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황혼의 빛이 다 담긴 사카모토 류이치의 '쉐가 데 사우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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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다르지만 서로 닮은 것들
누군가와 이별할 때와 처음 맞이할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신체반응은 비슷
여명과 황혼은 빛이 닮아있지만
전하는 감정은 달라
여명의 빛은 싱그러움을,
황혼의 빛은 아쉬움을 그려내
다르지만 서로 닮은 것들
누군가와 이별할 때와 처음 맞이할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신체반응은 비슷
여명과 황혼은 빛이 닮아있지만
전하는 감정은 달라
여명의 빛은 싱그러움을,
황혼의 빛은 아쉬움을 그려내
닮았지만 다른 모호함
사카모토 류이치가 파울라·자크 모렐렌바움 부부와 낸 음반 <어 데이 인 뉴욕(A Day in Newyork)>은 브라질 출신의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을 기리기 위해 녹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빙은 우리에게 익숙한 재즈 스탠더드 넘버(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연주되는 곡)를 많이 남겼는데, 신기하게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에서도 ‘쉐가 데 사우다데(Chega de Saudade, 더 이상 그리움은 없어)’를 즐겨 듣습니다. 이 음악은 비장한 분위기로 시작했다가 밝게 전환되는 재미난 곡입니다. 가사부터 선율에 이르기까지 양가감정(兩價感情, 서로 대립되는 감정이 혼재되는 상태)을 느끼게 하는 이 고전 음악은 마치 이별의 고통과 시원섭섭함을 동시에 말하려는 것처럼 복합적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감정도 이처럼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의 슬픔’과 ‘아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기쁨’의 가슴 두근거림이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양극단에 있는 감정이었는데 말이죠. 이처럼 우리에게는 조빙의 음악처럼 종종 묘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쉐가 데 사우다데(Chega De Saudade)']
새벽의 빛, 해질녘의 빛
새벽의 빛과 해질녘의 빛은 방향은 다르지만,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그러니까 동트기 직전의 여명, 노을이 끝나가는 황혼은 가끔씩 혼동을 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구의 반대편을 여행한 이후 시차 적응 중이거나 해가 긴 여름날에 기분 좋은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저녁에는 그 혼동이 더욱 커지곤 합니다. ‘과연 지금은 해가 뜨는 것인가 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 시절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이제 막 별이 뜨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 왠지 모르게 서글퍼져서 투정을 부리거나 울적한 마음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아빠가 된 이후에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유난히 차분한 막내 아이를 제외하면, 아이들도 수십여 년 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깨어난 현재가 해돋이인지 해넘이인지 알 길이 없으니’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여명과 황혼은 둘 다 멀리서 비추는 빛을 쏟아내는 까닭에 한낮의 하늘에 비해 붉은색에 가깝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바람의 방향과 냄새, 그 시간대를 채우는 소리 등은 모두 다릅니다. 이제 곧 하늘이 밝아질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어두워질 것인지를 알고 있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여명의 새와 풀벌레 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나뭇잎도 싱그러워 보입니다.
반면에 황혼의 바람에선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묻어나죠. 구름 한 점도 없이 하늘이 맑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바람이 불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간이 더욱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나 어려운 물리학 개념을 적용할 필요도 없고, 그저 아쉬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여명과 황혼은 참 다릅니다. 꿈인가 꿈이 아닌가
올해 여름에는 뇌과학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습니다. 평생을 그 분야에 투신하는 과학자들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니, 저처럼 기초 지식이 없는 독자가 계속 읽고 지식을 쌓아봐야 한계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 가운데 잠(취침)이나 꿈에 관한 책을 특히 많이 읽었죠. 종합해보면, 우리의 뇌는 꿈 속의 상황과 실재의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꿈이 정교한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구분이 어려워질 텐데요. 저는 10대 시절부터 유난히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꿈을 자주 꿨습니다.
꿈 속에서 셔츠의 질감이나 패턴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꿈 속의 길을 걸을 때 땅의 질감 같은 미세한 차이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셉션(2010)>의 주인공 코브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토템’처럼 고유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바로 웃옷이나 바지 안쪽의 상표와 세탁 방법을 살펴보는 것인데요. 언제부터인지 꿈 속에서 옷감을 만지작거리다가 상표를 확인하면 ‘찬물세탁’, ‘표백제 금지’, ‘다림질’ 같은 자세한 표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꿈 속의 기제들이 더욱 정교해진 점을 좋아해야 할지, 새로운 구분법을 마련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평소에 꾸는 꿈은 그럭저럭 일상과 같으니 잠에서 깨어나도 별다른 영향이 없었는데, 문제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난 이후에 생겼습니다. 꿈에 거의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것처럼 선명한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꿈 속의 아버지는 늘 그 목소리 그대로 옥스포드 셔츠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채 함께 운전하거나 산책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가끔은 짙은 갈색의 스웨터나 피케 티셔츠 차림으로 바뀌곤 하죠. 도무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꿈 속의 저는 항상 말합니다. “아버지가 떠나는 꿈을 꿨어요. 이상하게 그런 꿈을 자주 꾸네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곤 갑자기 자각하고 깨어납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9년 동안 비슷하게 전개되는 꿈을 수도 없이 꿨습니다. 참 오묘합니다. 세상에는 구분하기 힘들만큼 비슷한 것이 많아 때로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빠지도록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여름의 끝자락에는 신라시대의 고분이 몰려 있는 경주만큼이나 고분군이 넓게 분포한 경북 고령군에 다녀왔습니다. 완만하고 포근해 보이는 고분이 산 전체를 휘감은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에 수백여 개의 오름이 있다면, 고령엔 고분이 있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경주가 그렇듯, 고령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있고 아주 가까운 곳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고분군이 위치합니다.
장묘 문화가 변화하면서 매립식 묘원 자체를 찾아보기도 힘든 시대이지만, 어쩐지 한국의 많은 도시 중에는 무덤을 품고 있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많은 국가가 묘지를 가까이 둔 것과는 대조적이죠. 물론 문화적 차이일 뿐, 무엇이 더욱 바람직한 방향인가에 관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주 가끔씩이라도 경주와 고령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를 방문한다면,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일상에 관해 고마움을 느끼는 계기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죽은 자의 도시를 살아가는 것인지 산 자의 도시에 죽은 자가 묻혀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일이 어렵고 또 그렇게 구분 지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모호한 일이 참 많습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가 파울라·자크 모렐렌바움 부부와 낸 음반 <어 데이 인 뉴욕(A Day in Newyork)>은 브라질 출신의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을 기리기 위해 녹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빙은 우리에게 익숙한 재즈 스탠더드 넘버(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연주되는 곡)를 많이 남겼는데, 신기하게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에서도 ‘쉐가 데 사우다데(Chega de Saudade, 더 이상 그리움은 없어)’를 즐겨 듣습니다. 이 음악은 비장한 분위기로 시작했다가 밝게 전환되는 재미난 곡입니다. 가사부터 선율에 이르기까지 양가감정(兩價感情, 서로 대립되는 감정이 혼재되는 상태)을 느끼게 하는 이 고전 음악은 마치 이별의 고통과 시원섭섭함을 동시에 말하려는 것처럼 복합적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감정도 이처럼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의 슬픔’과 ‘아이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기쁨’의 가슴 두근거림이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양극단에 있는 감정이었는데 말이죠. 이처럼 우리에게는 조빙의 음악처럼 종종 묘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쉐가 데 사우다데(Chega De Saudade)']
새벽의 빛, 해질녘의 빛
새벽의 빛과 해질녘의 빛은 방향은 다르지만,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그러니까 동트기 직전의 여명, 노을이 끝나가는 황혼은 가끔씩 혼동을 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구의 반대편을 여행한 이후 시차 적응 중이거나 해가 긴 여름날에 기분 좋은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저녁에는 그 혼동이 더욱 커지곤 합니다. ‘과연 지금은 해가 뜨는 것인가 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 시절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이제 막 별이 뜨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 왠지 모르게 서글퍼져서 투정을 부리거나 울적한 마음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아빠가 된 이후에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유난히 차분한 막내 아이를 제외하면, 아이들도 수십여 년 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깨어난 현재가 해돋이인지 해넘이인지 알 길이 없으니’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여명과 황혼은 둘 다 멀리서 비추는 빛을 쏟아내는 까닭에 한낮의 하늘에 비해 붉은색에 가깝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바람의 방향과 냄새, 그 시간대를 채우는 소리 등은 모두 다릅니다. 이제 곧 하늘이 밝아질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어두워질 것인지를 알고 있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여명의 새와 풀벌레 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나뭇잎도 싱그러워 보입니다.
반면에 황혼의 바람에선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묻어나죠. 구름 한 점도 없이 하늘이 맑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바람이 불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간이 더욱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나 어려운 물리학 개념을 적용할 필요도 없고, 그저 아쉬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여명과 황혼은 참 다릅니다. 꿈인가 꿈이 아닌가
올해 여름에는 뇌과학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습니다. 평생을 그 분야에 투신하는 과학자들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니, 저처럼 기초 지식이 없는 독자가 계속 읽고 지식을 쌓아봐야 한계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 가운데 잠(취침)이나 꿈에 관한 책을 특히 많이 읽었죠. 종합해보면, 우리의 뇌는 꿈 속의 상황과 실재의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꿈이 정교한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구분이 어려워질 텐데요. 저는 10대 시절부터 유난히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꿈을 자주 꿨습니다.
꿈 속에서 셔츠의 질감이나 패턴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꿈 속의 길을 걸을 때 땅의 질감 같은 미세한 차이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셉션(2010)>의 주인공 코브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토템’처럼 고유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바로 웃옷이나 바지 안쪽의 상표와 세탁 방법을 살펴보는 것인데요. 언제부터인지 꿈 속에서 옷감을 만지작거리다가 상표를 확인하면 ‘찬물세탁’, ‘표백제 금지’, ‘다림질’ 같은 자세한 표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꿈 속의 기제들이 더욱 정교해진 점을 좋아해야 할지, 새로운 구분법을 마련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평소에 꾸는 꿈은 그럭저럭 일상과 같으니 잠에서 깨어나도 별다른 영향이 없었는데, 문제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난 이후에 생겼습니다. 꿈에 거의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것처럼 선명한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꿈 속의 아버지는 늘 그 목소리 그대로 옥스포드 셔츠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채 함께 운전하거나 산책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가끔은 짙은 갈색의 스웨터나 피케 티셔츠 차림으로 바뀌곤 하죠. 도무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꿈 속의 저는 항상 말합니다. “아버지가 떠나는 꿈을 꿨어요. 이상하게 그런 꿈을 자주 꾸네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곤 갑자기 자각하고 깨어납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9년 동안 비슷하게 전개되는 꿈을 수도 없이 꿨습니다. 참 오묘합니다. 세상에는 구분하기 힘들만큼 비슷한 것이 많아 때로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빠지도록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여름의 끝자락에는 신라시대의 고분이 몰려 있는 경주만큼이나 고분군이 넓게 분포한 경북 고령군에 다녀왔습니다. 완만하고 포근해 보이는 고분이 산 전체를 휘감은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에 수백여 개의 오름이 있다면, 고령엔 고분이 있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경주가 그렇듯, 고령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있고 아주 가까운 곳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고분군이 위치합니다.
장묘 문화가 변화하면서 매립식 묘원 자체를 찾아보기도 힘든 시대이지만, 어쩐지 한국의 많은 도시 중에는 무덤을 품고 있는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많은 국가가 묘지를 가까이 둔 것과는 대조적이죠. 물론 문화적 차이일 뿐, 무엇이 더욱 바람직한 방향인가에 관해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주 가끔씩이라도 경주와 고령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를 방문한다면,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일상에 관해 고마움을 느끼는 계기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죽은 자의 도시를 살아가는 것인지 산 자의 도시에 죽은 자가 묻혀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일이 어렵고 또 그렇게 구분 지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모호한 일이 참 많습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