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the world"…팝의 전설 퀸시 존스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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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과 함께 일군 뮤직 커리어
아직도 깨지지 않는 전설적 기록 만들어내
K팝 가능성 예고, 보아와 인연 재조명
아직도 깨지지 않는 전설적 기록 만들어내
K팝 가능성 예고, 보아와 인연 재조명
지난 3일(현지시간) 91세로 별세한 퀸시 존스.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일생동안 80번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28번 수상했다. 400장 이상의 앨범에 이름을 올렸고, 35편의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 미국 대중문화사의 한 챕터를 그로 정리해도 될 정도다.
퀸시 존스의 가족은 부고를 전하는 성명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엄청난 상실이지만 그가 살았던 위대한 삶을 축하하며 그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부고 소식을 전하며 그가 지내온 위대한 삶을 다시금 조명해본다. 1933년 미국 시카고에서 탄생한 퀸시 존스는 부모의 이혼 뒤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 주로 갔다. 14세 때 시애틀의 한 클럽에서 레이 찰스의 밴드에 들어가 트럼펫을 연주하며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1950년대부터 클리포드 브라운, 듀크 엘링턴 등 유명 재즈 아티스트의 앨범을 작업하며 이름을 날렸고, 프로듀싱 뿐 아니라 뮤지컬·TV프로그램 제작 등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갔다.
영화 산업에서도 그의 업적이 적지 않다. 트루먼 카포테의 '인 콜드 블러드' 영화 음악을 만들면서 존스는 헐리우드 영화 음악을 작곡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기록됐다. 1977년 미국 사회 노예의 뿌리를 추적한 드라마 ‘뿌리’의 음악으로 에미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의 일군 커리어일 것이다. 1979년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발표한 5집 '오프 더 월(Off the wall)'은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간 명반. 마이클 잭슨이 소니로 이적하면서 그의 음반을 소니에서 처음 프로듀싱해 준 사람이 퀸시 존스였다. 이후 1982년, 8000만장이 팔려나간 마이클 잭슨의 8집 앨범 '스릴러(Thriller)'등 세계적인 히트 앨범도 퀸시 존스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 앨범의 판매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않고 있는 1위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로 등극하자 그 역시 팝음악계 '미다스 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퀸시 존스는 1985년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 앨범에 46명의 미국 팝스타를 참여시키면서 또 하나의 족적을 남기게 된다.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밥 딜런 등 당대를 주름잡던 톱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고자 기획된 프로젝트 밴드인의 녹음에 참여했다. 작곡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했고, 앨범의 프로듀싱을 퀸시 존스에게 부탁했다.
'위 아더 월드'는 1980년대 빌보드 핫 100 4주 1위와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레코드 및 올해의 노래를 석권했다. 퀸시 존스는 이 음악을 녹음하면서 팝스타들의 기싸움에 대비해 "자존심은 문밖에 맡겨두고 오시오"라고 써붙일 정도였다고. 어려움 끝에 탄생한 이 노래는 기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도록 한 명곡이며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1993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취임 축하 콘서트 제작까지 퀸시 존스가 맡으면서 문화계를 넘어 미국의 정계와 사회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퀸시 존스는 한국 K팝에 대해서도 일찍이 그 가능성을 알아본 인물이기도 하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3년 한국을 찾아 2010년대 K팝 스타들의 재능을 눈여겨 보며 K팝이 세계를 주름잡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의 부고로 보아와의 인연도 재조명되고 있다. 보아의 2004년 앨범 '퀸시'는 그의 이름을 빌어온 앨범이다. 2011년 방한했던 퀸시 존스는 보아를 만났고, 꾸준히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마이클 잭슨의 앨범에 관여했던 아티스트들에게 보아를 소개하고, 보아가 기획사의 도움없이 별개로 음악성을 인정받도록 다리를 놔주기도 했다. 2013년 퀸시 존스는 자신의 80주년 기념 공연에 보아를 직접 초청해 무대를 꾸미도록 했다. 보아는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Beat It'을 부르며 화제를 모았다. 공연 자체가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소속된 소니에서 기획한 공연이라 무대 위 아티스트들도 소니 소속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소속 가수가 아니었던 건 보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원 기자
퀸시 존스의 가족은 부고를 전하는 성명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엄청난 상실이지만 그가 살았던 위대한 삶을 축하하며 그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부고 소식을 전하며 그가 지내온 위대한 삶을 다시금 조명해본다. 1933년 미국 시카고에서 탄생한 퀸시 존스는 부모의 이혼 뒤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 주로 갔다. 14세 때 시애틀의 한 클럽에서 레이 찰스의 밴드에 들어가 트럼펫을 연주하며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1950년대부터 클리포드 브라운, 듀크 엘링턴 등 유명 재즈 아티스트의 앨범을 작업하며 이름을 날렸고, 프로듀싱 뿐 아니라 뮤지컬·TV프로그램 제작 등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갔다.
영화 산업에서도 그의 업적이 적지 않다. 트루먼 카포테의 '인 콜드 블러드' 영화 음악을 만들면서 존스는 헐리우드 영화 음악을 작곡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기록됐다. 1977년 미국 사회 노예의 뿌리를 추적한 드라마 ‘뿌리’의 음악으로 에미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의 일군 커리어일 것이다. 1979년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발표한 5집 '오프 더 월(Off the wall)'은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려나간 명반. 마이클 잭슨이 소니로 이적하면서 그의 음반을 소니에서 처음 프로듀싱해 준 사람이 퀸시 존스였다. 이후 1982년, 8000만장이 팔려나간 마이클 잭슨의 8집 앨범 '스릴러(Thriller)'등 세계적인 히트 앨범도 퀸시 존스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 앨범의 판매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않고 있는 1위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로 등극하자 그 역시 팝음악계 '미다스 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퀸시 존스는 1985년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 앨범에 46명의 미국 팝스타를 참여시키면서 또 하나의 족적을 남기게 된다. 스티비 원더, 레이 찰스,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밥 딜런 등 당대를 주름잡던 톱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고자 기획된 프로젝트 밴드인
'위 아더 월드'는 1980년대 빌보드 핫 100 4주 1위와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레코드 및 올해의 노래를 석권했다. 퀸시 존스는 이 음악을 녹음하면서 팝스타들의 기싸움에 대비해 "자존심은 문밖에 맡겨두고 오시오"라고 써붙일 정도였다고. 어려움 끝에 탄생한 이 노래는 기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도록 한 명곡이며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1993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취임 축하 콘서트 제작까지 퀸시 존스가 맡으면서 문화계를 넘어 미국의 정계와 사회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퀸시 존스는 한국 K팝에 대해서도 일찍이 그 가능성을 알아본 인물이기도 하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3년 한국을 찾아 2010년대 K팝 스타들의 재능을 눈여겨 보며 K팝이 세계를 주름잡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의 부고로 보아와의 인연도 재조명되고 있다. 보아의 2004년 앨범 '퀸시'는 그의 이름을 빌어온 앨범이다. 2011년 방한했던 퀸시 존스는 보아를 만났고, 꾸준히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마이클 잭슨의 앨범에 관여했던 아티스트들에게 보아를 소개하고, 보아가 기획사의 도움없이 별개로 음악성을 인정받도록 다리를 놔주기도 했다. 2013년 퀸시 존스는 자신의 80주년 기념 공연에 보아를 직접 초청해 무대를 꾸미도록 했다. 보아는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Beat It'을 부르며 화제를 모았다. 공연 자체가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소속된 소니에서 기획한 공연이라 무대 위 아티스트들도 소니 소속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소속 가수가 아니었던 건 보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