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노후 자금 5조원을 운용하는 경찰공제회에서 이사장과 최고투자책임자(CIO) 등 핵심 경영진이 장기간 공석인 유례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경찰공무원 중 대다수인 하위직 출신 일반 경찰을 대변하는 대의원들이 고위직 퇴직 경찰의 임용을 ‘낙하산’이라며 반대하고 있어서다.

○“경찰청장 낙하산 인사 안 돼”

5조원 굴리는데…경찰공제회 CIO 1년째 빈자리
1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공제회 이사장 자리는 배용주 전 이사장이 지난해 7월 사임한 이후 16개월째 공석이다. 공제회 이사장은 경찰청이 추천해 대의원회 투표로 선임된다. 이사장 선임이 늦어지면서 감사, 관리이사, 금융이사(최고투자책임자의 경찰공제회 내부 명칭), 사업이사 등 주요 보직이 수개월에서 1년째 비어 있다.

앞서 경찰청은 공제회 이사장으로 홍기현 전 경기남부경찰청장(치안정감)을 단수 추천했다. 그러나 지난달 24일 치러진 대의원회 투표에서 찬성표가 3분의 2(출석자 44명 중 29명)를 넘지 못해 부결됐다. 경찰공제회는 경찰 퇴직금을 굴리는 법정단체다. 작년 말 기준 회원 13만3849명(가입률 85%)에 총자산 5조8893억원 규모다.

공제회 경영진 공백이 길어진 이유는 순경 출신이 대다수인 공제회 대의원 중 일부가 ‘경찰청의 퇴직 고위직 임명’에 반대하고 있어서다. 그동안 경찰청은 이사장 자리에 경찰청장(치안총감) 다음 계급인 치안정감 퇴직자를, 본부장엔 치안감 퇴직자를, 감사는 경무관 퇴직자를 추천해 왔다. 대의원 A씨는 “지금까지 고위직 경찰 출신이 운영하는 장례, 웨딩 사업 등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똑같이 반복될 것 같다고 생각해 반대했다”고 말했다.

이번 부결은 일선 현장에 강하게 업무 드라이브를 거는 조지호 경찰청장에 대한 반발 여론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대의원회 선임에서 반대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부결까지 이른 건 이례적”이라며 “조 청장 탄핵 청원이 올라올 만큼 커진 경찰 수뇌부에 대한 반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했다.

○CIO 덩달아 1년째 공석

이사장 부재보다 더 큰 문제는 퇴직급여 5조원을 굴리는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CIO가 1년째 비어 있는 점이다. 공제회는 금융투자업계 출신인 한종석 CIO가 작년 10월 물러난 뒤 지금까지 보직자를 선임하지 못했다. 인사위원회를 소집할 이사장이 공석이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자본시장 유동성공급자(LP)인 보험사와 공제회 등에 CIO가 공석인 건 머리가 없는 격”이라며 “경찰공제회에도 부장, 팀장급에 업계 출신 부동산·기업투자 전문가가 포진해 있지만 아무래도 중요 투자 의사 결정이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의원들이 ‘낙하산 거부’보다 공제회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경찰공제회는 은행 이자보다 높은 복리이자(연 4%대 급여율)를 제공하고, 원금을 제외한 이자에 저율 과세를 적용해 일반 회사원이 가입하는 개인형퇴직연금(IRP)보다 훨씬 낫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 경찰공제회 규정대로라면 비교적 저위험·저수익 투자만 할 수 있다. 경찰공제회 전직 임원 B씨는 “일종의 인기 투표로 임원을 뽑는 구조”라며 “금융 지식이 없는 대의원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전문가들이 위축돼 있다”고 말했다.

전직 대의원 D씨는 “공제회 내 금융투자 임직원은 처우가 좋지 않아 경력을 쌓은 뒤 증권사 등으로 이직하는 추세”라며 “노후 자금을 잘 굴리려면 대의원회가 나서 전문가를 유치하고, 마음껏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조철오/김대훈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