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쩡판즈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로 반입되는 모습. /문체부 제공
지난달 11일 쩡판즈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로 반입되는 모습. /문체부 제공
상속세를 예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납하는 미술품 물납제도가 국내에서 본격 시행되며 미술시장에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반입된 1호 물납품이 그간 국내에선 흔히 볼 수 없던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란 점에서 대중의 예술 향유 폭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술품 컬렉션을 물려받은 ‘큰 손’ 수집가들의 상속세 납부를 위한 기증이 글로벌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큰 변수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미술품 물납제도를 적극 장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6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따르면 지난달 물납 허가를 받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에 반입된 작품 4점에 대한 소장품 등록 절차가 진행 중이다. 지난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된 이후 첫 사례다.
쩡판즈 작가. ⓒ문덕관 포토그래퍼
쩡판즈 작가. ⓒ문덕관 포토그래퍼
눈에 띄는 작품은 쩡판즈(60)가 그린 두 점의 ‘초상’ 연작이다. 상대적으로 해외 컬렉션이 아쉽다고 평가받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다양성과 품질을 끌어올릴 계기가 됐기 때문. 국립현대미술관이 쩡판즈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미화 미술관 소장품자료관리과장은 “그간 작품수집 경로가 구입, 기증, 관리전환이었는데 물납제 시행으로 좋은 작품을 수집할 경로가 추가돼 고무적”이라면서 “쩡판즈 작품은 고가로 거래되는 터라 미술관 예산으로 수집이 어려웠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향후 전시, 교육프로그램에서 선보일 수 있게 돼 기대가 크다”고 했다.

웨민준, 장샤오강, 팡리쥔과 함께 ‘중국 현대미술 4대 천왕’으로 불린 쩡판츠는 2000년대 중국 아방가르드 회화를 대표한다. 중국의 현실과 체제적 한계를 풍자한 작품 ‘최후의 만찬’이 2013년 홍콩 경매에서 약 250억 원에 낙찰되며 가장 비싼 아시아 현대미술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둔 작가로,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선 건축 거장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전시공간에 작품을 선보여 큰 인기를 끄는 등 여전히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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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판즈 '초상' 시리즈. /케이옥션 제공
쩡판즈 '초상' 시리즈. /케이옥션 제공
‘초상’은 ‘고기’ ‘가면‘과 함께 쩡판즈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대표 시리즈다. 1990년대 ‘가면’ 시리즈로 체제적 모순과 이 속에서 갈등을 겪는 중국 현대인의 허영, 고독을 표현했던 쩡판즈는 2000년대 들어선 내면의 불안과 인간소외를 화폭에 담아냈는데, 이런 경향은 탄탄한 외형이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는 듯한 ‘초상’ 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에 해당 작품이 출품될 당시 11억5000만~15억원의 높은 가격표가 매겨졌던 이유다.

문체부가 물납신청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 구성한 ‘미술품 물납심의위원회’에서도 보존상태, 역사·학술·예술적 가치가 모두 기대 이상으로 국가가 소장하기에 적정하단 의견을 내렸다.

한 위원은 개별심의를 통해 “짙은 윤곽선과 거친 터치, 공허하고 커다란 눈동자의 인물, 과장된 비례의 형태는 쩡판츠 특유의 회화 형식”이라며 “해당 작품은 2000년 이후 선보인 ‘초상’ 연작의 전형적 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인간소외를 주제로 왕성하게 제작했던 작품 경향을 고스란히 보여줘 소장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심사위원은 “국립현대미술관은 글로벌 미술 맥락에서 부족한 해외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1990~2000년대 중국미술이 미술사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쩡판즈 작품은 활용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지난 4월 개막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선보인 쩡판즈 'Near and Far / Now and Then' 전시 전경.
지난 4월 개막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선보인 쩡판즈 'Near and Far / Now and Then' 전시 전경.
국내 미술계에선 쩡판즈 작품의 첫 국립미술관 소장을 계기로 미술품 물납이 보다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입 예산이 연간 47억원 수준에 불과해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소장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물납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다. 세금 납부를 명목으로 개인 수장고에 있던 작품들이 국공립 미술관에 걸리면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 효과도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오는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의 걸작이 걸리는 이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실레 컬렉션을 보유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품으로 꾸려지는데, 이 미술관은 ‘세기의 수집가’로 불린 루돌프 레오폴트의 컬렉션 5200점을 정부가 매입하며 세워졌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김범준 기자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김범준 기자
해외에서도 세금을 미술품 기증으로 대납하는 건 중요한 이슈다. 아트바젤과 UBS가 최근 공동 발간한 ‘2024년 컬렉터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미술시장의 장기 변수 중 하나가 ‘부의 이전’이다. 이른바 ‘슈퍼 리치’의 자산 포트폴리오에서 미술품이 10~20%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상속세 납부 등을 이유로 컬렉션 일부를 판매하는 경우가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중 상당수는 미술품을 향후 미술관에 기증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정준모 한국 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국내에서도 상속세 등 세금을 현금으로 마련하느라 미술품을 처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급하게 매각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하거나 경매 수수료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면서 “미술품 물납제가 활성화되면 수집가도 제 값을 인정 받고, 훌륭한 컬렉션을 많은 국민들도 함께 볼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이관표 문체부 문화기반과장은 "미술품 등 물납제로 받은 작품들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기 위한 방법을 적극 찾겠다"며 "앞으로도 제도가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정책과 시스템을 꾸준히 개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승목 기자

한국경제신문-문화체육관광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