭만적 쓸쓸함이 흘러도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가을이니까, 낙엽과 함께 추억을 아상블레. 겨울부터 달려왔던 나의 행적들을 추수된 알곡처럼 아상블레. 공중에서 다리가 모아지고, 우리의 시간이 모아질 때 거기에는 무언가가 시작된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발레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태동해서 러시아에서 고전발레의 기틀을 잡는 동안 북유럽에서도 발레에 대한 애정은 깊어갔고, 그 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된 데에는 한 무용수 부자(父子)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였던 아버지 앙투안 부르농빌(Antoine Bournonville, 1760~1843)과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이 그들이다. 특히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은 발레에서 북유럽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신화의 시작은 역시 사랑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구스타프 3세(Gustav III, 1771~1792)에 의해 시작된 스웨덴왕립발레단(Royal Swedish Ballet)이 있다. 구스타프 3세의 초청으로 스웨덴왕립발레단의 감독으로 활동했던 앙투안 부르농빌은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하자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던 그 길에 잠시 들른 덴마크에서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던 그 무용수와는 결국 헤어졌지만, 그는 남은 생애를 덴마크에서 보냈고, 덴마크왕립발레단(Royal Danish Ballet)에서 융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는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태어난다. 무용수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부르농빌은 유전자의 위력을 증명하듯 춤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고,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 북유럽의 발레를 정립시켰다. 스웨덴왕립발레단에서 게스트 발레마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18세기부터 역사를 이어온 스웨덴왕립발레단과 덴마크왕립발레단을 거점으로 부르농빌 부자는 북유럽 발레를 성장시켜 나간 것이다.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정립한 북유럽의 발레는 그만의 색깔이 있다. 이탈리아의 발레가 화려하고, 프랑스의 발레가 황실의 기품을 담고 있고, 러시아의 발레가 인간의 몸을 과학적이고 확장적으로 사용하고, 미국의 발레가 역동적이라면, 북유럽의 발레는 무대 위에서 무중력의 움직임을 실현함으로써 몽환, 낭만, 환영을 자아냈다. 작품 안에서 그 점이 두드러지게 된 건 부르농빌이 무용수 시절 누구보다 뛰어나게 잘 구사했던 ‘깃털 같은 발놀림’ 덕분이다. 이 점은 부르농빌의 안무작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역동적인 점프보다는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점프를 선보였고, 테크닉 면에서는 아상블레(assemblé), 브리제(brisé), 가브리올(cabriole)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농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실피드(La Sylphide, 1836)>에서도 이 부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상블레는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이자 발레 용어로, 한 다리로 바닥을 쓸어서 나갔다가 공중에서 두 다리가 만나서 모아진 후에 착지하는 동작이다. 브리제는 두 다리를 모은 상태에서 상체를 살짝 기울여서 공중으로 몸을 띄우되, 뒷다리가 공중에서 앞다리를 만나 교차한 후에 내려오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뒤로하기도 하는데 제자리가 아니라 이동하면서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가브리올은 앞이나 뒤로 차올린 다리를 나머지 다리가 따라붙듯이 부딪히고 내려오는 동작이다. 이 세 동작은 작은 스텝이라 빠른 발놀림과 정확성이 요구된다. 브리제와 가브리올은 몸이 접히거나 휘어진다면 아상블레는 몸을 거의 수직으로 세우는데, 세 동작 모두 다리가 공중에서 모아지는 타이밍이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 중에서 아상블레는 공중에서 다리를 모으는 가장 기본적인 점프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작들은 공중에 가볍게 뛰어올라야 하는 게 특징이라 움직일 때,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자아내야 하기 때문에 큰 동작 못지않게 근력과 풀업이 몸에 장착되어 있어야 한다. 큰 스텝이나 회전과는 다른, 발레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동작들이다. 포인트슈즈(토슈즈)의 탄생과 포인트슈즈가 만들어내는 환상도 잦은 발놀림에서 시작됐다. 1832년, 필리포 탈리오니(Filippo Taglioni, 1777~1871)가 안무한 <라실피드(La Sylphide, 1832)> 원작은 여성 무용수가 처음 포인트슈즈를 신고 등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라실피드>에서는 요정의 어른거리는 환영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특히 부르농빌이 재안무한 <라실피드>는 남성 무용수의 매력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한다.
선이 굵고, 힘차고, 강하고, 에너지가 폭발하는 미를 추구하지 않고, 요정과 사랑에 빠진 인간의 꿈과 요정을 따라잡기 위해 숲을 헤매는 낭만적 자태가 허공에 사뿐 뛰어오르는 몸짓, 작고 빠른 발놀림 사이에서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낭만 발레'라고 이름 붙인 것도 당연지사다. <라실피드>에서 요정을 쫓아가는 인간의 헛된 꿈도 낭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다리를 모아 중력이 없는 듯이 공중에서 날아오르는 그 몸짓처럼, 한 해의 기억을 아상블레 하는 가을이다. 낙엽은 지난날의 흔적. 찬란한 여름이 남기고 간 편지. 낭만적 쓸쓸함이 흘러도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가을이니까, 낙엽과 함께 추억을 아상블레. 겨울부터 달려왔던 나의 행적들을 추수된 알곡처럼 아상블레. 공중에서 다리가 모아지고, 우리의 시간이 모아질 때 거기에는 무언가가 시작된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