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걷는 걸음 걸음마다…완성되는 두겹의 주름옷
옷에 주름이 가득 잡혀 있다. 햇빛을 받고 걸어가면 바닥에 옷의 그림자가 비친다. 주름 모양대로 시시각각 그림자가 달라진다. 주름진 옷감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인간 조명’이다. 스카프에도, 블라우스와 원피스에도, 스커트에도 각기 다른 주름들. 이 모든 의상은 ‘빛을 주름잡는 작가’ 권중모(42)가 삼성물산 브랜드 르베이지와 협업해 만든 컬렉션이다.
◀ 권중모 작업실에 놓인 푸른색 한지. 종이를 접으며 주름을 잡은 흔적이 가득하다.  르베이지 제공
◀ 권중모 작업실에 놓인 푸른색 한지. 종이를 접으며 주름을 잡은 흔적이 가득하다. 르베이지 제공
지난해 르베이지가 권중모와 함께 ‘주름 컬렉션’을 처음 선보이자마자 패션계는 뜨겁게 반응했다. 세 번째 시즌을 거치며 공개되는 족족 의상과 소품이 ‘완판’됐다. “한국의 이세이 미야케가 나타났다”는 호평이 쏟아지곤 했다. 하지만 권중모는 호들갑 섞인 칭찬에도 동요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됐든 ‘한지공예가’라는 정체성만이 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완연한 가을바람이 불던 날, 권중모의 디자인 컬렉션이 가득한 서울 한남동 ZIP739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한지를 가지고 조명을 만드는 디자이너다. 이것보다 나를 잘 나타내는 표현은 없다.”

그의 담백한 자기소개다. 권중모에게 한지는 작업의 전부와도 같다. 권중모가 한지를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유학 생활 때다. 그는 “스페인에서 다른 나라 유학생을 많이 만났는데, 국가마다 정체성과도 같은 소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핀란드는 자작나무라는 소재를 써서 가구를 만들고, 가죽이 유명한 스페인은 가죽공예가 발달한 모습을 보며 전통적으로 쌓여온 소재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지만큼 한국의 정체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재는 또 없다고 생각했어요. 연약한 종이라는 한지 특성상 응용 가능한 방법이 제한적이어서 한계도 있었죠. 그러다 전통 창호를 보고 영감이 떠올랐죠. 한지가 투명하지 않지만 빛이 투영되는 부분이 매력적이었어요. 그 지점에 꽂혀 조명을 만들어 보고자 했죠.”
입고 걷는 걸음 걸음마다…완성되는 두겹의 주름옷
그가 쓰는 한지는 일반적이지 않다. 모두 르베이지 컬렉션처럼 주름이 잡혀 있다.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이중 주름 기법’이다.

“조명을 만들려는데, 뻣뻣한 일반 한지를 쓰니 민속촌과 옛 주막에서 쓸 법한 ‘촌스러운’ 모습밖에 구현되지 않았어요. 우연히 한지 몇 장을 겹치고 접는 시도를 하게 됐는데, 빛을 비추니 겹친 종이만큼 빛의 농도와 색이 달라져 음영이 생겼죠. 수백 번이고 한지를 접어보며 빛의 농도를 조절하다가 주름 패턴을 시작했습니다.”
▲ 권중모X르베이지 ‘이중 주름 램프’  르베이지 제공
▲ 권중모X르베이지 ‘이중 주름 램프’ 르베이지 제공
섬세한 한지공예를 하는 권중모는 스페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는 “전문적인 산업 브랜드 회사 속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아니라 독립 디자이너를 하고 싶었고, 외부 인력 없이 대학생인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디자인이 뭘까 고민하다가 공예 세계로 눈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권중모 삶에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여러 국가에서 모인 예비 디자이너들을 만나며 인간의 취향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권중모는 “정말 이상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실사화 후 각광받고, 완벽한 다자인의 완성본이 이상할 수도 있다는 걸 보며 스스로 ‘과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이상한 걸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2024년 르베이지 가을·겨울(FW) 컬렉션  르베이지 제공
2024년 르베이지 가을·겨울(FW) 컬렉션 르베이지 제공
전문 공예가로 자리 잡은 그에게도 이번 의상 디자인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조명과 달리 움직임이 있는 소재라는 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세 번의 시즌을 하다 보니 이전과 매번 주름을 다르게 잡아야 한다는 것도 새로웠죠. 토종 브랜드로 오래 자리 잡고 있는 르베이지만의 시그니처와 고유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는데, 기교 대신 브랜드가 지닌 소재의 탁월함 등을 선보이는 데 주목했어요.”

의상을 디자인할 때도 그는 ‘빛’에 집중한다. 그는 “대부분의 옷은 소재 덩어리로 움직이는데, 나의 옷은 주름을 따라 분해되고, 입은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음영이 생긴다”고 했다.

“저의 르베이지 컬렉션은 사람이 입어야 비로소 완성작이 됩니다. 움직임이 없는 사진과 마네킹으로는 빛이 만들어내는 옷의 매력을 살릴 수 없죠.”

르베이지는 권중모의 조명에 영감을 받아 먼저 협업을 의뢰했다. 명동 매장 ‘살롱드르베이지’에서 조명을 판매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권중모의 답은 ‘거절’이었다. 그는 “위탁판매는 싫고, ‘르베이지스럽게’ 새로운 걸 만들면 하겠다”고 했다. 르베이지는 그의 답을 듣고 ‘조명 전시’ 아이디어를 내놨다. 전시에 내놓은 그의 조명은 큰 인기를 얻었다. 르베이지가 ‘본격적인 의상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도 그때부터다.

르베이지와 함께한 의상 디자인은 권중모의 작업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는 “의류 디자인 프로세스가 다른 장르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시즌마다 발 빠르게 트렌드를 따라가고 고민하는 과정이 새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르베이지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퀘스트를 깬다’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고.

“게임에서 미션을 깨듯 새 영역을 깨나가는 일이 즐거웠어요. 서도호와 박서보 선생님 등 평소 좋아하는 거장처럼 경계를 두지 않고 멋진 작가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죠.”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