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국내 산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트럼프가 각종 보조금 축소·폐지와 관세 인상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아메리카 퍼스트’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운 트럼프 정부가 다시 들어서는 만큼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거나 수출물량이 많은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새로운 리스크를 떠안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칩스법·IRA 뒤집어질까

보조금 폐기 땐 반도체·전기차 타격…'美 둥지' 가전·기계는 안도
트럼프 정부 출범에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조 바이든 정부 때 제정된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법에 따라 미국 정부에서 각각 64억달러(약 8조7600억원)와 4억5000만달러(약 6200억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돼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트럼프의 과거 행보를 볼 때 칩스법을 무력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칩스법을 유지하더라도 새로운 조건을 내거는 식으로 투자 규모 확대나 보조금 축소 효과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론, 인텔 등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몰아주기 위해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TSMC를 겨냥해 “그들은 우리 사업의 95%를 훔쳤고 그게 지금 대만에 있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가 첨단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 규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걱정거리다. 삼성전자 낸드플래시의 37%(지난해 기준)를 중국 시안공장에서 생산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만드는 D램의 40%는 중국 우시공장에서 나온다.

○관세 확대는 車 기업에 악재

자동차 회사와 부품업체들의 불확실성도 커졌다. 트럼프가 수입차에 10~20% 관세를 부과하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보조금도 폐기하겠다고 공언해서다. 지난해 전체 자동차 수출액(1082억달러) 중 미국 비중은 47.3%에 달했다. iM증권에 따르면 미국이 관세 20%를 부과하면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추가 부담은 각각 월 4000억원, 2000억원에 이른다. 한국GM의 일부 생산라인이 멈춰설 가능성도 있다. 한국GM은 지난해 42만 대를 미국에 수출했는데, 관세율이 높아지면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본사가 한국GM에 줬던 물량을 미국 공장으로 돌릴 수 있어서다.

IRA가 폐기되면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생산하는 차량에 대한 보조금도 사라진다.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앨라배마와 조지아에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 조지아에 세운 전기차전용공장(HMGMA)도 가동하기 시작했다. 비상이 걸린 건 배터리업체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미국에서 배터리 셀과 모듈을 생산하면 ㎾h당 각각 35달러와 10달러를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명목으로 받고 있는데, 이 혜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지화한 가전·건설기계는 안도

가전업체는 상대적으로 걱정이 덜하다. 미국에 공장을 둔 데다 지금도 보조금 혜택을 받지 않고 있어서다. LG전자는 테네시주에 연간 세탁기 120만 대, 건조기 60만 대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삼성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연간 세탁기 100만 대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LG전자는 향후 테네시 공장에서 TV와 냉장고를 생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건설기계 업종은 ‘트럼프 2.0’ 시대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일단 두산밥캣은 북미에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고, HD현대인프라코어와 HD현대건설기계는 지난 9월 미국에 통합 제작센터를 구축한 만큼 관세 부담을 덜었다. 오히려 트럼프 정부가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면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트럼프가 건설 규제 완화를 공언한 것도 호재다. 건설 붐이 일면 장비 수요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트럼프가 향후 어떤 정책을 펼칠지 가늠하기 위해 미국 대관 기능을 확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가 내놓을 정책을 파악하고 대비하기 위해 미국 내 정보라인을 확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후/박의명/오현우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