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던 초행길 노정 – 가우디와 함께한 일주일

말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텔레비전 마감 뉴스에서 계속되는 된더위 소식을 전하며 기온이 39.5도까지 올라간 지역이 있다고 했다. 처가가 있는 경북 영천이었다.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더위가 극심하니 조심하십시오. 땡볕에 밭에 나가지 마시고요.”

폭서에 아랑곳없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스튜어디스들이 비행기 출입구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처음 타보는 에어 프랑스였다. 기내 서비스가 기대한 것보다 좋았다. 밥과 빵과 고기가 함께 제공되는 한식 메뉴였다. 공짜로 주는 포도주를 몇 잔 마셨더니 금방 취했다.

가우디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스위스 출신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가우디를 '건축의 신'이라 불렀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 혹은 비교 불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전설', '황제', '영웅' 등으로 부르곤 하지만, 여간해서 신으로까지 추앙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건축가들이 신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까, 그가 남긴 건축물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해마다 바르셀로나로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걸까, 두 가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가져간 가우디 관련 서적을 비행기 안에서 읽고 또 읽었다.
말년의 가우디 모습. 그는 건축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 양 같은 삶을 살았다. 그 어떤 종교인이 이처럼 자발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한 지역에 끌어모을 수 있단 말인가?
말년의 가우디 모습. 그는 건축의 제단에 바쳐진 어린 양 같은 삶을 살았다. 그 어떤 종교인이 이처럼 자발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한 지역에 끌어모을 수 있단 말인가?
가우디는 서양 건축의 원형과 전통 그리고 문법과 패턴을 따르지 않았다. 모든 것은 백지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무한한 자유를 누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부자유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떠올릴 때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이 연상되곤 했다. 카사 밀라나 카사 바트요를 볼 때면 구례 운조루 고택이나 안동 농암 종택이 눈에 아른거렸다. 서양 건축은 빛과 돌의 기하학이 바탕이지만, 한옥 건축의 기본은 바람과 나무의 형이상학이다. 서양 건축은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것을 지향하지만, 한옥 건축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어울림을 추구한다. 돌과 나무, 빛과 바람, 기하학과 형이상학, 나는 이런 관점에서 가우디를 읽고 싶었다. 그가 구현하고 갈구했던 예술과 영성을 통해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건축 환경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가우디를 만나러 간다.
2015년 8월 8일 토요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천장. 웅장함과 화려함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눈을 감으면 새소리 바람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자연광이 관통하는 돌로 쌓아 올린 대자연의 숲이다. / 사진. ⓒ김혜경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천장. 웅장함과 화려함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눈을 감으면 새소리 바람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자연광이 관통하는 돌로 쌓아 올린 대자연의 숲이다. / 사진. ⓒ김혜경

조심스럽던 두 번째 여행길 – 가우디와 함께한 이주일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 여행이나 갈까? 스페인 어때?”

어렵사리 돈을 끌어모아 시작한 출판사가 난항을 거듭한 끝에 닻을 내린 후 글 쓰는 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낼 때였다. 처한 상황이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때 해외여행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현실과 딴판이었다. 모든 촉각이 스페인을 향해 있었다. “그러면…… 바르셀로나 어때? 가우디를 보러 가는 거야.”

며칠 고민하는 척하던 나는 아내에게 넌지시 말했다. 남편의 지친 심신을 개운하게 풀어주고 싶은 아내의 마음과 가우디가 간절히 보고 싶은 나의 마음이 일치했다. 그래서 8년 전 여름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글로 읽고 사진으로 봤기에 가우디에 관해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직접 맞닥뜨린 가우디의 건축물 앞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소름이 돋았고 전율을 느꼈다. 부지런히 다니며 보고 또 보고 열심히 적고 그렸다. 언젠가 책을 내고 싶었지만, 기약도 없었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가우디를 만나고 온 후 참 열심히 살았다. 글 써서 먹고사는 건 정말 고단한 일이었다. 버거울 때마다 가우디를 생각했다. 그는 언제 가장 힘들었을까? 설계할 때? 건축주를 설득할 때? 건축주와 소송을 벌일 때? 건축을 진행할 때? 마음먹은 대로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결국 그는 건축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제일 행복했을까? 처음 계획한 대로 건축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였으리라 짐작한다. 건축주와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그가 만든 집에서 즐거운 삶을 누릴 때였을 것이다. 결국 그를 힘들게 한 것도 행복하게 한 것도 건축이었다. 생계형 문필가로 날품 팔 듯 글을 쓰지만, 나 역시 글 때문에 희비가 엇갈린다. 내가 쓴 글로 인해 웃고 울며, 내가 쓴 책으로 인해 좌절하고 환희한다.
스물여섯 살 때의 가우디.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그의 앞에는 가난과 고독과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스물여섯 살 때의 가우디.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그의 앞에는 가난과 고독과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에는 일산을 떠나 강릉으로 이사했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 숲과 콘크리트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탁 트인 바다와 싱그러운 바람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바닷가 마을로 옮겨간 것이다. 삶의 질이 달라졌다. 매일 일출을 보고 바다를 마주하며 해송 사이를 걸으면서 몸도 마음도 순해지고 가뿐해졌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아파트에 산다. 도심 속 아파트가 아니라 바다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일 뿐이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양의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이 동해안에도 넘쳐난다. 해송 숲 옆에 거대한 호텔이 신축 중이다. 여기저기 새로 지을 예정인 아파트 분양 광고물들이 붙어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어 떠나왔지만, 사람 사는 집은 서울이나 일산이나 강릉이나 매한가지다. 왜 우리는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주거 공간에서 살아가는 걸까?

“코로나도 좀 잠잠해졌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겠지? 그러면…… 바르셀로나?”

결혼 20주년이 되는 해에 뭘 해야 좋을까 궁리하던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가우디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만으로 켜켜이 쌓여 온 답답함이 단박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길게 가기로 했다.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저 넋 놓고 앉아 햇볕 속에서 바람 속에서 구름 속에서 가우디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깊은 예술과 영성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고 싶었다. 8년 전에 정신없이 쓰고 그린 여행 노트를 꺼내 펼쳐보았다. 강렬했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바르셀로나를 떠났던 게 아니었다. 가우디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언제나 바르셀로나를 거닐며 가우디를 만나고 있었다. 낯선 공간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가우디를 떠올렸다. 그것이 거리이든 건물이든 자연이든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숨 쉬며 밥 먹고 살아가는 이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 또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건축이란 인간에게 무슨 의미이고 존재인가? 왜 돌로 지은 집과 나무로 지은 집에 사는 인간의 정신세계는 유사하지 않은가? 돌로 지은 집을 단층으로만 지었을 경우, 나무로 지은 한옥을 20층으로 지었을 경우, 무슨 문제가 벌어지는가? 왜 나는 바닷가로 이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가?
카탈루냐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 몬세라트.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영원한 안식처이자 예술혼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 사진. ⓒ김혜경
카탈루냐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 몬세라트.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영원한 안식처이자 예술혼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 사진. ⓒ김혜경
바르셀로나 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플라타너스. 가우디 건축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가우디에게 나무는 그의 건축에 영혼을 불어넣는 살아 있는 건축 재료였다. / 사진. ⓒ김혜경
바르셀로나 거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플라타너스. 가우디 건축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가우디에게 나무는 그의 건축에 영혼을 불어넣는 살아 있는 건축 재료였다. / 사진. ⓒ김혜경
바르셀로나에 직접 발을 디딜 생각을 하니 가우디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나는 바르셀로나로 가야만 했다. 이번에는 가을이었다. 전화로 안부를 챙길 어머니도 장모님도 계시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은 누군가를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사람이 찾아가야 한다. 바로 즉시.

그래서 나는 가우디를 만나러 갔다.
2023년 10월 11일 수요일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카사 비센스의 울타리. 가우디의 신앙심을 반영하듯 종려나무 잎을 문양으로 했다. 대장장이 아들이었던 가우디는 누구보다 철을 잘 다룬 건축가였다. / 사진. ⓒ김혜경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카사 비센스의 울타리. 가우디의 신앙심을 반영하듯 종려나무 잎을 문양으로 했다. 대장장이 아들이었던 가우디는 누구보다 철을 잘 다룬 건축가였다. / 사진. ⓒ김혜경

가슴 벅찬 세 번째 가상 여행 – 가우디와 함께할 일 년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전 우리의 준비는 촘촘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조심스럽게 문을 연 여행의 장막은 한결 두꺼웠다. 경비는 두 배를 웃돌았고 신경 쓸 것은 곱절에 달했다. “여보, 카메라 렌즈가 이상해. 아무리 해도 초점이 잡히질 않아. 어떡하지?”

카메라 장비를 점검하던 아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출발 사흘 전이었다. 마침 서울에서 약속이 있던 나는 고장 난 카메라 렌즈가 든 가방을 들고 KTX 기차를 탔다. 서둘러 미팅을 끝낸 나는 남대문에 있는 고객센터를 찾아 점검을 맡겼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고객센터 기사의 대답은 워낙 오래된 기종이라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고보다는 신형 렌즈를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중요한 촬영이잖아?” 고민할 시간이 없던 나는 남대문 카메라 판매점에서 신형 렌즈를 샀다. 예정에 없는 목돈이 지출되었다. 가볍던 마음이 묵직해졌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르셀로나가 아른거렸다.

카메라 장비는 무게가 상당하다. 본체와 여러 개의 렌즈, 삼각대와 보조 장비를 배낭에 짊어지고 양쪽 어깨에 멘 채 종일 바르셀로나를 누비다 보면 저녁 무렵 몸은 녹초가 된다. 아내가 촬영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짐은 대부분 내가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촬영할 때나 이동 중일 때 나는 틈틈이 내 시야를 스마트폰에 담고 순간의 감흥을 여행 노트에 기록했다.
구엘 공원 안에 있는 골고다 언덕 위의 돌 십자가 앞에 선 필자. 십자가는 가우디의 삶과 신앙과 건축을 꿰뚫는 상징이다. 지금은 접근이 금지되어 이곳까지 오를 수 없다. / 사진. ⓒ김혜경
구엘 공원 안에 있는 골고다 언덕 위의 돌 십자가 앞에 선 필자. 십자가는 가우디의 삶과 신앙과 건축을 꿰뚫는 상징이다. 지금은 접근이 금지되어 이곳까지 오를 수 없다. / 사진. ⓒ김혜경
두 번째 여행도 첫 번째 여행만큼이나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리는 마지막 며칠 시간을 내서 로마에 들렀다. 꼭 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무 고민 없이 휴식을 취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사달이 났다. 그때까지 잘 견뎌왔건만 로마에서 생애 처음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코로나19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우리 두 사람은 로마에서의 그 소중한 며칠을 호텔 방에서 생사를 오가는 투병을 하며 보내야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번이나 가우디를 만나고 온 뒤에도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헤밍웨이는 작가란 글을 쓰는 사람이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틈만 나면 가우디에 대해 주절거리면서도 글은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에 관한 두려움이랄까 가장 소중한 것을 맨 나중으로 미루어두는 게으름이랄까 하는 것일 수 있었다.

속절없이 또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기회가 왔다. 2024년 여름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창간한 고품격 문화예술 잡지 <아르떼>에 가우디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2025년 일 년 동안이었다. 일 년이나 가우디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2026년은 가우디가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그가 생전에 전력을 기울였던 미완의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완공되는 해이다. 역사적인 2026년을 앞두고 한 해 동안 가우디만 생각하며 그에 취해 살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다.
1926년 6월 12일에 치러진 가우디의 장례식. 수많은 스페인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러졌다. 살아서는 한없이 고독했으나 죽어서는 고독하지 않았다.
1926년 6월 12일에 치러진 가우디의 장례식. 수많은 스페인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러졌다. 살아서는 한없이 고독했으나 죽어서는 고독하지 않았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그는 카탈루냐의 거친 흙 속에, 고요한 바람 속에, 드높은 구름 속에, 그리고 동화 같은 건축물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일 년 동안 나는 가우디와 함께 걷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의 삶과 건축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묻고 또 묻고자 한다. 그와 소통하며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도 시나브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얼마나 쌓아 올렸는가?”
1882년부터 지금까지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가우디가 잠들어 있다. 대성당 앞 공원 연못 속에서 또 하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발견할 수 있다. / 사진. ⓒ김혜경
1882년부터 지금까지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가우디가 잠들어 있다. 대성당 앞 공원 연못 속에서 또 하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발견할 수 있다. / 사진. ⓒ김혜경
소설가 한강이 2014년 6월에 『작별하지 않는다』 첫 두 쪽을 쓴 후 2018년 세밑에야 그다음을 이어 쓰기 시작해 2021년 9월에 책을 출간했으니 이 소설과 자신이 묶여 있던 시간을 칠 년이라고 해야 할지 삼 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듯, 나 역시 2015년 8월 가우디를 만나러 초행길에 나선 뒤 여행 노트에 하릴없이 끄적여둔 글과 2023년 10월 가우디와 재회해 눈과 귀와 가슴에 잔뜩 담고 새겨 온 이야기보따리를 2024년 11월에서야 다시 꺼내 본격적으로 다잡아 쓰기 시작해 2025년 세밑에서나 끝마칠 예정이니 이 글의 성과를 보기까지 소요된 시간을 십 년이라고 해야 할지 일 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또 한 번 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오래 가우디를 만나러 가려 한다.
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유승준 작가


*사진: 김혜경 – 사람과 자연의 일상 속에서 근원적인 생명력을 탐구해 앵글에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진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