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붉은 여왕의 세계
언젠가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갔을 때다. 학생 한 명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 “아무개는 오늘 안 왔니?” 며칠째 학교에 안 온다는 대답 이후 아이들 간 대화가 오갔다. “시험을 왜 봤나 몰라” “수학 50점이래” “학원도 안 다녀” 등등. 자신들은 그 친구와는 다르다며 선을 긋는 얘기들이었다. 듣다가 “학원 안 다니는 게 어때서?”라고 짧은 질문을 던졌다.

근무 중인 학교 학생 상당수가 방과 후 학원으로 직행했다가 밤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간다. 이 문화에 적응하면 ‘우리’,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이 되는 걸까. 그 세상이 전부가 돼 구분 짓기가 생겨나는 건 아닐까. 요즘 청소년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 어떤 일이 내게 맞을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사교육 중심지로 꼽히는 서울 목동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눈앞에 있는 시험, 이를 위한 학원 숙제, 매일 수학 시험과 영어 단어 200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초등 의대반이 이젠 더 내려와 유아 의대반까지 생겼다. 간혹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줄었으니 예전에 비해 대학 가기가 수월해지지 않았느냐고 묻는 분도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입시 경쟁은 날이 갈수록 격해진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붉은 여왕이 앨리스의 손을 잡고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스는 숨이 헉헉 차오를 정도로 뛰는데 제자리다. 보통 뛰고 있으면 보이는 배경은 내게서 멀어지게 마련 아닌가. 의아해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이 말한다.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달려야 하고.” 주변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대로 있으면 뒤처지고 힘껏 달려야 제자리라는 것. 더 앞서나가려면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다. 한국 입시의 현실이 붉은 여왕의 세상과 닮아있다.

중학생에게 고교 미적분을 몇 바퀴 돌렸냐고 질문한다. 영어 유치원에서는 미국 아이들보다 영어를 더 잘 읽고 쓰게 한다고 홍보한다. 여섯 살에 오면 늦고, 최소한 다섯 살에는 시작해야 한단다. 현행 상대평가 시스템에서 2등급(상위 11%) 내로 나와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단다.

점점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하려다 보니 유아, 어린이들까지 입시를 위한 문제를 풀게 된 현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보다 문제에서 요구하는 정답을 빨리 찾아야 인정받는다. 오히려 스스로 문제를 찾고, 탐구하며 알아가는 게 진짜 공부인데 이는 쓸데없는 일로 치부되기 일쑤다. 내 제자들에게는 호기심이 생길 틈, 질문할 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