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레드카펫 밟은 첫 한국인은 '뽕' '돌아이' 이두용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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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효정의 세기의 영화감독
이두용 [1부]
세기의 거장, 세계의 거장
'이두용' 감독
이두용 [1부]
세기의 거장, 세계의 거장
'이두용' 감독
[관련 기고] ▶▶▶ 에로의 껍데기로 시대의 속살을 조롱한 '영원한 협객' 이두용
대부분의 사람은 칸 영화제와 한국 영화의 역사를 <기생충>(봉준호) 이나 <올드보이>(박찬욱), 혹은 전도연 배우(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정도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실상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은 최초의 한국 영화인은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그의 1983년 작,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하 ‘물레야 물레야’)로 제37회 칸 국제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다. 가부장제의 재물이 되어 핍박받는 조선 여인의 수난기를 그린 <물레야 물레야>는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암흑기에서 탄생한 기적적인 ‘걸작’이었다. 이 외에도 이두용 감독은 <뽕>(1986), <피막>(1981), <내시>(1986)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사극 영화들을 연출하고 관객의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의 작품 스펙트럼은 이 보다 훨씬 광활했다. <물레야, 물레야>가 이두용 감독에게 세계적인 활로를 찾아주었다면 그 이전 작품인<최후의 증인> (1980)은 대중적인 액션 영화나 멜로 영화의 연출자 정도로 인식되었던 그를 주목할 만한 저력을 보유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재위치 시킨 작품이다. <최후의 증인>은 김성중의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영화는 이제 막 일어난 2명의 살인 사건을 맡게 된 오병호 형사(하명중)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건의 배경은 70년대 언저리이지만 꼬리의 꼬리를 무는 사건의 실마리는 1950년 6.25 전쟁의 후반을 향한다. 주요 등장인물만도 20명을 넘는 이 작품은 플롯 자체도 복잡하지만, 당시 무자비한 영화 검열로 인해 (154분 러닝타임 중) 40여분이 삭제되어 더욱더 난해한 작품이 되었다.
결국 영화는 감독 의사와 무관하게 졸속 편집하여 개봉했고, 30년이 지난 2016년이 되어서야 복원되어 본래의 형태로 대중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신창이의 최초 상영본도 작품의 엄청난 잠재력과 우월함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영화는 6·25와 폭정의 계보가 낳은 상흔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증식하고 세대를 잠식하는지 신랄하면서도 극적인 재현 모드로 그려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극단적인 걸작을 만든 이두용 감독의 이전 커리어는 대부분 무술/활극/액션 영화나 신파 멜로 장르와 같은 지극히 대중 친화적인 하위 장르의 영화들에 집중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두용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번> (1967)으로 한국형 신파 멜로의 초석을 세운 정소영 감독의 조연출로 본격적인 연출 커리어를 시작했다. 아마도 그의 데뷔작, <잃어버린 면사포> (1970)는 그의 사수였던 정소영 감독의 멜로 드라마적인 성향이 반영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이두용 감독은 <죄 많은 여인>, <어느 부부> 등 일련의 멜로 영화들에 매진하다가 사극 활극인 <홍의장군>으로 첫 액션물에 도전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병을 격파하는 곽재우의 이야기를 다룬 <홍의장군>으로 감독 이두용은 고작 데뷔 3년 만에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홍의장군>으로 메이저 영화감독으로 부상한 이두용이지만 그를 액션의 주역으로 인식하게 한 작품은 그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용호대련> (1974)이다. 194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용호대련>은 태권도의 고수인 ‘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액션 활극으로 이가 대적하는 일본 가라데 무예인 사사키와 중국 합기도의 고수인 왕을 통해 아시아의 다양한 무예를 보여준다. <용호대련>의 성공 이후 그는 <분노의 왼발> (1974), <돌아온 외다리> I, II 등 70년대를 제패했던 액션 활극 영화들을 줄줄이 만들어 내며 장르의 대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그가 <최후의 증인>으로 작가주의적 감독의 반열에 설 수 있었음에도,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에 집중을 할 수 있었음에도 <돌아이> 시리즈 (1985, 1986)로 다시금 귀환한 것은 그의 연출 경력의 초안을 다졌던 액션이 그의 작가적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대부분의 사람은 칸 영화제와 한국 영화의 역사를 <기생충>(봉준호) 이나 <올드보이>(박찬욱), 혹은 전도연 배우(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정도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실상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은 최초의 한국 영화인은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그의 1983년 작,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하 ‘물레야 물레야’)로 제37회 칸 국제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다. 가부장제의 재물이 되어 핍박받는 조선 여인의 수난기를 그린 <물레야 물레야>는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암흑기에서 탄생한 기적적인 ‘걸작’이었다. 이 외에도 이두용 감독은 <뽕>(1986), <피막>(1981), <내시>(1986)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사극 영화들을 연출하고 관객의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의 작품 스펙트럼은 이 보다 훨씬 광활했다. <물레야, 물레야>가 이두용 감독에게 세계적인 활로를 찾아주었다면 그 이전 작품인<최후의 증인> (1980)은 대중적인 액션 영화나 멜로 영화의 연출자 정도로 인식되었던 그를 주목할 만한 저력을 보유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재위치 시킨 작품이다. <최후의 증인>은 김성중의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영화는 이제 막 일어난 2명의 살인 사건을 맡게 된 오병호 형사(하명중)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건의 배경은 70년대 언저리이지만 꼬리의 꼬리를 무는 사건의 실마리는 1950년 6.25 전쟁의 후반을 향한다. 주요 등장인물만도 20명을 넘는 이 작품은 플롯 자체도 복잡하지만, 당시 무자비한 영화 검열로 인해 (154분 러닝타임 중) 40여분이 삭제되어 더욱더 난해한 작품이 되었다.
결국 영화는 감독 의사와 무관하게 졸속 편집하여 개봉했고, 30년이 지난 2016년이 되어서야 복원되어 본래의 형태로 대중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신창이의 최초 상영본도 작품의 엄청난 잠재력과 우월함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영화는 6·25와 폭정의 계보가 낳은 상흔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증식하고 세대를 잠식하는지 신랄하면서도 극적인 재현 모드로 그려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극단적인 걸작을 만든 이두용 감독의 이전 커리어는 대부분 무술/활극/액션 영화나 신파 멜로 장르와 같은 지극히 대중 친화적인 하위 장르의 영화들에 집중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두용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번> (1967)으로 한국형 신파 멜로의 초석을 세운 정소영 감독의 조연출로 본격적인 연출 커리어를 시작했다. 아마도 그의 데뷔작, <잃어버린 면사포> (1970)는 그의 사수였던 정소영 감독의 멜로 드라마적인 성향이 반영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이두용 감독은 <죄 많은 여인>, <어느 부부> 등 일련의 멜로 영화들에 매진하다가 사극 활극인 <홍의장군>으로 첫 액션물에 도전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병을 격파하는 곽재우의 이야기를 다룬 <홍의장군>으로 감독 이두용은 고작 데뷔 3년 만에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홍의장군>으로 메이저 영화감독으로 부상한 이두용이지만 그를 액션의 주역으로 인식하게 한 작품은 그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용호대련> (1974)이다. 194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용호대련>은 태권도의 고수인 ‘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액션 활극으로 이가 대적하는 일본 가라데 무예인 사사키와 중국 합기도의 고수인 왕을 통해 아시아의 다양한 무예를 보여준다. <용호대련>의 성공 이후 그는 <분노의 왼발> (1974), <돌아온 외다리> I, II 등 70년대를 제패했던 액션 활극 영화들을 줄줄이 만들어 내며 장르의 대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그가 <최후의 증인>으로 작가주의적 감독의 반열에 설 수 있었음에도,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에 집중을 할 수 있었음에도 <돌아이> 시리즈 (1985, 1986)로 다시금 귀환한 것은 그의 연출 경력의 초안을 다졌던 액션이 그의 작가적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