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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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두 번 집을 지었다. 우리가 살던 집을 작은 아버지에게 넘기고 새로 집을 지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내가 봐도 집 짓는 일이 순탄치 않았다. 지대가 낮은 무논에 잡석을 깔고 객토(客土)를 진흙에 섞어 며칠째 지반 다지는 일을 봤기 때문이다. 터다지기가 시작된 날 아버지와 나는 지붕에 씌울 기왓장을 사러 충주에 기차를 타고 갔다. 아버지 회사 트럭은 기와 상차(上車)를 위해 하루 전날 떠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버지는 충주까지 기와를 사러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와공장 김 사장은 아버지보다 두 살 위였지만, 소학교에 같이 다닌 동창생이다. 8.15해방으로 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뒤로 서로 연락 없었으나, 6·25전쟁 중 전상을 입어 같은 군 재활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를, 김 사장은 오른팔을 잃었다. 전역 후 아버지가 상이군경회 진천군지부장 시절 그는 기와공장을 인수해 더욱 친하게 지냈다.

공장에 들어서자 김 사장은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동창생이라던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큰아버지와 외삼촌들 외에 그런 호칭을 쓰는 걸 처음 봤다. 사장님은 의수(義手)인 오른손을 내밀다 왼손으로 바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 한잔할 시간이 지나고 기와를 다 실었다고 할 때 김 사장은 보자기에 싼 걸 풀어 보였다.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막새(瓦當)에 아버지와 김 사장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대금을 치렀다. 차에 오를 때 김 사장은 "제천에서 사도 되는데 먼 길 찾아와 고맙네. 차비 좀 넣었네"라며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인사하고 봉투를 받았다. 차가 떠난 뒤 봉투를 확인한 아버지가 "한결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물건값을 한 푼도 깎지 않는 분이지. 파는 사람도 바가지 씌울 생각을 그러니 못 하지. 기왓장처럼 변함이 없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기와를 가득 실은 차는 힘들어했다. 걷는 것만큼이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제천에 도착했다. 저녁은 아버지가 늘 다니는 곰탕집에서 했다. 집 밖에서 곰탕을 사 먹는 건 처음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내게 고기를 한 줌 더 넣어줬다. 아버지는 "허 그 양반, 곰탕 같은 분이셔"라며 "사람은 이 곰탕 같아야 한다"며 김 사장을 입에 올렸다. "인간의 기억 중에 가장 오래가는 기억이 맛 기억이다. 맛있게 먹고 오래 잊지 마라. 그리고 이 곰탕 맛처럼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줬다.

내가 커서 직장에 다닐 때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 사장 조문을 다녀왔다. "내가 다리를 잃어 권총 자살하려 할 때 말린 분이다. 결이 다른 사람이다"라고 죽음을 애석해했다. 그날 저녁 고인과 인연을 일일이 추억해가며 주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결'은 물레를 사용해 목화에서 섬유를 뽑아 꼬임을 주고 잣는 실이 처음 것과 나중 것이 하나같다는 말이다.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가치, 신념, 인격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덕적 가치관인 정직함, 책임감, 배려심, 공정성에서부터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도덕 교과서 만큼이나 가르쳤다.

그날 아버지는 "기왓장처럼, 곰탕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한결같음'을 노자(老子)는 무상심(無常心)으로 표현했다며 고사성어 '인무상심(聖人無常心)'을 인용했다. '성인은 항상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마음, 상심(常心)이 없다'라는 말이다. 도덕경(道德經) 49장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의 상()이 없다[聖人無常心]. 오로지 백 가지 성()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에게는 나도 그를 좋게 해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준다. 그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인은 세상에 임할 때는 자신의 의지를 거둬들이고 세상을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연하게 한다. 백 가지 성()의 사람들이 모두 귀와 눈을 곤두세울 때, 성인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아버지는 "성인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묘사해 '흡흡언(歙歙焉)’'라 했다"면서 "'흡흡'이란 '들이마시는 소리나 모양'을 나타내는 의성어나 의태어"라고 했다. 이어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과 필요를 들이마셔라. 내 필요와 이익을 위해 남을 밀어붙이는 그런 강제하고 억압하는 태도가 아니다"라며 '한결같음'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깨우쳐줬다. "살아가면서 덕지덕지 붙은 네 고집과 아집을 버리면 모두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네가 없어야 네가 산다. 한마디로 '당신 마음이 내 마음이다'라는 말이니 잘 새기라"라고 해석해 쉽게 설명했다. 이제껏 들은 성어 중에 가장 쉽지만 실행하기엔 가장 어렵다. 고도의 포용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긴 하지만 그 또한 어느 것보다 먼저 손주들에게 깨우쳐 줘야 할 소중한 품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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