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던 나라서 '시네마 왕국' 떠오른 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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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바스·버밍엄 콘텐츠 투어
영국 런던·바스·버밍엄 콘텐츠 투어
“영국은 작지만 강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너리, 해리 포터, 베컴의 왼발이 있습니다. 오른발도 있고요.”
21년 전 겨울 개봉해 이제는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가 된 ‘러브 액추얼리’의 한 장면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휴 그랜트 분)가 미국 대통령을 향해 던지는 대사다. 자신을 얕잡아보던 이를 향한 통쾌한 일격이자, 영국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장.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베컴을 빼면 공통점이 있다.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
가을을 부지런히 통과하고 있는 영국을 찾았다. 버밍엄, 바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무심코 영화 대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지금 러브 액추얼리를 다시 만든다면 영국 총리의 대사에 들어갈 만한 명작들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흥행 기록을 다시 쓴 드라마 ‘브리저튼’(사진)부터 ‘2000년대의 대부’라는 극찬이 쏟아진 시리즈물 ‘피키 블라인더스’, 이름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된 ‘미션 임파서블’의 시작점,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브리짓 존스’ 시리즈까지. 이들 모두 영국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런던은 물론 기차로 1~2시간이면 로맨틱한 영국 중세 시대로, 산업혁명 시기 탐욕의 전쟁터로 떠날 수 있다. 이제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현장을 따라 여행하며 명장면 속으로 들어가볼 순간이다. “레디, 액션!”당장 무도회가 열릴 것 같은…19세기 유럽 낭만 품은 '바스'
‘지금 브리저튼 세트장 속에 들어온 건가?’
‘브리저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바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드레스와 턱시도였다면 드라마 장면과 다를 바 없을 듯했다. 거리에 지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있는 덕이다. 교외에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바스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브리저튼’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1800년대 초반의 리젠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시대극이다.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간직한 촬영지를 찾던 제작진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바스였다.
바스에는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채 모여 있다. 역사적인 건축물의 보존 상태가 뛰어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 여기에는 지역사회와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도시의 고전적인 풍경을 간직하기 위해 개인 주택의 색을 바꾸는 것마저 자제할 정도다.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돌로 포장돼 있고, 가로등도 19세기에 만들어진 그대로다. 인공적인 세트를 제작해서는 채울 수 없는 1%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바스였던 셈. ‘브리저튼’에 제대로 과몰입하고 싶다면 ‘브리저튼 워킹 투어’에 참여하면 된다. 가이드와 함께 약 두 시간 동안 바스를 걸으며 드라마 촬영지를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를 돌아보는 투어다. 다프네-사이먼 커플이 산책하며 말다툼하던 골목길,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공간, 무도회가 열리는 레이디 댄버리의 저택, 페더링턴 가문의 저택 등 드라마 시청자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장소들이 이어진다.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은 홀본 박물관. 시즌 1에서 레이디 댄버리의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홀본 박물관의 정원이다. 18세기 호텔로 문을 열어 실제로 사람들이 무도회를 즐긴 역사적인 건물이다. 1916년에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윌리엄 홀번의 컬렉션 전시를 시작했다. 초상화, 도자기, 보석 등 18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바스 토박이’가 투어를 진행하는 덕분에 촬영 비하인드도 들을 수 있다. 브리저튼 촬영 현장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 하나를 가릴 정도의 거대한 천을 동원했고, 촬영팀 역시 바스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기부금을 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투어가 끝나면 바스 거리가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공기로 차오른다.산업혁명 시대 '갱들의 거리' 버밍엄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네.’
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도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부심이 이해가 간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무대가 바로 버밍엄이기 때문이다. 석탄, 석회암, 철광석 등 지하지원이 풍부한 덕분이었다. 버밍엄을 중심으로 인근 소도시인 더들리, 울버햄프턴까지 하나의 거대한 산업지구가 형성됐다. 공장은 멈출 줄 몰랐고,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철길에는 밤낮없이 기차가 오갔다. 오죽했으면 ‘블랙 컨트리’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산업혁명 당시 제철공장의 굴뚝에서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광경이 검은 세계와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도시 전역에 촘촘한 거미줄처럼 운하가 흐르는 것도 이때의 흔적이다. 버밍엄 내운하 길이를 더하면 56㎞에 달한다. 이는 ‘운하의 도시’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 길이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19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도시는 점차 쇠락하는 듯 보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고, 젊은 노동자들이 떠나면서다. 그러나 2013년 뜻밖에 쇠퇴한 도시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넷플릭스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880~1920년대 버밍엄에서 활동한 범죄 조직 피키 블라인더스의 활약을 그린다. 조직을 이끄는 쉘비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벌이는 암투, 이들을 견제하는 뒷골목 세력과 경찰 조직 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아르, 범죄, 정치까지 어우러진 ‘영국판 야인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인기나 완성도에서 ‘대부’와 비견될 정도다.
드라마는 당시 버밍엄의 시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작품 속에 도시의 역사가 살아 숨쉬니, 버밍엄 사람들의 자랑일 수밖에. 덕분에 도시 곳곳에서 작품 속 캐릭터 벽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피키 성지순례’를 온 시청자들이 헌팅캡을 쓰고 인증샷을 남기는 모습 역시.
드라마가 100년 전 공간을 생생히 담아낸 비결이 궁금하다면 ‘블랙 컨트리 리빙 박물관’으로 향하면 된다. 산업혁명 당시의 버밍엄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둔 버밍엄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건축물과 골목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난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드라마 명장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작품의 팬이라면 골목마다 ‘아, 여기!’ 하며 반가운 탄성을 지를 것이다.톰 형이 내달렸던 리버풀역…브리짓이 장보던 버러 마켓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아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영화 촬영지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유서 깊은 두 편의 프랜차이즈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브리짓 존스’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촬영됐기 때문이다. 고전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두 시리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런던 한 바퀴’ 완성이다.
그 시작은 기차역부터다. 영화 해리포터 속 ‘9와 3/4 승강장’으로 유명한 킹스크로스역이 있다면, ‘미션 임파서블’에는 리버풀스트리트역이 있다. 1996년 첫 편을 시작으로 20여 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전 세계를 무대로 아찔한 스턴트를 선보이는 에단 헌트(톰 크루즈 분·사진)의 고생담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공중전화에서 지령을 받는 장면, 미션을 수행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 짐 펠프스를 마주치는 장면이 모두 리버풀스트리트역에서 촬영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역의 간판은 화려해졌고 공중전화 부스는 현금인출기로 바뀌었지만 작품의 팬이라면 영화 속 그 장소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이야기는 버러 마켓에서 시작한다. 과일부터 유제품, 차, 수산물과 육류까지 각종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장이다. 공장식으로 대량 유통하는 제품이 아니라 생산자가 소규모로 생산해 직접 판매하는 곳이다. 신선한 오이스터와 햄, 치즈 등으로 배를 채웠다면 브리짓의 흔적을 찾아볼 시간. 시장 초입에 있어 바로 눈에 띄는 건물은 브리짓(러네이 젤위거 분)이 사는 집으로 등장한 곳. 영화 속에서 브리짓과 로맨스를 펼치는 두 남자 마크(콜린 퍼스 분), 다니엘(휴 그랜트 분)과의 에피소드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1편에서 두 남자가 브리짓을 두고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벌이는 명장면 역시 이 골목에서 촬영했다. 영화 제작진은 촬영 당시 시장 입구를 3일 동안 통제해야 했다. 어떤 촬영인지 궁금해하는 상인들에게 ‘버러 마켓에 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라고 속인 덕에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고.영화속 주인공처럼…런던 호캉스로 아침을
영국 런던은 유럽의 모든 ‘최신’이 모여드는 중심지지만 유서 깊은 신사·숙녀의 도시기도 하다. 영국의 역사가 깃든 곳에서 고전적인 런던 스타일 휴식을 누리고 싶다면 더 스태퍼드 런던이 제격이다.
이 호텔은 17세기에 지어진 개인 저택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당시 소유주는 스펜서 가문. 영국의 전 왕세자빈 다이애나 스펜서의 바로 그 ‘스펜서’다.
이후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왕실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18세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를 돌보는 유모의 숙소로 쓰였고, 1912년 호텔로 문을 연 다음에도 버킹엄궁과 이어진 지하 터널을 따라 왕실 가족들이 찾아 바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세계 2차대전 당시에는 미국과 캐나다 장군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호텔에는 전쟁 때 방공호로 쓰인 지하실이 남아 있는데 방독면, 포스터, 사진 등 당시 소품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객실에서는 세월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대리석, 마호가니 나무, 무게감 있는 색감으로 꾸며진 공간은 귀족에게 어울릴 법한 호사스러운 분위기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다른 호텔들과 비교해 확연히 넓은 객실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욕조가 큼직하게 자리한 화장실은 웬만한 비즈니스호텔 객실만 하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현대적인 객실, 마구간으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해 별장 같은 포근함을 느끼도록 한 객실까지 취향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머무는 기간 짬을 내 로비 라운지의 애프터눈티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애프터눈티 어워드’에서 ‘숨겨진 보석 상’을 받은 메뉴로 폭신한 스콘과 다채로운 맛의 샌드위치, 아기자기한 색을 뽐내는 계절 케이크, 호텔 블렌딩 티를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문화 체험이다.
런더너는 런던 사람, 즉 ‘런더너’ 하면 떠오르는 댄디한 모습을 한 호텔이다. 호텔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위치다. 호텔 입구에서 골목만 돌아가면 피커딜리 서커스, 옥스퍼드 서커스 등 볼거리 가득한 번화가가 펼쳐진다. 빅벤, 런던아이 등 관광지도 산책하러 나서기에 충분한 거리에 있다.
그렇기에 호텔 주변은 밤낮없이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거리의 소음은 온데간데없고, 은은한 조명과 디자인 가구가 우아하고 럭셔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분위기는 로비 라운지뿐 아니라 객실에서도 이어진다. 편안한 우드 가구에 과감한 색감의 타일을 함께 사용해 고급스러우면서 감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객실 테이블 위에는 눈에 띄는 소품이 있다. 바로 오페라글라스. 호텔이 뮤지컬 극장이 모인 소호 거리에 있다는 점을 재치 있게 보여주는 소품이다. 세면대에서도 극장 분장실을 본뜬 듯한 조명을 볼 수 있다. 또 런던을 ‘예술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미술 전문 가이드와 함께하는 프라이빗 갤러리 투어, 매진된 인기 전시·공연에 입장할 수 있는 VIP 티켓 제공 등 아트 마니아라면 솔깃해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런던·바스·버밍엄=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여행팀 기자 una.kim@hankyung.com
21년 전 겨울 개봉해 이제는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가 된 ‘러브 액추얼리’의 한 장면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휴 그랜트 분)가 미국 대통령을 향해 던지는 대사다. 자신을 얕잡아보던 이를 향한 통쾌한 일격이자, 영국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장.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베컴을 빼면 공통점이 있다.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
가을을 부지런히 통과하고 있는 영국을 찾았다. 버밍엄, 바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무심코 영화 대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지금 러브 액추얼리를 다시 만든다면 영국 총리의 대사에 들어갈 만한 명작들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흥행 기록을 다시 쓴 드라마 ‘브리저튼’(사진)부터 ‘2000년대의 대부’라는 극찬이 쏟아진 시리즈물 ‘피키 블라인더스’, 이름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된 ‘미션 임파서블’의 시작점,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브리짓 존스’ 시리즈까지. 이들 모두 영국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런던은 물론 기차로 1~2시간이면 로맨틱한 영국 중세 시대로, 산업혁명 시기 탐욕의 전쟁터로 떠날 수 있다. 이제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현장을 따라 여행하며 명장면 속으로 들어가볼 순간이다. “레디, 액션!”
당장 무도회가 열릴 것 같은…19세기 유럽 낭만 품은 '바스'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투어
‘지금 브리저튼 세트장 속에 들어온 건가?’‘브리저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바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드레스와 턱시도였다면 드라마 장면과 다를 바 없을 듯했다. 거리에 지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있는 덕이다. 교외에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바스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브리저튼’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1800년대 초반의 리젠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시대극이다.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간직한 촬영지를 찾던 제작진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바스였다.
바스에는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채 모여 있다. 역사적인 건축물의 보존 상태가 뛰어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 여기에는 지역사회와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도시의 고전적인 풍경을 간직하기 위해 개인 주택의 색을 바꾸는 것마저 자제할 정도다.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돌로 포장돼 있고, 가로등도 19세기에 만들어진 그대로다. 인공적인 세트를 제작해서는 채울 수 없는 1%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바스였던 셈. ‘브리저튼’에 제대로 과몰입하고 싶다면 ‘브리저튼 워킹 투어’에 참여하면 된다. 가이드와 함께 약 두 시간 동안 바스를 걸으며 드라마 촬영지를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를 돌아보는 투어다. 다프네-사이먼 커플이 산책하며 말다툼하던 골목길,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공간, 무도회가 열리는 레이디 댄버리의 저택, 페더링턴 가문의 저택 등 드라마 시청자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장소들이 이어진다.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은 홀본 박물관. 시즌 1에서 레이디 댄버리의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홀본 박물관의 정원이다. 18세기 호텔로 문을 열어 실제로 사람들이 무도회를 즐긴 역사적인 건물이다. 1916년에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윌리엄 홀번의 컬렉션 전시를 시작했다. 초상화, 도자기, 보석 등 18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바스 토박이’가 투어를 진행하는 덕분에 촬영 비하인드도 들을 수 있다. 브리저튼 촬영 현장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건물 하나를 가릴 정도의 거대한 천을 동원했고, 촬영팀 역시 바스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기부금을 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투어가 끝나면 바스 거리가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공기로 차오른다.
산업혁명 시대 '갱들의 거리' 버밍엄
누아르 '피키 블라인더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네.’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도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부심이 이해가 간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무대가 바로 버밍엄이기 때문이다. 석탄, 석회암, 철광석 등 지하지원이 풍부한 덕분이었다. 버밍엄을 중심으로 인근 소도시인 더들리, 울버햄프턴까지 하나의 거대한 산업지구가 형성됐다. 공장은 멈출 줄 몰랐고,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철길에는 밤낮없이 기차가 오갔다. 오죽했으면 ‘블랙 컨트리’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산업혁명 당시 제철공장의 굴뚝에서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광경이 검은 세계와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도시 전역에 촘촘한 거미줄처럼 운하가 흐르는 것도 이때의 흔적이다. 버밍엄 내운하 길이를 더하면 56㎞에 달한다. 이는 ‘운하의 도시’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 길이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19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도시는 점차 쇠락하는 듯 보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고, 젊은 노동자들이 떠나면서다. 그러나 2013년 뜻밖에 쇠퇴한 도시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넷플릭스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880~1920년대 버밍엄에서 활동한 범죄 조직 피키 블라인더스의 활약을 그린다. 조직을 이끄는 쉘비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벌이는 암투, 이들을 견제하는 뒷골목 세력과 경찰 조직 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아르, 범죄, 정치까지 어우러진 ‘영국판 야인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인기나 완성도에서 ‘대부’와 비견될 정도다.
드라마는 당시 버밍엄의 시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작품 속에 도시의 역사가 살아 숨쉬니, 버밍엄 사람들의 자랑일 수밖에. 덕분에 도시 곳곳에서 작품 속 캐릭터 벽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피키 성지순례’를 온 시청자들이 헌팅캡을 쓰고 인증샷을 남기는 모습 역시.
드라마가 100년 전 공간을 생생히 담아낸 비결이 궁금하다면 ‘블랙 컨트리 리빙 박물관’으로 향하면 된다. 산업혁명 당시의 버밍엄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둔 버밍엄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건축물과 골목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난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드라마 명장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작품의 팬이라면 골목마다 ‘아, 여기!’ 하며 반가운 탄성을 지를 것이다.
톰 형이 내달렸던 리버풀역…브리짓이 장보던 버러 마켓
할리우드 영화 '미션 임파서블'·'브리짓 존스' 시리즈의 탄생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아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영화 촬영지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유서 깊은 두 편의 프랜차이즈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브리짓 존스’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촬영됐기 때문이다. 고전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두 시리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런던 한 바퀴’ 완성이다.그 시작은 기차역부터다. 영화 해리포터 속 ‘9와 3/4 승강장’으로 유명한 킹스크로스역이 있다면, ‘미션 임파서블’에는 리버풀스트리트역이 있다. 1996년 첫 편을 시작으로 20여 년을 이어온 시리즈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전 세계를 무대로 아찔한 스턴트를 선보이는 에단 헌트(톰 크루즈 분·사진)의 고생담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공중전화에서 지령을 받는 장면, 미션을 수행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 짐 펠프스를 마주치는 장면이 모두 리버풀스트리트역에서 촬영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역의 간판은 화려해졌고 공중전화 부스는 현금인출기로 바뀌었지만 작품의 팬이라면 영화 속 그 장소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이야기는 버러 마켓에서 시작한다. 과일부터 유제품, 차, 수산물과 육류까지 각종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장이다. 공장식으로 대량 유통하는 제품이 아니라 생산자가 소규모로 생산해 직접 판매하는 곳이다. 신선한 오이스터와 햄, 치즈 등으로 배를 채웠다면 브리짓의 흔적을 찾아볼 시간. 시장 초입에 있어 바로 눈에 띄는 건물은 브리짓(러네이 젤위거 분)이 사는 집으로 등장한 곳. 영화 속에서 브리짓과 로맨스를 펼치는 두 남자 마크(콜린 퍼스 분), 다니엘(휴 그랜트 분)과의 에피소드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1편에서 두 남자가 브리짓을 두고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벌이는 명장면 역시 이 골목에서 촬영했다. 영화 제작진은 촬영 당시 시장 입구를 3일 동안 통제해야 했다. 어떤 촬영인지 궁금해하는 상인들에게 ‘버러 마켓에 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라고 속인 덕에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영화속 주인공처럼…런던 호캉스로 아침을
호텔 더 스태퍼드 런던 & 런더너
영국 런던은 유럽의 모든 ‘최신’이 모여드는 중심지지만 유서 깊은 신사·숙녀의 도시기도 하다. 영국의 역사가 깃든 곳에서 고전적인 런던 스타일 휴식을 누리고 싶다면 더 스태퍼드 런던이 제격이다.이 호텔은 17세기에 지어진 개인 저택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당시 소유주는 스펜서 가문. 영국의 전 왕세자빈 다이애나 스펜서의 바로 그 ‘스펜서’다.
이후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왕실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18세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를 돌보는 유모의 숙소로 쓰였고, 1912년 호텔로 문을 연 다음에도 버킹엄궁과 이어진 지하 터널을 따라 왕실 가족들이 찾아 바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세계 2차대전 당시에는 미국과 캐나다 장군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호텔에는 전쟁 때 방공호로 쓰인 지하실이 남아 있는데 방독면, 포스터, 사진 등 당시 소품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객실에서는 세월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대리석, 마호가니 나무, 무게감 있는 색감으로 꾸며진 공간은 귀족에게 어울릴 법한 호사스러운 분위기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다른 호텔들과 비교해 확연히 넓은 객실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욕조가 큼직하게 자리한 화장실은 웬만한 비즈니스호텔 객실만 하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현대적인 객실, 마구간으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해 별장 같은 포근함을 느끼도록 한 객실까지 취향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머무는 기간 짬을 내 로비 라운지의 애프터눈티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애프터눈티 어워드’에서 ‘숨겨진 보석 상’을 받은 메뉴로 폭신한 스콘과 다채로운 맛의 샌드위치, 아기자기한 색을 뽐내는 계절 케이크, 호텔 블렌딩 티를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문화 체험이다.
런더너는 런던 사람, 즉 ‘런더너’ 하면 떠오르는 댄디한 모습을 한 호텔이다. 호텔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위치다. 호텔 입구에서 골목만 돌아가면 피커딜리 서커스, 옥스퍼드 서커스 등 볼거리 가득한 번화가가 펼쳐진다. 빅벤, 런던아이 등 관광지도 산책하러 나서기에 충분한 거리에 있다.
그렇기에 호텔 주변은 밤낮없이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거리의 소음은 온데간데없고, 은은한 조명과 디자인 가구가 우아하고 럭셔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분위기는 로비 라운지뿐 아니라 객실에서도 이어진다. 편안한 우드 가구에 과감한 색감의 타일을 함께 사용해 고급스러우면서 감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객실 테이블 위에는 눈에 띄는 소품이 있다. 바로 오페라글라스. 호텔이 뮤지컬 극장이 모인 소호 거리에 있다는 점을 재치 있게 보여주는 소품이다. 세면대에서도 극장 분장실을 본뜬 듯한 조명을 볼 수 있다. 또 런던을 ‘예술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미술 전문 가이드와 함께하는 프라이빗 갤러리 투어, 매진된 인기 전시·공연에 입장할 수 있는 VIP 티켓 제공 등 아트 마니아라면 솔깃해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런던·바스·버밍엄=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여행팀 기자 una.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