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하얀 지옥
존 패트릭 샌리 감독의 영화 ‘다우트(Doubt)’를 보았다. 예닐곱 번째인 거 같은데, 인간과 사회가 거대한 벽처럼 여겨질 적마다 문득 보게 되는 감회가 매번 쓸쓸하다. 1964년 브롱크스의 성(聖) 니콜라스 교구 학교가 배경이다. 주일 미사에서 플린 신부는 작년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 암살당해 국민들은 혼란 속에서 고통받았으나 그로 인해 서로를 위로하게 되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해,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는 사내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불타는 화물선에서 선원 하나만 목숨을 건졌습니다. 구명보트에 돛을 달고 별자리에 의지해 집으로 가는 항해를 시작했죠. 몸은 쇠약해져가고 이게 맞는 길인지 ‘의심(Doubt)’이 듭니다. 이런 신앙의 위기를 겪는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길을 잃을 때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한데,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는 이 설교까지 의심거리로 삼는다. 플린 신부가 죄를 지어서 저렇게 본인 얘기를 남 얘기처럼 하고 있다고. 그녀는 그가 너무 탈권위적이고 자유분방해 눈엣가시인 터였다.

플린 신부는 교장 수녀가 지배하는 학교의 극보수적인 방침과 관습을 개선하려고 한다. 와중에, ‘안개 같은 사건’이 터진다. 유일한 ‘흑인’ 학생 도널드 밀러는 플린 신부의 각별한 돌봄 속에 왕따를 견디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널드에게서 술냄새가 나는 것 등을 의심한 제임스 수녀의 보고로 플린 신부는 교장 수녀와 제임스 수녀 앞에 서게 된다. 복사(服事)를 맡고 있는 도널드가 미사주를 몰래 마시다가 들킨 것을 눈감아준 거라고, 그리고 다른 문제들도 나름 근거를 제시하며 플린 신부가 해명하자, 제임스 수녀는 의심이 걷혀 기뻐하지만, 웬걸, 교장 수녀는 오히려 더욱 집요한 의심(신부와 소년과의 성관계)으로 접어들어 도널드의 복사마저 박탈한다. 그녀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플린 신부를 학교와 성당에서 쫓아내려 ‘불타오른다’.

괴로운 플린 신부는 미사에서 이렇게 설교를 한다. ‘한 여인이 잘 모르는 한 남자를 험담했다. 하나님이 나무라시는 꿈에 가위눌린 여인은 신부를 찾아가 물었다. 제가 죄를 저지른 건가요? 신부가 이르기를, 빌딩 옥상에서 칼로 베개를 찔러 가른 뒤에 다시 나를 찾아오시오. 여인이 그렇게 하자, 베개 안에 있던 깃털들이 눈송이처럼 하늘을 하얗게 뒤덮었다. 신부가 말했다. 자, 이제 그 깃털들을 다시 베개 안으로 집어넣으시오. 여인이 대답했다. 불가능해요. 신부가 되물었다. 왜죠? 여인이 대답했다. 너무 많아요. 둥둥 떠서 다 날아갔어요.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요. 되돌릴 수 없어요. 바람에 실려갔거든요. 신부가 말해주었다. 그게 바로 험담이요. 소문이라는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시스 수녀의 계속된 뒷조사와 추궁에 질려버린 플린 신부는 (‘도널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승진 발령 때문이었지만) 그 교구와 학교를 떠난다. 제임스 수녀는 교장 수녀에게 말한다. “신부님이 범인이라는 그 확신은 감정이지 사실이 아니에요.” 교장 수녀는 대꾸한다. “나는 딱 보면 알아요.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도 있죠. 그를 무너뜨릴 거예요. 만년필이 아니라 볼펜을 쓰고, 커피에 설탕을 세 개나 넣는 인간.” 의심이 의심에 대한 확신이 되고, 알기 싫은 팩트보다 내 증오가 소중하다. 그런데 정작 교장 수녀는 그런 제 인생이 힘든지, 운다.

이 영화는 플린 신부와 교장 수녀 중 어느 편을 ‘명확히는’ 들지 않는다. 사건의 진위보다는 ‘의심’에 의해 파괴되는 영혼을 보여준다. 다만 슬픈 것은, 이런 고전적인 테마가 대한민국에는 사치에 불과해서다. 추돌사고처럼 생긴 의심 정도가 아니라, 의심을 조작해 이득을 취하는 정치세력과 그 ‘가짜뉴스’들에 ‘도파민중독’된 대중이 의기투합인 ‘지옥사회’이기 때문이다. 의심 때문에 괴롭기는커녕, 의심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사람들이 항상 함께 있으니 우리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면서도 외로울 겨를이 없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보라. 눈송이 같은 깃털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이 나라 이 도시 온 세상을 뒤덮었다. 아이들에게 천국은 하얀색이라고 가르치지 마라. 하얀색은, 서로의 모함자인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기만하는 증오의 색깔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