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화이트칼라 '주 52시간 면제'
지난해 6월 미국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짓던 대만의 TSMC는 미국 직장 평가 웹사이트 ‘글래스도어’에서 별점 폭탄을 맞았다. 업무 강도가 워낙 세다 보니 TSMC를 다른 구직자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비율이 27%로 떨어졌다. TSMC 일부 직원은 “한 달 동안 계속 사무실에서 잤다”며 경쟁사인 인텔처럼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같은 시기 글래스도어에서 인텔 직원들의 업무 추천 비율은 TSMC의 세 배가 넘는 85%였다.

TSMC는 직원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이런저런 복지 혜택을 늘렸지만 반도체산업 특유의 고강도 업무라는 근간은 흔들지 않았다. 당시 TSMC 회장인 마크 리우는 미국 소식을 듣고 “반도체에 대한 열정이 없고 장시간 교대 근무를 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어선 안 된다”고 일침을 날렸다. 그러면서 애리조나 공장 가동 시기를 1~2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자체 기준에 미달하는 직원은 절대 뽑지 않았다. 열정 가득한 고급 인재를 더 뽑아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미국에선 주급 684달러(약 94만원) 이상의 고위 관리직 및 전문직, 연봉 10만7432달러가 넘는 고소득 근로자 등은 주당 40시간으로 묶여 있는 법정근로(초과근무는 무제한) 규제를 받지 않는다. 노사가 합의하면 초과근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만이나 고소득 전문직을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한 일본도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TSMC식 전략이 통할 수 없다.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무로 인해 연구개발(R&D) 같은 전문직도 초과근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이번주 발의하는 반도체 특별법에도 고소득 전문직에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이른바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 조항은 빠져 있다고 한다. 특별법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 근로시간 유연화에 반대해온 야당의 눈치를 본 결과다. 여의도 정가엔 욕먹으면서도 옳은 길을 가려는 TSMC식 용기는 볼 수 없고 눈앞의 인기만 좇다 쇠락 중인 인텔의 모습만 비쳐 안타까울 뿐이다. 정인설 논설위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