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을 준 연주자가 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52)다. 그는 작년 12월 KBS교향악단과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 연주에서 단순한 차력쇼 이상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줬다. 한동안 '라흐마니노프 하면 루간스키'를 떠올릴만큼 그의 연주는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 그가 최근 독주회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루간스키는 그의 대표 레퍼토리인 라흐마니노프의 뿐 아니라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곡들을 선보였다. 1부에서는 라흐마니노프 연습곡과 전주곡들로 섬세한 피아니즘을, 2부에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피아노 편곡 버전으로 연주해 피아노라는 악기의 무한한 확장성을 보여줬다.
(c)Hyeonkyu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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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첫 곡으로는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에서 4개의 연습곡을 연주했다. 지난해 협주곡 전곡으로 입증한 바 있듯,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물리적 어려움은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건 화려한 테크닉보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서정성과 투명한 음색이었다. 이미 기본 재료가 잘 갖춰진 덕분에 이를 토대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요리를 만들수 있는 게 아닐까.

라흐마니노프 연습곡은 작품 제목처럼 '회화적' 요소가 돋보였다. 넓게 펼쳐지는 아르페지오, 불협화음이 가득한 스케일, 멜로디를 받쳐주는 독특한 리듬과 화음 같은 난해한 배경 요소들은 질서정연한 레이어로 만들었고, 다채로운 타건으로 여러 음색을 담아내며 음악에 명암을 더했다. 호소력 짙은 멜로디와 중간 중간 반짝이는 한두개의 음들, 그리고 아름답게 정돈된 배경 요소들이 조화로웠다.
(c)Hyeonkyu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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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는 그의 색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첫 곡은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중 '신들의 황혼', 이중 일부분을 발췌해 그가 직접 편곡한 작품들이었다. 신들의 황혼은 전체 16시간에 달하는 링 시리즈의 마지막 결말을 담고 있는 매우 극적인 파트다. 화려한 관현악법을 포함해 인물과 감정을 특정 선율과 연결 짓는 '유도동기',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무한 선율' 등 바그너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다.
신들의 황혼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은 '브륀힐데와 지크프리트의 사랑의 노래'였다. 루간스키는 이중창을 묘사하듯 왼손과 오른손 혹은 양손을 번갈아가며 남녀의 애절한 사랑의 선율을 손끝으로 담아냈다. 이어 호른의 합주로 웅장하게 연주되는 '영웅의 동기'는 두터운 화음으로 특유의 묵직함을 담아냈다. 그가 직접 편곡을한 만큼 스토리와 음악이 하나가 되는 바그너의 특징을 살리고자 한 흔적이 역력했다.
'러시아 대가' 루간스키, 열 손가락으로 담아낸 바그너의 정수
마지막 곡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바그너의 오페라를 리스트가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작품이다. 루간스키는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볼륨의 그라데이션을 트레몰로로 표현했고, 빽빽한 화성을 최대한 풍성하게 연주하며 관현악 합주의 웅장함이 느껴지게끔 했다.피아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그의 열렬한 시도에 관객들은 큰 박수와 호응으로 화답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