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 합헌''권리구제형 헌법소원'…헌재 초기 이론적 기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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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과 민사소송법 일인자로 초기 헌법재판소가 이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이시윤(李時潤) 전 감사원장이 9일 낮 12시40분께 신촌세브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9세.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8년 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판사가 됐지만, 이후 서울대 등에서 6년간 교수로 일했다.
이때 1965년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한 조영래(1947∼1990) 변호사를 가르쳤다.
1980년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 정월 초하루에도 책을 놓지 않아 세배객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82년에 쓴 민사소송법(이후 '신민사소송법'으로 개칭) 교과서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처음으로 독일 이론을 소개해 민사소송법의 '탈일본화'에 공헌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민법과 민사소송법 일인자였다.
1988년 이일규(1920∼2007) 대법원장 지명으로 초대 헌법재판관이 됐다.
헌법재판소가 초기에 이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정 합헌' 등 헌재의 각종 결정 양식이 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범준은 책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2009)에서 1990년 4월2일 국가보안법 7조1항 고무·찬양죄 위헌 제청 사건 선고에서 법정 의견을 집필한 고인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무해한 행위는 처벌에서 배제하고, 이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처벌을 축소 제한해야 한다'고 한정 합헌을 선고했고,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보법 고무·찬양죄에 한정 합헌을 선고한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중략) 이후 국가보안법이 헌재 한정 합헌 결정에 맞추어 개정되는 성과까지 올렸다.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저평가되는 것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공권력을 문제 삼는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이 만들어진 것도 고인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이범준은 자신의 책에서 고인이 "헌법소원 1호 사건이 나한테 배당됐다.
사법서사 규칙이 부당해 자격증을 따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재판관들은 각하하라고들 했다.
법률이 관련된 이상 법원에 사건이 걸려 있어야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승부를 내고 싶었다.
법원 재판에 상관없이 (헌법재판소로) 직접 들어온 사건도 심사가 필요하다 싶었다.
그래서 이론을 개발했다.
'공권력 행사 근거의 일종인 법률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는 헌법소원을 할 수 있다.
' 재판관 전원이 찬성했다.
그렇게 '법률에 대한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이 시작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또 검찰의 불기소도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범준은 '헌법재판소…'에서 "검찰의 불기소를 취소하려면 헌법상 기본권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런데 검사가 도대체 고소·고발인의 무슨 기본권을 침해한 것일까.
막막한 일이었다.
이시윤은 연구를 거듭했다.
이 사건 집필자는 아니었지만, 불기소 사건을 하게 되면 헌재도 규모를 갖추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헌법 27조 5항 법정진술권('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으로 이론을 구성했다.
검사가 범죄인을 기소해 판사 앞에 세우지 않으면, 국민은 법정에서 증언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1989년 4월17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는 헌법소원 대상이다.
다만 이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각하'라고 선언한다"고 적었다.
1993년 7월29일에는 전두환 정부 시절 국제그룹 해체 사건의 주심을 맡아 정부가 제일은행을 앞세워 사기업을 해체한 것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위헌이라고 인용 결정을 내렸다.
제자 조영래 변호사가 1989년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을 내놓고 1990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범준은 같은 책에서 "이시윤은 소송법의 일인자답게 군사정부 인권유린을 제거하고 일상에서 기본권을 확보하려면 세밀한 형식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여긴 것 같다.
한정 합헌·한 정위헌·위헌불선언 등 다양한 결정 양식을 도입하고, 보충 의견을 통해 재판 실무에서 일어날 문제점까지 지적하는 데서 확인된다.
"고 썼다.
변정수(1930∼2017) 초대 헌법재판관은 고인의 변형결정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며 반대했고, 많은 사건에서 혼자 위헌의견을 내면서 1대 8 구도를 형성했다.
이범준은 고인과 변정수 재판관의 대립 구도를 "'진보와 보수'라기보다 '형식과 실질'이었다"고 해석했다.
이시윤은 이범준과 인터뷰에서 "신설 기관인 헌재가 과거 헌법위원회처럼 휴면 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활성화의 터전을 다진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관치금융의 대표적 폐해인 국제그룹 해체 사건과 안보를 빌미로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한 국가보안법 고무·찬양죄 사건에서 주심을 맡은 것에 긍지를 갖는다"고 했다.
헌법재판관 임기를 9개월 남긴 1993년 12월16일 총리로 영전한 이회창씨의 후임으로 김영삼 정부 2대 감사원장에 발탁됐다.
이범준에 따르면 고인은 서울 정동 정동빌딩 16층 옛 헌법위원회 사무실을 사용하던 헌법재판소가 독립청사를 어디에 마련하느냐를 두고 논의할 때 사법서사협회(현 법무사협회)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물에 헌재를 입주시키려고 하자 반대해서 무산시킨 뒤 이현재 당시 국무총리에게 찾아가 을지로 청사를 달라고 부탁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헌재는 1988년 12월1일 을지로 청사에서 개청식을 했고, 현재의 재동 청사를 지을 때까지 사용했다.
유족은 아들 이광득(광탄고 교장)·이항득(사업)씨와 며느리 김자호·이선영씨, 손녀 이지원(초등교사)씨, 손녀사위 류성주(서강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12일 오전 8시, 장지 안산시 와동 선영. ☎ 02-2227-7500
※ 부고 게재 문의는 팩스 02-398-3111, 전화 02-398-3000, 카톡 okjebo, 이메일 (확인용 유족 연락처 필수)
/연합뉴스
향년 89세.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8년 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판사가 됐지만, 이후 서울대 등에서 6년간 교수로 일했다.
이때 1965년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한 조영래(1947∼1990) 변호사를 가르쳤다.
1980년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 정월 초하루에도 책을 놓지 않아 세배객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82년에 쓴 민사소송법(이후 '신민사소송법'으로 개칭) 교과서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처음으로 독일 이론을 소개해 민사소송법의 '탈일본화'에 공헌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민법과 민사소송법 일인자였다.
1988년 이일규(1920∼2007) 대법원장 지명으로 초대 헌법재판관이 됐다.
헌법재판소가 초기에 이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정 합헌' 등 헌재의 각종 결정 양식이 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범준은 책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2009)에서 1990년 4월2일 국가보안법 7조1항 고무·찬양죄 위헌 제청 사건 선고에서 법정 의견을 집필한 고인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무해한 행위는 처벌에서 배제하고, 이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처벌을 축소 제한해야 한다'고 한정 합헌을 선고했고,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국보법 고무·찬양죄에 한정 합헌을 선고한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중략) 이후 국가보안법이 헌재 한정 합헌 결정에 맞추어 개정되는 성과까지 올렸다.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저평가되는 것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공권력을 문제 삼는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이 만들어진 것도 고인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이범준은 자신의 책에서 고인이 "헌법소원 1호 사건이 나한테 배당됐다.
사법서사 규칙이 부당해 자격증을 따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재판관들은 각하하라고들 했다.
법률이 관련된 이상 법원에 사건이 걸려 있어야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승부를 내고 싶었다.
법원 재판에 상관없이 (헌법재판소로) 직접 들어온 사건도 심사가 필요하다 싶었다.
그래서 이론을 개발했다.
'공권력 행사 근거의 일종인 법률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는 헌법소원을 할 수 있다.
' 재판관 전원이 찬성했다.
그렇게 '법률에 대한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이 시작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또 검찰의 불기소도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범준은 '헌법재판소…'에서 "검찰의 불기소를 취소하려면 헌법상 기본권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런데 검사가 도대체 고소·고발인의 무슨 기본권을 침해한 것일까.
막막한 일이었다.
이시윤은 연구를 거듭했다.
이 사건 집필자는 아니었지만, 불기소 사건을 하게 되면 헌재도 규모를 갖추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헌법 27조 5항 법정진술권('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으로 이론을 구성했다.
검사가 범죄인을 기소해 판사 앞에 세우지 않으면, 국민은 법정에서 증언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1989년 4월17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는 헌법소원 대상이다.
다만 이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각하'라고 선언한다"고 적었다.
1993년 7월29일에는 전두환 정부 시절 국제그룹 해체 사건의 주심을 맡아 정부가 제일은행을 앞세워 사기업을 해체한 것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위헌이라고 인용 결정을 내렸다.
제자 조영래 변호사가 1989년 권리구제형 헌법소원을 내놓고 1990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범준은 같은 책에서 "이시윤은 소송법의 일인자답게 군사정부 인권유린을 제거하고 일상에서 기본권을 확보하려면 세밀한 형식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여긴 것 같다.
한정 합헌·한 정위헌·위헌불선언 등 다양한 결정 양식을 도입하고, 보충 의견을 통해 재판 실무에서 일어날 문제점까지 지적하는 데서 확인된다.
"고 썼다.
변정수(1930∼2017) 초대 헌법재판관은 고인의 변형결정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며 반대했고, 많은 사건에서 혼자 위헌의견을 내면서 1대 8 구도를 형성했다.
이범준은 고인과 변정수 재판관의 대립 구도를 "'진보와 보수'라기보다 '형식과 실질'이었다"고 해석했다.
이시윤은 이범준과 인터뷰에서 "신설 기관인 헌재가 과거 헌법위원회처럼 휴면 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활성화의 터전을 다진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관치금융의 대표적 폐해인 국제그룹 해체 사건과 안보를 빌미로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한 국가보안법 고무·찬양죄 사건에서 주심을 맡은 것에 긍지를 갖는다"고 했다.
헌법재판관 임기를 9개월 남긴 1993년 12월16일 총리로 영전한 이회창씨의 후임으로 김영삼 정부 2대 감사원장에 발탁됐다.
이범준에 따르면 고인은 서울 정동 정동빌딩 16층 옛 헌법위원회 사무실을 사용하던 헌법재판소가 독립청사를 어디에 마련하느냐를 두고 논의할 때 사법서사협회(현 법무사협회)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물에 헌재를 입주시키려고 하자 반대해서 무산시킨 뒤 이현재 당시 국무총리에게 찾아가 을지로 청사를 달라고 부탁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헌재는 1988년 12월1일 을지로 청사에서 개청식을 했고, 현재의 재동 청사를 지을 때까지 사용했다.
유족은 아들 이광득(광탄고 교장)·이항득(사업)씨와 며느리 김자호·이선영씨, 손녀 이지원(초등교사)씨, 손녀사위 류성주(서강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12일 오전 8시, 장지 안산시 와동 선영. ☎ 02-2227-7500
※ 부고 게재 문의는 팩스 02-398-3111, 전화 02-398-3000, 카톡 okjebo, 이메일 (확인용 유족 연락처 필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