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하루빨리 설산의 백담사에 가야겠다
내 친구 중에는 회사에서 격월마다 실시하는 주말 등산이 싫어서 퇴사한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두 가지 반응이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뭐 그런 것 때문에 퇴사를 하냐’는 핀잔이고, 다른 하나는 ‘뭐 그런 회사가 다 있냐’는 비판이다. 사실 나 역시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축구팀을 열심히 응원했지만, 대강당에 모여 빨간 티셔츠를 입고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응원에 참여해야만 했던 단체활동은 내키지 않았다.

그 뒤로도 10여 년은 족히 넘게, 이 회사든 저 회사든 매해 “등산을 가자”는 말은 빠지지 않았다. 2015년 무렵까지 등산하면 첫 번째 떠오르는 단어가 ‘단합’, 두 번째가 ‘건강’, 세 번째가 ‘막걸리’(또는 오이)였다. 복잡한 심경을 끌어내는 등산을, 둘레길 산책이나마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고, 요즘 건강을 신경 쓰는 20대는 ‘자발적으로’ 등산을 간다고 한다. 서로 다른 뜻으로 세월이 무색하다. 젊은 친구들도 단합 등반을 알기나 할까? 약수를 떠먹는 바가지는?

어느새 산은 나의 일상에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다. 어린이대공원의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퇴근할 때면, 내 머릿속에도 수많은 산이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책장에서 읽지 않은 책만큼이나 이 공간의 여기저기 존재하는 산, 산, 산. 마터호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진을 떼어 벽에 걸어 두었을 때 사무실의 칙칙한 회색 칸막이가 금세 숨 쉴 만한 창문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작아진 달력이라도 산 그림은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한글에서 ‘산’이라는 글자마저 상형문자처럼 보일 정도로 산은 우리 일상에 깊이 박혀 있는 존재다.

산이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어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로버트 맥팔레인은 10대 때부터 등산을 시작해 암벽 등반에 푹 빠진 것에 그치지 않고 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써서 저술상도 받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받은 맨부커상의 심사위원에도 선정되었다. 산 하나에 참 끈질기게 집중해 온 사람이다. 그가 <산에 오르는 마음>에 쓴 ‘등산’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3세기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건 등산은 ‘정신 이상’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야생의 풍경이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관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초반의 전통적인 상상력에 따르면, 자연경관이 인류에게 얼마만큼 진가를 인정받느냐는 주로 농업 생산력에 달려 있었다. … 당시에 산은 지구의 얼굴에 생긴 ‘부스럼’이나 ‘사마귀’ ‘피지 낭종’ ‘옴’으로 매도당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자연의 물질 형태와 인류의 상상력이 협력해 구성한 ‘마음의 산’이다.”(<산에 오르는 마음> ‘1장 홀림’ 중에서)

아직도 가파른 암벽을 힘겹게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그 열정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느덧 나 자신도 산을 자주 찾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산은 지난 300년 동안 낭만주의 시기를 거쳐 인류가 동경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예전에는 소출이 나오는 농경지와는 전혀 다른 척박하고 두려운 험지로 여겼다면, 이제 첩첩산중의 풍경은 경이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생산하지 않는 ‘여가’를 갖게 되면서 늘 존재하던 산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생산만이 전부가 아닌 걸 깨닫는 날이 혹시 온다면, 우리는 빙벽이 녹아내리는 산을 향해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하루빨리 설산의 백담사에 가겠다는 다짐을 이루어야겠다. 오늘까지는 회사 앞 아차산이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낮은지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