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과 '카유보트'…오르세 미술관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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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
오르세 미술관 전시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
오르세 미술관 전시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
아래 사진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소년을 촬영한 것이다. 작품 앞에서 그것을 따라 그려보는 청소년 관객들의 모습은 미술관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에게는 일반 관객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소년의 정체는 ‘드로잉, 3번’이라는 이름의 조각 작품이다. 실제 사람처럼 보이는 이 조각을 제작한 작가는 덴마크 출신인 마이클 엘름그린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이 결성한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이다.
이들은 올해 9월 초부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 공간들(Spaces)’이라는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현대인들과 그들의 생활공간을 실제와도 같은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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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처럼 느껴지는 조각과 건축이 혼합된 설치가 바로 엘름그린 & 드라그셋 작품의 특징이다. 관객들은 작품 속 공간에 들어가 그곳을 체험할 수 있고, 조각 작품이긴 하지만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작품 속 공간에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은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들어가 몰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마이클 엘름그린 & 잉가 드라그셋 듀오 작가 이번에는 19세기 조각들이 즐비한 오르세 미술관의 중앙홀을 무대로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이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라디시옹'은 불어로 ‘추가’나 ‘덧붙이기’를 뜻한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과거의 조각 작품들에 자신들의 조각을 추가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컨셉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남성 조각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의 조각들이 강인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경우보다 소년과 젊은 남성을 시적이고 부드럽게 묘사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이번 전시에서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주로 소년 조각상들을 선보였다.
VR 고글을 착용한 소년, 드론을 들고 있는 소년, 세탁기 위에 앉아있는 소년과 같은 현대 사회의 평범한 소년들을 조각으로 제작해 중앙홀의 천정에 거꾸로 설치했다. 수영장 점프대 위에 서서 다이빙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조각상도 있다. 이 작품의 맞은편에는 오르세 미술관 곳곳을 촬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년도 보인다. 이 조각들은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세기 조각과 유사한 색채와 모양으로 제작되어 언뜻 보기에는 과거의 조각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물들의 옷과 머리 모양,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로 인해 관객들은 곧 이 조각들이 과거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대 조각임을 알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회화나 조각 작품을 소장한 근대미술관이다. 주로 이 시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미술 전시도 개최하고 있다. 2014년에는 미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전시가 열렸고, 2017년에는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도 개최된 바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현대미술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나 기존 전시와의 연계성이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이다. 지금 이 미술관에서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시와 함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전시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가 열리고 있다.
카유보트는 파리의 근대화된 도시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그린 남성 인물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유보트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형편이 어려운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이자 컬렉터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카유보트는 40대 말의 이른 나이에 폐 질환으로 사망했는데, 작고하기 전 자신이 수집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카유보트는 동료 작가들의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을 걱정해 작품의 기증을 결심했지만, 당시는 인상주의 미술이 미술계와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정부 역시 이런 평가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협상 끝에 2년 후인 1896년에야 총 68점의 컬렉션 중 38점이 기증되었다. 카유보트의 유족이 나머지 작품에 대한 기증을 1904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정부에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1928년에야 비로소 모든 작품의 기증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기증된 그의 작품들 덕에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컬렉션이 시작될 수 있었다.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는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나타난 남성성의 일면을 조명하는 전시이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19세기 남성 조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카유보트는 오르세 미술관 인상주의 컬렉션의 기초를 마련해준 화가이자 기증자였다는 점에서 이 미술관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미술관 소장품을 재해석한 현대미술 전시를 선보인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이 미술관이 지향하는 현대적인 비전을 대변하는 작가들이다. 카유보트와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시를 비교해 살펴보면서 오르세 미술관의 과거와 현재, 지나간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들은 올해 9월 초부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 공간들(Spaces)’이라는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현대인들과 그들의 생활공간을 실제와도 같은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 제시한다.
▶▶▶ [관련 리뷰] 용산 지하의 텅빈 수영장과 석연찮은 42평짜리 집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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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처럼 느껴지는 조각과 건축이 혼합된 설치가 바로 엘름그린 & 드라그셋 작품의 특징이다. 관객들은 작품 속 공간에 들어가 그곳을 체험할 수 있고, 조각 작품이긴 하지만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작품 속 공간에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은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들어가 몰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마이클 엘름그린 & 잉가 드라그셋 듀오 작가 이번에는 19세기 조각들이 즐비한 오르세 미술관의 중앙홀을 무대로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이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라디시옹'은 불어로 ‘추가’나 ‘덧붙이기’를 뜻한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과거의 조각 작품들에 자신들의 조각을 추가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컨셉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남성 조각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의 조각들이 강인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경우보다 소년과 젊은 남성을 시적이고 부드럽게 묘사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이번 전시에서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주로 소년 조각상들을 선보였다.
VR 고글을 착용한 소년, 드론을 들고 있는 소년, 세탁기 위에 앉아있는 소년과 같은 현대 사회의 평범한 소년들을 조각으로 제작해 중앙홀의 천정에 거꾸로 설치했다. 수영장 점프대 위에 서서 다이빙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조각상도 있다. 이 작품의 맞은편에는 오르세 미술관 곳곳을 촬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년도 보인다. 이 조각들은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세기 조각과 유사한 색채와 모양으로 제작되어 언뜻 보기에는 과거의 조각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물들의 옷과 머리 모양,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로 인해 관객들은 곧 이 조각들이 과거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대 조각임을 알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회화나 조각 작품을 소장한 근대미술관이다. 주로 이 시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미술 전시도 개최하고 있다. 2014년에는 미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전시가 열렸고, 2017년에는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도 개최된 바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현대미술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나 기존 전시와의 연계성이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이다. 지금 이 미술관에서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시와 함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전시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가 열리고 있다.
카유보트는 파리의 근대화된 도시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그린 남성 인물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유보트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형편이 어려운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이자 컬렉터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카유보트는 40대 말의 이른 나이에 폐 질환으로 사망했는데, 작고하기 전 자신이 수집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카유보트는 동료 작가들의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을 걱정해 작품의 기증을 결심했지만, 당시는 인상주의 미술이 미술계와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정부 역시 이런 평가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협상 끝에 2년 후인 1896년에야 총 68점의 컬렉션 중 38점이 기증되었다. 카유보트의 유족이 나머지 작품에 대한 기증을 1904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정부에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1928년에야 비로소 모든 작품의 기증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기증된 그의 작품들 덕에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컬렉션이 시작될 수 있었다. ‘카유보트: 남성을 그리다’는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나타난 남성성의 일면을 조명하는 전시이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 라디시옹’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19세기 남성 조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카유보트는 오르세 미술관 인상주의 컬렉션의 기초를 마련해준 화가이자 기증자였다는 점에서 이 미술관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미술관 소장품을 재해석한 현대미술 전시를 선보인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이 미술관이 지향하는 현대적인 비전을 대변하는 작가들이다. 카유보트와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시를 비교해 살펴보면서 오르세 미술관의 과거와 현재, 지나간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