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찾은 프랑스 파리의 아시안 마트 탕프레르. 식품 코너 한편이 흡사 한국 편의점을 떼어다 놓은 듯했다. 한국식 냉동 만두와 김치, 떡볶이, 소주, 고추장 등이 진열돼 있었고 한국 라면도 없는 게 없었다. 윌리엄 라타나반 탕프레르 구매책임자는 “최근 5년 새 한국 식품 매대 규모가 네 배로 커졌다”고 했다.
"순식간에 동났다" 난리 난 상황…'소주' 싹쓸이하는 파리지앵
탕프레르 인근 카르푸시티에는 지난 5월 한국 라면과 과자, 소주 등이 처음 입점했다. 프랑스 최대 대형마트 카르푸에 이어 카르푸의 기업형슈퍼마켓(SSM)인 카르푸시티에도 한국 식품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롯데칠성음료의 과일소주 ‘순하리 요거트’는 진열대에 놓인 지 3주 만에 초도 물량이 동났다.

미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에 이어 유럽에서도 K푸드 열풍이 뜨겁다. 한식은 한인 밀집 지역에서만 소비되던 과거와 달리 카르푸, 코스트코, 테스코 같은 대형마트에서 현지 음식과 나란히 진열돼 팔리는 ‘일상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식품업체는 ‘K푸드 불모지’로 불리던 유럽 시장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 현지 법인과 생산 시설을 잇달아 세우고 있다. CJ제일제당은 미국에 집중됐던 핵심 인력을 유럽으로 이동 배치하기 시작했다.

요즘 유럽에서는 어쩌다 한식당을 찾아 호기심으로 한식에 도전해 보는 차원을 넘어 가정집에서 떡볶이, 비빔밥, 불고기 등을 요리해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최대 아시안 마트인 어메이징오리엔탈을 찾는 현지인 비중은 60%를 웃돈다. 이곳에서 만난 마이케 호근붐은 “한 달에 한두 번은 직접 만든 비빔밥이나 떡볶이에 과일소주를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한식당도 자주 찾는다. 호근붐은 “다양한 식재료를 조합해 하나의 음식을 만든다는 점, 다른 반찬까지 다양하게 나오는 점 등이 한식의 흥미로운 요소”라고 했다. 네덜란드 젊은 층 사이에선 갓 구운 빵에 김치와 치즈를 얹은 ‘김치 토스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K푸드 인기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10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10월 한국 가공식품의 유럽 수출액은 5억170만달러를 기록했다. 역대 최대였던 작년 한 해 수출액(4억8490만달러)을 넘어섰다. 라면, 음료, 과자, 김치, 만두 등 5개 가공식품의 유럽 주요 5개국(네덜란드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수출액은 코로나19 사태 전인 2019년 1억43만달러에서 지난해 2억3980만달러로 4년 새 두 배로 늘었다. 동남아 수출액 증가율(61.8%)의 두 배에 가깝다.

K푸드 인기의 원천은 단연 K팝, K드라마 등 K컬처다. K컬처는 문화적 자부심이 높은 유럽에서도 문화 현상이 됐다.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커진 덕에 한식 시장의 판로가 확장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네덜란드 식품 수입사 비글리쿠퍼만의 김명주 부장은 “SNS에 방탄소년단(BTS) 숏폼 영상이 올라오면 이튿날 암스테르담 아시안 마트의 한국 식품 매출이 두 배가량 뛴다”며 “이 때문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 2 공개를 손꼽아 기다리는 바이어도 많다”고 했다. 문정훈 서울대 교수는 “유럽 사람들은 떡의 식감이 고무 같고 이상하다고 느껴 먹기를 꺼렸는데, SNS에서 한국 아이돌이 떡볶이를 먹는 영상을 보고 사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식품업체들은 유럽 시장 맞춤형 공략에 나섰다. 삼양식품은 올해 초 유럽의 비건(채식) 트렌드에 맞춰 동물성 유지를 뺀 ‘까르보 불닭볶음면’을 선보였다. 빙그레가 4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지난해 출시한 ‘식물성 메로나’의 올해 유럽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400% 증가했다. 배추 겉잎으로 만든 ‘구씨반가 청잎김치’로 ‘2024 파리 국제식품박람회’에서 혁신상 그랑프리를 받은 아워홈은 새우젓 대신 식물성 시즈닝을 넣은 김치를 개발 중이다.

파리·암스테르담=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