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시대가 어두울수록 여배우가 더 빛나는 법이다. 사람들은 무섭고 시끄러운 세상을 향해 몸과 마음의 문을 닫아건다. 세상사의 소식을 듣고 보기보다는 차라리 침잠을 택한다. 그리고 그 고독의 몸부림에 동행할 사람을 찾는다. 그럴 땐 자신이 동경하는 여배우가 제격이다. 그녀는 맑고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어느 때는 하늘하늘한 몸매와 바람과 함께 나부끼는 머리카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사람들의 심사를 위로한다. 이건 꼭 남성적 시선, 태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배우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동 자산이다.
'정년이' 김태리가 사는 법, 오드리 헵번에서 기네스 펠트로까지
당초 이 여배우 얘기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유명하다 한들, 엄청난 스타덤에 올랐다 한들 내가 보기에 아직 필모그래피의 부피가 쌓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약간은 시한폭탄 급이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좋은 의미의 돌아이 스타일라고 할까, 현장에서도 무대포 돌직구 스타일로 알려졌고 그래서 조금 더 공들여 지켜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태리는 오히려 나이가 더 들면, 40줄이 넘어서면 더욱더 엄청난 연기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전까지는 왠지 인생을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태리의 앳된 이미지는(나이가 벌써 34임에도) 최근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정년이’에서 찰떡같이 붙는 모습이 됐다. ‘정년이’는, 물론 정은채를 비롯해 창극을 하는 모든 여배우가 상찬을 받고 있지만, 어찌 됐든 김태리의, 김태리에 의한, 김태리를 위한 드라마이다. 여성 국극단 얘기이고 여기서 김태리는 한마디로 미친 연기력을 선보인다. '미쳤어 미쳤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저런 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쟤가 저런 걸 어디서 배웠겠어. 저건 끼야 끼. 안에 담겨 있는 불같은 것. 그런 게 있는 애야. 천부적인 거. 다른 애들이 정말 부러워할 거야. 아마 자신도 자신 어디에서 저런 연기가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할 거야. 스타니슬랍스키가 와서 울고 갈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지.’
한경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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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국극단의 얘기는 ‘정년이’ 이전에 한국 영화계가 몇 번 시도한 적이 있다. 가장 최근의 작품, 현대 작품이 바로 박흥식 감독의 ‘해어화’(2016)이다. 다소 다른 얘기이지만 1950년대를 배경으로 창을 부르는 여인들의 이야기라는 초기 설정은 ‘정년이’가 ‘해어화’와 같은 뿌리라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해어화’에서는 한효주와 천우희가 나왔다. ‘정년이’가 ‘해어화’와 확연하게 다른 것은 남성성을 ‘제대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남자 배우는 김태훈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거세의 상징성’이야 말로 ‘정년이’가 모으는 인기의 원천이다. 남자가 없어도, 아니 없어야 굴러가는 국극단. 남자가 없어도, 아니 없어야 제대로 굴러가는 세상. 그 축소판을 보여주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김태리가 저리도 창을 잘했어?’라고 입을 모은다. 라이브가 아닌 후시이긴 하지만 모든 배우가 자기 실력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모양이다. 당연히 이 드라마를 통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뮤지컬 출신 배우들도 있는 모양이다. 김태리는 아예 국악을 할 줄 몰랐을 거라고들 생각한다. 맞다. 이번에 배워서 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단순하게 끼가 철철 넘치는 배우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에서 ‘소리’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소리를 듣게 생겼다. 이번 ‘정년이’에서 김태리는 장난기 가득한 ‘머슴아’ 이미지에서 성숙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본인 스스로가 드라마를 통해 성장해 가는 모습을 연기한다. 어떤 때는 오드리 헵번같고 성장한 모습일 때는 줄리아 로버츠나 기네스 팰트로를 연상시킨다. 나이를 더 먹으면 로렌 바콜같아질까.

김태리를 우물에서 건진 자는 박찬욱이다. 그는 ‘아가씨’에서 김태리를 파격적으로 캐스팅했다. 1천5백 대 일이었다고 했다. 철저한 오디션을 통해서였다. 소속사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거나 감독이 알아서 알음알음하는 관계로 천거된 것이 아니다. 박찬욱은 그런 점에서 철저하고 냉정한 인물이다. 오디션에서 김태리는 튀는 행동을 했던 모양이고(‘그냥 제 방식대로 한 번 더 해보면 안 될까요?’라면서 약간 제멋대로 굴었던가 등등) 박찬욱은 마침 그런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던 듯했다. 영화 ‘아가씨’는 새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고 박찬욱은 원작 그대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는 소설을 동성애 레즈비언 영화로 둔갑시켰다.
영화 '아가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아가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에서 아가씨 둘, 김민희와 김태리는 과감한 베드 신 연기를 펼친다. 영화는 끊임없이 금기를 건드리거나 깨뜨리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아가씨’는 한국 현대영화의 새로운 문을 연 셈이 됐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작품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또 거꾸로 당연히 미국 캘리포니아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동성애 문제에 대해 개방적인) LA비평가협회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을 수여했다. 김태리는 걸출한 감독의 눈에 들어, 단박에 세계 무대로 나간 셈이 됐다. 사람의 사주명리학은 이런 걸 두고 분석을 해봐야 한다. 김태리에게는 어떤 시운이 결합됐던가. 아무리 시운이 좋다 한들 그때 딱 맞는 자기 옷, 자기 능력이 결여됐었다면 그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겠는가. 하늘은 늘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화 '아가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아가씨'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아가씨’ 이전의 김태리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리 알고 싶어 하지들을 않는다. 별로 관심이 없다. 아나운서라도 해 볼 요량으로 경희대 언론정보학과를 갔는데(아나운서를 하고 싶은데 왜 이 학과를 갔는지 모르겠지만. 방송연예과가 맞지 않는가.) 우연히 연극반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도 극단에서 무명의 연기 생활, 그것도 언더스터디 생활(일명 카케무샤. 대체 배우. 주연배우가 유고 시 대신할 연기자)을 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겠지만 연극단원이었을 때 주변에서 꽤나 연기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고(언더스터디를 했으니까) 조막만 한 아시아 형 동안에 서구형 몸매가 눈에 띄었고 그래서 CF 광고에 발탁됐으며 광고가 붙는 연기자들에게는 늘 그렇듯 조기에 소속사가 생기게 된 것이 ‘아가씨’로까지 연결된 셈이다. 배우 소속사들은 자신의 배우들을 어떻게든 성장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사업 목표를 지니고 있다. 김태리 소속사가 그녀에게 ‘아가씨’의 오디션을 반 강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한 편에 물경 수백만 관객이 몰린다 한들 그건 드라마 한 편을 두고 전 국민이 다 보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쨉도’ 없다. ‘아가씨’는 관객 400만을 모았지만,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전국의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됐던 2018년은 팬데믹 직전으로 이른바 OTT의 거센 물결이 일어나는 시작점이었던 때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영화에서 드라마로 옮기게 한 장본인(이럴 때는 주인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이 ‘미스터 션샤인’이었고 바로 김태리였다. 김태리는 독립 투사의 아버지 삼촌을 둔 여인 고애신 역으로 그녀 스스로 저격수가 되어 항일 투쟁을 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 유진 초이와 숙명적인 사랑을 한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가장 달콤한 사랑은 혁명의 와중에서 벌이는 것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사진출처. tvN 홈페이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사진출처. tvN 홈페이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동지적 사랑 역시 독일 혁명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둘은 극우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이다. 김태리가 맡은 고애신과 이병헌이 맡은 유진 초이는 혁명적 사랑을 한다. 그 점이 많은 사람들을 울컥거리게 만들었다. 김태리는 ‘미스터 션샤인’으로 만인의 연인이 됐다. 아마도 고애신은 나중에 안옥윤 같은 투사가 됐을 것이다. 여성 독립 투사 안옥윤. 최동훈 영화 ‘암살’의 주인공이 된 인물.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적 시선도 좋았던 작품이다.

김태리는 작품은 적지만 그간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했다. 신인이 가지 않는 길을 갔다. 신인이 갈 만한 길을 가지 않았다. 그 점이 스타가 된 전법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나중에 조금 아쉬워할 수도 있다. 신인이 누리는 산뜻한 이미지의 기간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중 한편이 ‘리틀 포레스트’이다. 일본 드라마를 한국 영화로 번안했던 작품이고 임순례 감독이 만들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 혜원이 고향에 돌아와 옛 친구들과 직접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며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자연주의, 환경주의를 표방했던 작품이고 이른바 일본식 슬로우 무비, 힐링 드라마를 추구했던 작품이다. 작은 영화치고 150만이라는 기대 이상의 히트를 했다. 김태리로서는 두 번째 영화였지만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시운이 작동하게 한 작품이다. 신인 때부터 작품 선구안이 남다르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그다음 작품들인 넷플릭스 야심작 ‘승리호’와 또 다른 블록버스터 ‘외계+인 1,2’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작품 자체는 다들 그 안에 단단한 무엇이 있었는데 비해 외양을 너무 ‘삐까번쩍’하게 꾸미는 바람에 흥행 면에서는 헛물을 켰고 비평 면에서도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김태리 측면에서 그녀가 너무 각을 잡고 나오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데다가(‘승리호’에서 선글라스 낀 모습은 약간 재수 없기까지 했다) 작품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SBS 드라마 ‘악귀’도 성공하지 못했다. 김태리는 ‘아가씨’와 ‘리틀 포레스트’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과 이번 ‘정년이’에서처럼 청순발랄함과 ‘숙성한’ 여인의 사이에 있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린다.
'정년이' 김태리가 사는 법, 오드리 헵번에서 기네스 펠트로까지
이번 ‘정년이’ 연기는 창 연습만으로도 3년이 걸렸다고 했다. 이럴 때 보면 여배우들, 배우들은 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혼을 다해서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김태리는 한동안 정년이로 남을 것이다. 3년 넘게 투혼 연기를 펼친 만큼 다음 작품까지 어느 정도 인터벌이 있는 것도 팬들 입장에서는 다 용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좋은 작품으로 돌아올 것을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쉽지 않은 세상사에서 김태리가 많은 대중들에게 위안과 힐링, 기쁨과 즐거움, 무엇보다 사랑을 줄 것을 기대한다. 정말 우린 그런 사람들, 여배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