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의 압도적 우위’… 전쟁 승패 갈랐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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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해군사학자의 역작
2차대전 당시 벌어진 해전
상세하면서 간결하게 소개
미국 압도적 물량 공세 덕에
노르망디 9일 뒤 사이판 상륙
미래 해전 대비할 교훈 담겨
2차대전 당시 벌어진 해전
상세하면서 간결하게 소개
미국 압도적 물량 공세 덕에
노르망디 9일 뒤 사이판 상륙
미래 해전 대비할 교훈 담겨
바다가 중요해졌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때문이다.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면 전투의 상당 부분은 바다에서, 특히 남중국해에서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바다엔 지켜야 할 것도 많다. 주요 물자가 오가는 수송로를 지켜야 한다. 글로벌 인터넷 트래픽의 97%가 지나는 해저 통신 케이블도 지켜야 할 대상이다.
바다가 중요했던 때는 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다. 전쟁 중반까지 영국과 미국은 힘을 못 썼다. 독일 잠수함 U보트에 해군력이 밀린 탓이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도 연합군이 제해권을 되찾고 나서야 가능했다. <2차대전 해전사>는 이 시기 바다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돌아본다. 저명한 전쟁 역사학자인 크레이그 L. 시먼즈 미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가 쓴 책이다.
1939년 10월 독일 잠수함이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의 스캐퍼플로에서 영국 전함을 격침한 사건부터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한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는 사건까지를 다룬다. 책은 상세하면서도 간결하다.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사건들을 서술하지만, 편집이 잘 된 영화처럼 지엽적인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덕분에 10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 미국은 양면 전쟁을 꺼린다. 유럽에서 러시아 혹은 중동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아시아에서 중국과 상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대비했다. 하지만 작전 지역에 대한 군수 지원이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하와이에서 8000여 ㎞ 떨어진 필리핀해까지 전함 함대를 보내기에는 보급선이 불안정했다. 하지만 1941년 11월 26일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면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됐다. 연합군에게 1942년 상반기는 참담한 시기였다. 일본군은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5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공격받지 않고 계속 전세를 확장했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을 무력화했고, 몰타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한계점까지 압박했다. 대서양, 특히 미국 동부 해안과 카리브해에서 연합군 선박의 손실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졌다.
암울하지만 희망도 생겨났다. 미국의 엄청난 산업 생산력 덕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영국의 강한 정신력과 투지, 러시아의 풍부한 인력, 미국의 산업 생산력이 결합해 언젠가 추축국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겨났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1942년 11월 연설에서 인내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도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284척의 군함, 311척의 전차상류함(LST) 등 수천 척의 배가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6월 15일 태평양의 사이판에서도 미 해병대 2개 사단을 동원한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저자는 “불과 9일 간격으로 연합군이 세계 반대편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에서, 체계적으로 준비된 수준 높은 자원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전 지구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지상 전투도 중요했지만, 결국 바다에서의 압도적 우위가 전쟁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 그 바탕엔 미국의 산업 생산력이 있다. 미국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희생해 가며 장기간 추축국을 봉쇄한 덕분에 미국이 자유롭게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1년을 홀로 버텼던 영국의 투지가 없었다면 반격의 기회를 얻지 못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현재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하면 미래를 쉽게 낙관할 수 없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바다가 중요했던 때는 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다. 전쟁 중반까지 영국과 미국은 힘을 못 썼다. 독일 잠수함 U보트에 해군력이 밀린 탓이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도 연합군이 제해권을 되찾고 나서야 가능했다. <2차대전 해전사>는 이 시기 바다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돌아본다. 저명한 전쟁 역사학자인 크레이그 L. 시먼즈 미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가 쓴 책이다.
1939년 10월 독일 잠수함이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의 스캐퍼플로에서 영국 전함을 격침한 사건부터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한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는 사건까지를 다룬다. 책은 상세하면서도 간결하다.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사건들을 서술하지만, 편집이 잘 된 영화처럼 지엽적인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덕분에 10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 미국은 양면 전쟁을 꺼린다. 유럽에서 러시아 혹은 중동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아시아에서 중국과 상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대비했다. 하지만 작전 지역에 대한 군수 지원이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하와이에서 8000여 ㎞ 떨어진 필리핀해까지 전함 함대를 보내기에는 보급선이 불안정했다. 하지만 1941년 11월 26일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면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됐다. 연합군에게 1942년 상반기는 참담한 시기였다. 일본군은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5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공격받지 않고 계속 전세를 확장했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을 무력화했고, 몰타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한계점까지 압박했다. 대서양, 특히 미국 동부 해안과 카리브해에서 연합군 선박의 손실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졌다.
암울하지만 희망도 생겨났다. 미국의 엄청난 산업 생산력 덕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영국의 강한 정신력과 투지, 러시아의 풍부한 인력, 미국의 산업 생산력이 결합해 언젠가 추축국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겨났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1942년 11월 연설에서 인내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 아닙니다. 하지만 아마도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284척의 군함, 311척의 전차상류함(LST) 등 수천 척의 배가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6월 15일 태평양의 사이판에서도 미 해병대 2개 사단을 동원한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저자는 “불과 9일 간격으로 연합군이 세계 반대편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에서, 체계적으로 준비된 수준 높은 자원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전 지구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지상 전투도 중요했지만, 결국 바다에서의 압도적 우위가 전쟁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 그 바탕엔 미국의 산업 생산력이 있다. 미국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희생해 가며 장기간 추축국을 봉쇄한 덕분에 미국이 자유롭게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1년을 홀로 버텼던 영국의 투지가 없었다면 반격의 기회를 얻지 못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현재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하면 미래를 쉽게 낙관할 수 없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