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가 불붙인 아파트 열풍…42년전 '윤수일 아파트'는 몇층이었을까
1970년대 주공아파트는 대부분 5층
GDP 600달러
엘리베이터 엄두도 못내

1989년 노태우 '200만 가구' 공급에 고밀개발
1기 신도시, 최고 20층
스카이라인 생겨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최근 블랭핑크 로제의 '아파트' 인기 덕분에 윤수일의 '아파트'도 재조명받고 있다. 노래 덕에 전세계적으로 관심받게 된 단지는 어디일까. 윤수일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강을 끼고 갈대밭이 앞에 펼쳐져 있던 잠실지구 아파트를 보며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80년대초부터 우리나라에는 엄청나게 아파트가 많아졌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의 로망이었다. '러닝셔츠 차림으로 지낼 수 있다'거나 '도둑 걱정도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는 잠실대교, 그 주변에 있는 단지는 잠실주공5단지와 잠실 장미아파트다. 각각 1978년, 1979년 준공된 아파트로 15층, 14층이다. "군인인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찾아갔지만 그 가족이 이미 해외로 이민을 가 '쓸쓸한 아파트'만 남아 있었다"는 게 윤수일의 설명이니, 노래에 언급된 아파트는 잠실주공5단지와 잠실 장미아파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중대형 면적대 이상으로 지어져 해외로 이민을 떠날 형편이 되는 중산층 이상이 사는 단지였기 때문이다.

송파구 잠실지구는 강북의 인구 분산을 위해 철거민을 이주하기 위한 취지로 처음 개발이 시작됐다. 그래서 5층부터 12층, 14층, 15층, 18층이 들어서 빈민층, 중산층, 고소득층이 모두 어우러진 지역이었다. 거기에 재건축이 이뤄지면서 35층 아파트가 대거 들어섰다. 이젠 70층 재건축도 추진 중이다. 한국 아파트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잠실을 보면 알 수 있듯 서울은 10년 단위로 아파트 층수가 10개층씩 뛰는 게 '공식'처럼 됐다. 5층은 1970년대, 15층은 1980년대, 20층은 1990년대, 30층은 2000년대, 40층은 2010년대인 식이다. 2000년대초부턴 너도나도 '랜드마크'를 짓겠다는 욕망에 더해지면서 층수를 올리는 게 대세가 됐다. 이젠 49층을 넘어서 80층을 넘본다.

처음엔 왜 5층이었고 그 다음엔 왜 15층이었을까. 그 변천사를 짚어봤다.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조성 현장 / 서울시 제공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조성 현장 / 서울시 제공
1970~80년대 지은 반포와 잠실 일대 5층짜리 아파트 준공식 사진을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일명 '전원도시(garden city)' 개념을 영국에서 도입해 넓은 공간에 충분한 나무, 격자형의 도로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아파트 자체도 신축답게 새하얗다. 초고층 아파트를 심의하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들도 이렇게 입을 모은다. "그 때 지은 아파트가 사람이 '산다'는 측면에선 지금 초고층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라고.

해방 이후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 단지는 중앙산업이 사택으로 건설한 중앙아파트였다. 공급면적이 43~56㎡ 정도로 지금으로 치면 기껏해야 2인 가구가 머무를 수 있는 수준이다. 연탄아궁이를 뗐다는 것도 지금과는 달랐다. 지금처럼 4인 가구 가족이 사는 일반적인 집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5층이 적절...엘리베이터 감당 안된다"

첫 시작은 왜 5층이었을까. 사실 이런 아파트가 1970년대까지는 보편적이었다. 이유는 소득 수준이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해 1964년 최초의 주공 단지인 마포아파트를 지을 때였다. 일본주택공단에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 때 받은 의견이 "5층 이상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00달러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1989년 서울 수서택지지구 아파트 조감도 / 서울시 제공
1989년 서울 수서택지지구 아파트 조감도 / 서울시 제공
주공아파트만 5층으로 지어진 건 아니었다. 영등포구 여의도에 이은 2번째 신도시 프로젝트였던 영동개발 당시 반포주공1단지 1·2·3·4주구와 5주구(반포주공2단지)도 5층으로 지었다. 중대형 면적대가 많았지만 그래도 5층이 많았다. 단기간에 적은 비용으로 아파트를 대규모 공급하려면 이같은 선택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급주택으로 분양한 이촌동 한강맨션도 5층짜리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강북에 집중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기 위해 실시한 잠실개발 때 지어진 아파트는 영동개발로 지은 아파트보다 면적대가 작았다. 잠실개발은 강북의 무허가 철거민을 강제 이주시킨 성남개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잠실주공1~4단지와 잠실시영(잠실엘스·리센츠·트리지움·레이크팰리스·파크리오)이 소형 면적에 연탄 아궁이를 보유한 5층 짜리 복도식 아파트로 건설됐다.
서울 송파구 잠실시영아파트 준공식 / 서울시 제공
서울 송파구 잠실시영아파트 준공식 / 서울시 제공
잠실개발의 후속 시리즈로 1980년대초 들어섰다가 지금은 새 아파트촌으로 변신한 강동구 고덕주공1~8단지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고덕주공1단지(고덕아이파크)는 공급면적 43㎡짜리만 780가구로 지어졌다. 고덕그라시움으로 재건축된 고덕주공2단지(1983년)는 공급면적 36~60㎡인 2600가구가 들어섰다.

당시 아파트가 5층으로 낮게 지어진 이유는 소득도 있지만 아파트 높이 대비 동간 간격을 1.5배 이상으로 넓게 봤기 때문이다. 아파트 1층조차도 일조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아파트 높이가 50m라면 동간 간격은 75m에 달해야 했다. 5층으로 지어야 동간 간격을 약 20m 수준으로 좁힐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규정은 1978년에 1.25배로 완화된다.

그 때도 10층 이상 시도가 있었다. 마포아파트는 10층 이상으로 계획하다가 기름보일러와 엘리베이터의 한계에 부딪혀 6층으로 세웠다. 남산 자락에 복합공원으로 재탄생하는 회현제2시민아파트도 10층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다.

고급 단지들은 10층을 넘겼다. 엘리베이터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여의도 시범(12층)이나 1976년 잠실주공5단지(15층)은 '랜드마크'라고 해도 될만큼 이례적으로 고층에 중대형 평수로 지은 단지다. 1977년 초고급 아파트로 지어진 워커힐아파트의 층수가 12~13층이다. 1976년 압구정 현대 1,2차도 중대형 평수에 15층으로 지었다.

소득 늘자 층수도 20층으로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가 등장한 1982년은 5층에서 10층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1970년 279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1인당 GDP는 당시 1992달러로 성장했다. 소득이 늘자 당시 성장하던 중산층도 엘리베이터와 기름보일러를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1~1984년 들어선 과천주공 1~12단지도 3~5층부터 최대 15층인 아파트촌으로 조성됐다. 고덕주공아파트 중에서 마지막으로 입주한 9단지도 15층으로 높였다. 강병근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1980년대 후반까지는 초고층이라고 하면 15층 이상을 의미했다"며 "용적률 150%를 가지고 가장 많은 가구수를 밀어넣을 수 있다고 분석된 게 15층이었다"고 설명했다. 고급 아파트로 꼽히는 아시아선수촌은 9~18층으로 높이를 달리하면서 최초로 스카이라인을 도입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올림픽훼밀리타운 공사현장(올림픽선수기자촌 5공구) / 서울시 제공
서울 송파구 문정동 올림픽훼밀리타운 공사현장(올림픽선수기자촌 5공구) / 서울시 제공
고밀 아파트 공급을 위한 제도적 변화도 잇따랐다. 1981년 지하층 바닥면적을 용적률 산정에서 제외하며 본격적으로 완화하기 시작한 것. 1982년 동간 간격은 건축물 높이의 1.25배에서 1배로 좁아졌다. 1985년엔 서울 일반주거지역의 용적률이 180%에서 250%로 대폭 풀렸다.

그러자 20층 이상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남권 랜드마크로 기획해 1985~1988년 준공한 목동 신시가지 1~14단지는 5~20층으로 건설됐다. 1980년대 후반 계획한 상계택지지구는 최고층수가 15~25층으로 높아졌다.

고밀개발의 신호탄이 된 노태우의 '200만가구 공급'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200만 가구 공급'은 본격적인 고밀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정부는 1990년과 1992년 연이어 용적률 규제를 대폭 완화하며 200만가구 공급을 뒷받침했다. 1990년의 조치는 전환점이었다. 당시 정부는 일반주거지역의 용적률을 250%에서 400%까지 풀었다. 지금의 기준(300%)보다 훨씬 높았던 셈이다. 건폐율도 30%에서 60%까지 끌어올렸다. 20층 이상 아파트 지상층에 설치하는 기계실과 조경시설, 놀이터는 바닥면적에서 제외키로 했다. 1992년엔 지상층 부설주차장을 용적률 산정에서 빼면서 실질적으로 주택공급에 쓸 수 있는 용적률을 늘렸다. 동간 간격도 1배에서 0.8배로 좁혔다.
경기 분당신도시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 국가기록원 제공
경기 분당신도시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 국가기록원 제공
수도권 1기 신도시는 당시 서울 기준으로도 용적률이 파격적이었다. 5층 위주 저층 주동이 섞여있던 이전 아파트 단지와 달리 경기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신도시는 모두 15~20층 채워졌다. 평균 용적률은 220%에 달했다. 동간 간격도 높이의 0.8배로 맞춰졌다.

그 때 서울에 지은 아파트의 용적률도 300%를 웃도는 단지가 속출했다. 가령 1990년대초부터 재건축을 추진한 암사시영은 용적률 393%, 28층 선사현대로 다시 지어졌다. 한국 최초의 공영 아파트 단지였던 마포아파트는 재건축을 거쳐 용적률 277%, 17층으로 마포삼성아파트로 다시 지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 한경DB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 한경DB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지나치게 들어선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서울시는 1998년 최대 용적률을 300%로 낮췄다. 2003년엔 종 세분화 작업을 통해 가장 높은 3종 주거지조차 한도치를 250%까지 깎았다. 하지만 아파트 층수는 계속 올라가면서 '초고층의 상징'인 대치동 타워팰리스가 2002년 66층으로 들어선다. 진정한 '초고층'의 시작이었다.

'한강변 층수제한 도입 단초'...잠실 엘리트

2000년대 중반 잠실주공1~4단지를 재건축한 잠실엘스와 리센츠, 트리지움, 레이크팰리스, 파크리오는 '한강변 층수제한'이 도입된 배경이었다. 32~34층 높이로 통경축도 없이 빽빽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걍변 첫 주동의 경우 5층도 검토됐다.
서울 송파구 잠실엘스(반포주공1단지 재건축) / 한경DB
서울 송파구 잠실엘스(반포주공1단지 재건축) / 한경DB
2010년대 들어서자 30층대가 일반화됐고, 40층 넘는 아파트가 등장한다. 45층(159m) 높이로 2011년 준공한 성동구 갤러리아 포레가 대표적이다. 2015년엔 용산구 이촌동 렉스아파트를 다시 지은 래미안 첼리투스가 56층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서울시는 2013년 스카이라인 관리계획을 도입한다. '35층룰'의 등장이었다. 강병근 총괄건축가는 "35층에 20%(42층)까지 높이는 것도 허용하되 고층의 비중을 20~30%로 정해 나머지 주동은 10~20층대로 낮춰야한다는 입장이었다"며 "그런 비율이 도입되질 않아 모두 35층으로 깎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리센츠(잠실주공2단지 재건축) / 한경DB
서울 송파구 잠실동 리센츠(잠실주공2단지 재건축) / 한경DB
착공에 들어간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가 한강변 랜드마크 입지에도 35층으로 재건축을 진행하는 배경이다. 동쪽으로 인접한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와 래미안원베일리, 잠원동 아크로리버뷰신반포도 모두 35층으로 지어졌다. 2022년엔 동간간격 높이 비율이 0.5배까지 완화됐다. 49층 재건축을 우루루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