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베니스서 18분 기립박수 받은 영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
2024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영화제 사상 18분간 기립 박수 신기록
영화 <룸 넥스트 도어>가 보여주는 존엄사
2024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영화제 사상 18분간 기립 박수 신기록
영화 <룸 넥스트 도어>가 보여주는 존엄사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에 나오는 구절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는 이 말이 세 번 반복된다. 상황마다 대사는 조금씩 바뀌고 그때마다 느낌도 다르다.
주인공 마사(틸다 스윈튼)가 죽고 나서 영화의 마지막에 친구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 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존엄사를 선택한 친구 마사가 세상을 떠났지만,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위로 눈이 내림을 말한 것은 죽음이 누구에게나 바로 곁에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자궁경부암 3기인 마사가 항암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얘기이다. 인기 작가인 잉그리드는 옛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너무 반갑게 만났고 그 뒤로 잉그리드는 마사를 자주 찾아가서 위로도 하고 마사가 겪은 그동안의 사연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암 때문에 “환희와 우울 사이에서 널을 뛴다”고 말하는 마사에게는 즐거운 것이 없고 고통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자기는 죽을 준비를 마쳤고 안락사할 약까지 사놨으니 죽을 때 옆방에만 있어 달라고.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잉그리드는 고민 끝에 마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연 속에 있는 집으로 함께 들어가서 지낸다. “익숙한 것들이 곁에 없으면 떠나기 쉬울 것 같다”는 마사의 얘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결심한 마사는 친구가 자살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 봐 전혀 몰랐던 것으로 말하라고 거듭해서 당부한다. 그리고 아침에 2층에 있는 자기 방문이 닫혀 있으면 죽은 것으로 알라고 한다. 그러니 아침에 눈 뜨면 잉그리드는 초한 마음으로 2층 방문이 열려있는가를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마사는 정작 잉그리드가 외출하고 있던 시간에 약을 먹고 죽음을 택한다. 야외에 있는 예쁜 색 의자 위에 누워서. 아마도 잉그리드가 밖에 있던 시간을 택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친구가 몰랐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런도 수사관들은 잉그리드를 조사하면서 마사가 죽겠다는 생각을 말하지 않았냐고 추궁을 거듭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마사의 바람대로 잉그리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으로 판명 나고 함께 지내던 집으로 돌아온다. 마침 아버지 없이 큰 마사의 딸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와서 죽은 엄마의 친구 잉그리드와 함께하며 영화는 끝난다. 연주회장에 앉아 "슬픈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다. <룸 넥스트 도어>를 보면서 죽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져도 되는 건가를 생각했다. 두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만든 화면들은 죽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예쁘기만 하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우정어린 교감들이 예쁘고, 예쁜 색들로 화면을 채우는 알모도바르의 미장센이 뛰어나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둡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것임을 그렇게 표현한다. “말 그대로 죽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줄 몰랐는데...” (잉그리드)
이 영화가 제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할 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깨끗하고 품위 있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이건 정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감독의 철학대로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존엄사를 선택한 마사도,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잉그리드도 서로 깨끗하고 품위 있는 작별을 했다. 죽음이란 것이 끔찍하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다. 잔잔한 죽음에 관한 얘기이다.
영화의 원작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이 궁금해서 읽어봤다. 소설 속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적어도 둘이 있지만, 떠날 때는 오로지 혼자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마사와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진 잉그리드, 두 친구 사이의 깊은 공감과 우정이었다. 마사는 고독하지 않았고, 잉그리드는 마사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니 마사의 죽음은 아름다운 존엄사였다.
주인공이 죽었는데도 영화를 보고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하니 이 얘기를 영화 속의 수사관들처럼 ‘범법은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며 반인륜적이라고 펄쩍 뛸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아주 가늘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말해주었듯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곁에 있다. 다만 누구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을 나의 모습을 잃지 않는 품격있는 모습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들의 소망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픈 것이지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결국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얘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룸 넥스트 도어' 1차 예고편]
[영화 '룸 넥스트 도어' 2차 예고편]
유창선 문화평론가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에 나오는 구절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는 이 말이 세 번 반복된다. 상황마다 대사는 조금씩 바뀌고 그때마다 느낌도 다르다.
주인공 마사(틸다 스윈튼)가 죽고 나서 영화의 마지막에 친구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 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존엄사를 선택한 친구 마사가 세상을 떠났지만,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위로 눈이 내림을 말한 것은 죽음이 누구에게나 바로 곁에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자궁경부암 3기인 마사가 항암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얘기이다. 인기 작가인 잉그리드는 옛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너무 반갑게 만났고 그 뒤로 잉그리드는 마사를 자주 찾아가서 위로도 하고 마사가 겪은 그동안의 사연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암 때문에 “환희와 우울 사이에서 널을 뛴다”고 말하는 마사에게는 즐거운 것이 없고 고통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자기는 죽을 준비를 마쳤고 안락사할 약까지 사놨으니 죽을 때 옆방에만 있어 달라고.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잉그리드는 고민 끝에 마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연 속에 있는 집으로 함께 들어가서 지낸다. “익숙한 것들이 곁에 없으면 떠나기 쉬울 것 같다”는 마사의 얘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결심한 마사는 친구가 자살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 봐 전혀 몰랐던 것으로 말하라고 거듭해서 당부한다. 그리고 아침에 2층에 있는 자기 방문이 닫혀 있으면 죽은 것으로 알라고 한다. 그러니 아침에 눈 뜨면 잉그리드는 초한 마음으로 2층 방문이 열려있는가를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마사는 정작 잉그리드가 외출하고 있던 시간에 약을 먹고 죽음을 택한다. 야외에 있는 예쁜 색 의자 위에 누워서. 아마도 잉그리드가 밖에 있던 시간을 택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친구가 몰랐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런도 수사관들은 잉그리드를 조사하면서 마사가 죽겠다는 생각을 말하지 않았냐고 추궁을 거듭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마사의 바람대로 잉그리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으로 판명 나고 함께 지내던 집으로 돌아온다. 마침 아버지 없이 큰 마사의 딸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와서 죽은 엄마의 친구 잉그리드와 함께하며 영화는 끝난다. 연주회장에 앉아 "슬픈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다. <룸 넥스트 도어>를 보면서 죽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져도 되는 건가를 생각했다. 두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만든 화면들은 죽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예쁘기만 하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우정어린 교감들이 예쁘고, 예쁜 색들로 화면을 채우는 알모도바르의 미장센이 뛰어나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둡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것임을 그렇게 표현한다. “말 그대로 죽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줄 몰랐는데...” (잉그리드)
이 영화가 제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할 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깨끗하고 품위 있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이건 정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감독의 철학대로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존엄사를 선택한 마사도,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잉그리드도 서로 깨끗하고 품위 있는 작별을 했다. 죽음이란 것이 끔찍하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않다. 잔잔한 죽음에 관한 얘기이다.
영화의 원작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이 궁금해서 읽어봤다. 소설 속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적어도 둘이 있지만, 떠날 때는 오로지 혼자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마사와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진 잉그리드, 두 친구 사이의 깊은 공감과 우정이었다. 마사는 고독하지 않았고, 잉그리드는 마사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니 마사의 죽음은 아름다운 존엄사였다.
주인공이 죽었는데도 영화를 보고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하니 이 얘기를 영화 속의 수사관들처럼 ‘범법은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며 반인륜적이라고 펄쩍 뛸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아주 가늘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말해주었듯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곁에 있다. 다만 누구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을 나의 모습을 잃지 않는 품격있는 모습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들의 소망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픈 것이지만, 그래도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결국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얘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룸 넥스트 도어' 1차 예고편]
[영화 '룸 넥스트 도어' 2차 예고편]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