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막을 내린 국립발레단 정기공연 <라 바야데르>. 한국 무대에서 박세은(35·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무용수)과 김기민(32·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이 남녀 주역 페어로 서는 당일(1일, 3일)까지 예매경쟁이 치열했다. 공연날에 풀리는 '시야제한석'이라도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창구 부근을 서성댔다. 15년만에 국립발레단에서 다시 합을 맞추게 된 박세은과 김기민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느냐는 기대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손자일, 국립발레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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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은 닷새간 <라 바야데르>를 통해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의도를 훌륭하게 구현했다. 그리가로비치는 주역 무용수들이 무대를 최대한 넓게 쓰도록 독려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 2000년부터 자신의 레퍼토리를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도록 지도했다. 국립발레단은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 인형>,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해 2010년 <라이몬다>를 올려 김지영, 김주원, 김현웅, 이동훈 등 발레스타들이 탄생했었다.

그리가로비치의 무대 특징은 음악이 흐르는 모든 시간이 안무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번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역시 그냥 흘러가는 장면이 없게끔 안무를 넣었다. 막과 막 사이에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며 지나간다.
ⓒ손자일, 국립발레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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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박세은과 김기민이 남녀 주역으로 선 무대에서는 어떠한 빈틈도 느낄 수 없었다. 주역들의 역량에 따라 무대가 빈약할수도, 반대로 풍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증명해냈다.

박세은은 지난 여름에도 파리오페라발레단 동료들과 내한해 발레단의 레퍼토리 갈라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역시 전막에서 드러났다. 니키아는 수석무용수에 오른다해서 다 주어지는 배역이 아니다. 박세은은 니키아에 대해 "발레라는 기본기 위에 자신만의 연기와 주관, 특성을 자연스럽게 노출해야하는 어려운 캐릭터"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세은은 이번 무대에서 솔로르가 사랑을 배신한 현실과 아직도 그를 사랑하며 함께하고픈 이상 사이의 괴리감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점프나 고난도의 기술도 뛰어났지만, 자신을 배신한 솔로르를 보고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씬에서 복잡한 니키아의 심경이 느껴졌다. 느린 음악에도 자연스럽고 기품있게 춤을 추는 프랑스 발레가 묻어났다.

그랑쥬떼로 등장한 김기민은 솔로르 그 자체였다. 세계 무대에서 수십번 솔로르가 됐었던 내공을 살려 엄청난 에너지로 무대를 휘어 잡았다. 점프 체공, 턴의 속도, 흐트러짐 없는 균형 감각을 지키면서 훌륭한 연기력까지 보여줬다. 자신감 있고 위풍당당한 1막의 솔로르에서 전사의 위용이 느껴졌고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2막과 3막의 솔로르에서는 우매함이 전해졌다. 야망을 위해 공주를 선택하는 고전 발레 속 평면적인 남자 주역을 이처럼 설득력 있게 밀어붙인 무용수도 이번 공연 중 김기민이 유일했다. 피겨스케이팅으로 치자면 예술성과 기술점에서 가산점을 골고루 받아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았을까.
ⓒ손자일, 국립발레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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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다소 아쉬웠다. 음량이 작을 때에는 희미한 나머지 무용수들의 토슈즈가 바닥에 달라붙는 듯한 쩍쩍 소리가 들려왔다. 2막의 감자티와 솔로르의 약혼식에서는 두 사람이 무용을 마쳤는데 음악이 약간 늦게 끝나기도 했다. 꽃바구니를 든 니키아가 춤을 출 때는 연주가 명랑하게 울려퍼졌는데 비참함 속에서 춤을 추는 니키아가 아니라 마치 <돈키호테>의 키트리가 탬버린을 들고 등장하는 느낌이었다(라 바야데르와 돈키호테의 작곡가는 루트비히 밍쿠스로 같기는 하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