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있고, 뱀도 있다… 천경자 그림 속 '행복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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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김경수의 길 위의 미술관
천경자 편 ②환상 속에서라도 꽃을 쓴 신부가 되고파
2024년 11월 11일은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천경자의 삶이 녹아든 예술작품을 통해 그녀의 예술혼을 기리고자 한다.
천경자 편 ②환상 속에서라도 꽃을 쓴 신부가 되고파
2024년 11월 11일은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천경자의 삶이 녹아든 예술작품을 통해 그녀의 예술혼을 기리고자 한다.
▶ [이전 칼럼] 뱀을 그리는 여자, 천경자를 찾아 100년 전 고흥으로 시간여행
서울 누하동 시절 상호와의 행복한 날들을 꿈꾸는 천경자가 보인다. 화사한 면사포를 두르고 정답게 있는 모습을 올빼미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화가는 한구석에 독버섯을 암시처럼 그려 넣었다.
'누군가'가 서른다섯의 뱀띠라고 1편에서 말씀드렸지요. 천경자는 전남여고 교사 시절 첫 전시회를 열면서 운명의 두 번째 남자를 만납니다. 첫 개인전 기사를 써 주었던 신문 기자 김남중이에요. 천경자는 글도 잘 쓰고 이름도 잘 지어 애칭을 지어줍니다. ‘상호’라고.
삶이 혹독하던 그 시절, 먹을 것도 없던 때 동생 옥희가 사경을 헤매던 때였습니다. 인민군이 침공했다는 소문도 돌아 세상마저도 어수선할 때 김상호는 성공하라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사랑이 싹트고 그의 아이가 씨앗이 되어 커 가던 그때, 뱀 무더기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그가 서른다섯 뱀띠임을 기억하고 두 마리를 더 그립니다.
'썩은 동아줄 같다'하던 그이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다시 시작되고 아이가 또다시 배 속에 있을 때, 화가 김환기가 홍대 교수 자리를 추천합니다. 화가로 성공도 하고 싶고 광주에서는 그의 자식을 키울 자신도 없어 서울에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청파동, 사직동 셋방살이하면서도 어쩌다 바람처럼 왔다가는 그를 장미 몇 송이 들고 늦은 밤 기차역에서 기다립니다. 그의 첩실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함께 발길이 끊어집니다. 분노의 밤들은 악몽을 꾸게 합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랑한 창녀 소녀처럼 울다가 깹니다.
천경자는 그림의 원천이 꿈, 사랑, 모정이라고 해요. 정상적인 사랑은 바라지도 못했지만 쓰러져 울고만 있을 수도 없었어요. 두 남자에게서 생긴 네 아이의 핏줄이 너무나 안쓰럽고 가슴 시리도록 사랑스러워서 들판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원색적인 사랑으로 키워냅니다. 다행히 글재주도 좋아 부산 시절부터 글도 쓰고 신문과 잡지, 소설에 삽화도 그렸습니다. 가난한 가장이니까요. 단행본 수필집만도 십여 권이 넘어갑니다. 서울살이 좁은 집은 작업 공간도 허락되지 않아 동방 살롱에서 종일토록 머무르게 합니다. 이곳에서 이봉구, 박경리, 한말숙, 서정주, 노천명 등 문인들과의 교류도 많아집니다. 동방 살롱은 명동의 다방이나 문학관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업가 김동근이 1955년 문인들에게 지어준 3층짜리 건물로, 1층은 살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이었습니다. 동방 살롱은 폐허가 된 서울에서 돈 없고 집 없는 예술가들이 몰려 앉아 한 잔의 차에 종일토록 머물 수 있던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원고료를 받고, 그림이라도 하나 팔리면 한 잔 술도 나누었어요. 명동백작 이봉구,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토지>의 박경리 등의 문인과 이중섭, 천경자, 박서보 등 화가들의 아지트였지요.
강의가 없는 날, 천경자는 동방 살롱의 소위 ‘죽순이’이었습니다. 거기서 박경리 작가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 ‘바보들의 모임’도 만들죠. 박경리가 쓴 <천경자>라는 시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상범은 일본의 남화(중국의 수묵화를 받아들여 일본식 수묵화로 발전시킨 그림)를, 천경자는 일본화(일본의 전통화로, 채색이 화려하고 호분을 많이 써 파스텔 톤이 많음)를 배워 옵니다. 자연히 우리의 전통미술은 일본화와 섞이며 발전합니다. 이러한 회화 양식은 해방이 되면서 민족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왜색’으로 비판받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묵화는 남화풍의 연운, 몽롱한 테두리 처리를 없애고, 채색화는 호분 사용을 절제하는 등 왜색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그런데 일본화의 영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채색화는 지속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자, 채색 화가들은 수묵화로 전공 분야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김은호의 제자였고 <여인 삼부작>으로 유명했던 현초 이유태도 그중의 하나였지요. 같은 시기 이상범은 한국 수묵화의 전형을 이루며 인기 절정의 작가가 됐습니다. 천경자는 푸른 바다색과 고운 꽃잎의 색감에 매료되어 그 색을 표현하고자 채색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정>으로 대한미협전에서 드디어 대통령상을 받습니다. 이쯤 되면 누하동 작은 골목의 기가 얼마나 센 것인지 알 만하겠지요? 대통령상을 탔어도 화단은 채색화를 일본화로 매도하는 분위기 그대로였습니다. 두 대가를 끌어들였던 비범한 그 골목을 천경자 선생님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호. 사랑하는 그 남자는 이따금 나타나 손님처럼 지내다가 버럭 화를 내 싸우고 사라지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는 박정희 시대 참의원(당시 국회의원)이 됩니다. 하지만 9개월 참의원, 9개월 감옥살이로 옥바라지만 시키던 곳이기도 했어요. 풍파 많던 누하동을 떠나 인왕산 아랫자락 수성동계곡 밑에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합니다. 풍파가 많던 누하동을 떠나, 아카시아 향기가 그득한 인왕산 아랫자락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합니다. 은행 빚을 제하고 나니 집 마련이 어려워 간 곳인데, 다행히 2층에 3평가량의 방이 있어 화실을 꾸밀 수 있었습니다. 화실이 생기니 비가 와도 눈이 뿌려도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인왕산 물줄기가 하수도로 쿵쿵 내리는 소리, 스며드는 아카시아 꽃내음, 무엇이건 아름답게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화실 속에서 보내는 생활은 산소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꿈이 100호, 200호 크기 그림으로 쑥쑥 나오게 됩니다. 석유난로가 피식피식 타오를 때 반가운 싸락눈이라도 내려오면 미칠 것처럼 좋았고 인왕산 기슭에 눈발이 춤추면 신에게 감사를 드렸답니다. 삶은 늘 감사하기만 할까요? 누구에게나 삶의 굴곡도 있지요. 천경자도 행복했던 시절이라 했지만, 작품 속에 슬픔도 보입니다. 뱀도 있습니다. 살아낼 또 다른 힘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기쁨이 가고 뒤따르는 아픔과 슬픔은 더 농익은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 주기 위함일까요? 인왕산 눈발과 코끝에 맴도는 풀 향기, 꽃향기는 힘겨운 오늘을 예술로 승화시킵니다. 기쁨이 어린 슬픈 아름다움이 찬란한 색으로 피어납니다. 김경수 칼럼니스트
'누군가'가 서른다섯의 뱀띠라고 1편에서 말씀드렸지요. 천경자는 전남여고 교사 시절 첫 전시회를 열면서 운명의 두 번째 남자를 만납니다. 첫 개인전 기사를 써 주었던 신문 기자 김남중이에요. 천경자는 글도 잘 쓰고 이름도 잘 지어 애칭을 지어줍니다. ‘상호’라고.
삶이 혹독하던 그 시절, 먹을 것도 없던 때 동생 옥희가 사경을 헤매던 때였습니다. 인민군이 침공했다는 소문도 돌아 세상마저도 어수선할 때 김상호는 성공하라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사랑이 싹트고 그의 아이가 씨앗이 되어 커 가던 그때, 뱀 무더기들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그가 서른다섯 뱀띠임을 기억하고 두 마리를 더 그립니다.
'썩은 동아줄 같다'하던 그이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다시 시작되고 아이가 또다시 배 속에 있을 때, 화가 김환기가 홍대 교수 자리를 추천합니다. 화가로 성공도 하고 싶고 광주에서는 그의 자식을 키울 자신도 없어 서울에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청파동, 사직동 셋방살이하면서도 어쩌다 바람처럼 왔다가는 그를 장미 몇 송이 들고 늦은 밤 기차역에서 기다립니다. 그의 첩실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함께 발길이 끊어집니다. 분노의 밤들은 악몽을 꾸게 합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랑한 창녀 소녀처럼 울다가 깹니다.
천경자는 그림의 원천이 꿈, 사랑, 모정이라고 해요. 정상적인 사랑은 바라지도 못했지만 쓰러져 울고만 있을 수도 없었어요. 두 남자에게서 생긴 네 아이의 핏줄이 너무나 안쓰럽고 가슴 시리도록 사랑스러워서 들판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원색적인 사랑으로 키워냅니다. 다행히 글재주도 좋아 부산 시절부터 글도 쓰고 신문과 잡지, 소설에 삽화도 그렸습니다. 가난한 가장이니까요. 단행본 수필집만도 십여 권이 넘어갑니다. 서울살이 좁은 집은 작업 공간도 허락되지 않아 동방 살롱에서 종일토록 머무르게 합니다. 이곳에서 이봉구, 박경리, 한말숙, 서정주, 노천명 등 문인들과의 교류도 많아집니다. 동방 살롱은 명동의 다방이나 문학관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업가 김동근이 1955년 문인들에게 지어준 3층짜리 건물로, 1층은 살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이었습니다. 동방 살롱은 폐허가 된 서울에서 돈 없고 집 없는 예술가들이 몰려 앉아 한 잔의 차에 종일토록 머물 수 있던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원고료를 받고, 그림이라도 하나 팔리면 한 잔 술도 나누었어요. 명동백작 이봉구,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토지>의 박경리 등의 문인과 이중섭, 천경자, 박서보 등 화가들의 아지트였지요.
강의가 없는 날, 천경자는 동방 살롱의 소위 ‘죽순이’이었습니다. 거기서 박경리 작가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 ‘바보들의 모임’도 만들죠. 박경리가 쓴 <천경자>라는 시도 있을 정도입니다.
꿈은 화폭에 있고 / 시름은 담배에 있고 /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홍익대학교에서는 청전 이상범이 수묵화 분야를 가르치고 천경자가 채색화 분야를 맡게 됩니다.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이 이상범과 같은 골목으로 옮겨 갑니다. 각별한 사이라서 한 골목으로 이사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이 골목이 대단한 기운을 품은 곳이었나 봅니다. 한국 화단의 걸출한 두 인물을 끌어들인 것을 보면 말이죠. 전통미술은 사군자부터, 산수화, 영모화, 초충도에서 민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크게 수묵을 주로 쓴 그림과 채색을 주로 쓴 그림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근대화의 물결 속에 20세기 초반의 화가 지망생들은 서화미술협회나 서화연구회를 통해서 근대 미술교육을 받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일본 유학도 다녀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일본 교육이 최고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조선미술전람회 등단이 목표였을 테니 일본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을 겁니다.
정직한 생애 /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 박경리, 「천경자」 일부
이상범은 일본의 남화(중국의 수묵화를 받아들여 일본식 수묵화로 발전시킨 그림)를, 천경자는 일본화(일본의 전통화로, 채색이 화려하고 호분을 많이 써 파스텔 톤이 많음)를 배워 옵니다. 자연히 우리의 전통미술은 일본화와 섞이며 발전합니다. 이러한 회화 양식은 해방이 되면서 민족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왜색’으로 비판받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묵화는 남화풍의 연운, 몽롱한 테두리 처리를 없애고, 채색화는 호분 사용을 절제하는 등 왜색에서 벗어나고자 하지요. 그런데 일본화의 영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채색화는 지속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자, 채색 화가들은 수묵화로 전공 분야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김은호의 제자였고 <여인 삼부작>으로 유명했던 현초 이유태도 그중의 하나였지요. 같은 시기 이상범은 한국 수묵화의 전형을 이루며 인기 절정의 작가가 됐습니다. 천경자는 푸른 바다색과 고운 꽃잎의 색감에 매료되어 그 색을 표현하고자 채색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정>으로 대한미협전에서 드디어 대통령상을 받습니다. 이쯤 되면 누하동 작은 골목의 기가 얼마나 센 것인지 알 만하겠지요? 대통령상을 탔어도 화단은 채색화를 일본화로 매도하는 분위기 그대로였습니다. 두 대가를 끌어들였던 비범한 그 골목을 천경자 선생님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호. 사랑하는 그 남자는 이따금 나타나 손님처럼 지내다가 버럭 화를 내 싸우고 사라지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는 박정희 시대 참의원(당시 국회의원)이 됩니다. 하지만 9개월 참의원, 9개월 감옥살이로 옥바라지만 시키던 곳이기도 했어요. 풍파 많던 누하동을 떠나 인왕산 아랫자락 수성동계곡 밑에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합니다. 풍파가 많던 누하동을 떠나, 아카시아 향기가 그득한 인왕산 아랫자락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합니다. 은행 빚을 제하고 나니 집 마련이 어려워 간 곳인데, 다행히 2층에 3평가량의 방이 있어 화실을 꾸밀 수 있었습니다. 화실이 생기니 비가 와도 눈이 뿌려도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인왕산 물줄기가 하수도로 쿵쿵 내리는 소리, 스며드는 아카시아 꽃내음, 무엇이건 아름답게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화실 속에서 보내는 생활은 산소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꿈이 100호, 200호 크기 그림으로 쑥쑥 나오게 됩니다. 석유난로가 피식피식 타오를 때 반가운 싸락눈이라도 내려오면 미칠 것처럼 좋았고 인왕산 기슭에 눈발이 춤추면 신에게 감사를 드렸답니다. 삶은 늘 감사하기만 할까요? 누구에게나 삶의 굴곡도 있지요. 천경자도 행복했던 시절이라 했지만, 작품 속에 슬픔도 보입니다. 뱀도 있습니다. 살아낼 또 다른 힘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기쁨이 가고 뒤따르는 아픔과 슬픔은 더 농익은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 주기 위함일까요? 인왕산 눈발과 코끝에 맴도는 풀 향기, 꽃향기는 힘겨운 오늘을 예술로 승화시킵니다. 기쁨이 어린 슬픈 아름다움이 찬란한 색으로 피어납니다. 김경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