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제 로봇이란 말 안 써, 인공 인간이라고 하지.”
무대 위 아이들은 로봇을 인공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로봇을 기계의 집합체로 보는 시대는 이미 과거이며, 인간들과 로봇은 이미 어떠한 관계를 형성한 불가결의 존재란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7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막이 오른 연극 <이야기와 전설(연출·각본 조엘 폼므라)>은 로봇과 인간의 공생을 끊임없이 관찰하도록 만들었다.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연극은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과 AI휴머노이드(사람처럼 생긴 인공지능 로봇)의 일상적 관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연극 속에서는 10가구당 1개의 휴머노이드가 있다고 가정한다. 로봇은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거나, 요리와 가사를 돕거나, 말동무가 돼 준다. 인간 청소년들은 로봇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려고 시도하고, 감정 조절이 미성숙한 관계로 로봇에 심하게 의존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아마 10년 안에 도래할 우리 일상을 미리 엿본 것 같았다.

연출가 조엘 폼므라(61)는 LG아트센터 대극장의 객석 중 절반만 오픈하도록 했다. 관객의 몰입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절제된 무대에서 10명의 배우들이 속사포 같은 대사를 치며 110분 간의 극을 이어갔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혼란한 성 정체성, 부모와의 아슬아슬한 관계, 죽음, 진실과 거짓을 탐구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11개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쌓였고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거리의 소년들은 과거 욕정을 느꼈던 상대가 여성의 모습을 한 로봇이었단 걸 알고 수치심에 젖어있다.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다른 여자아이에게 “로봇이냐, 아니냐”를 따져 묻는다. 한편 십대를 지나 어른이 돼야 하는 한 소년은 배려심 많았던 돌봄 로봇을 다른 가정에 팔기로 한다. 그 로봇을 가사도우미로 쓰기 위해 한 가족이 방문하고, 그들은 말기암으로 곧 세상을 떠날 엄마 또는 아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로봇을 살지 말지 망설인다. 또, 불치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청소년이 평소 동경하던 로봇 아이돌을 만나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사진. ⓒElisabeth Carecchio, 제공. LG아트센터
아이돌로 활약하던 로봇이 더이상 상품의 가치가 없기에 곧 폐기된다는 로봇 제조사의 결정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는 로봇에 사랑을 고백한 아이가 알지 못하도록 봉쇄됐다. “영원히 너와 함께 하겠다”는 로봇의 말은 거짓이지만 아이는 무한한 감동을 받고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성장통을 앓는 10대 소년 소녀들은 곳 로봇과 인간을 둘러싼 냉엄한 진실에 눈뜨게 될 것이고 고통을 겪게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인간과 인공 인간이 공존하는 생활이 디스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원히 행복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제목이 ‘이야기와 전설’이라 전래동화 또는 이야기의 환상적 요소를 미리 짐작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래서 작품이 던지는 있을 법한 사실적 묘사가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폼므라를 어느 정도 아는 관객이었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렸을 것 같다. 그는 오래도록 전해 내려온 동화에 기반해 현대 사회를 비춰보는 3부작 작품(빨간모자, 피노키오, 신데렐라)으로 유럽 연극계에서 유명하다. 폼므라는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브룩이 “이 시대 가장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연출가”라고 소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이기도 하다. 폼므라는 연극에 투신한 이래 33년간 프랑스의 최고권위의 공연예술상인 몰리에르상을 9번이나 받았다.

그의 작품은 과거 한국에 몇 차례 소개된 적은 있지만, 자신의 극단 루이 브루이야르 컴퍼니와 방한해 공연을 올린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야기와 전설>은 지난 2020년 몰리에르상에서 최우수작품·연출·극작·효과상 등 4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한꺼번에 오른 바 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