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화오션의 美해군 MRO 수주
“배를 만들자”고 뜻을 세웠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에겐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다. 1971년 차관 도입을 위해 찾은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은 단칼에 거절했다. 정 회장은 굴하지 않고 선박 컨설팅사인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텀 회장을 만났다. 고개를 가로젓는 그에게 정 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소.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요”라고 설득했다. 결국 롱바텀 회장의 추천으로 차관을 얻을 수 있었다.

충무공 덕을 톡톡히 본 K조선의 시작이다. 정 회장의 장담대로 그 후 K조선은 잠재력을 분출하며 세계시장을 호령했다. 중국의 물량 공세 속에 올해 1분기에는 세계 1위 자리를 되찾기도 했다. 세계 조선소 1~3위도 우리 기업(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이 차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꺼낸 말은 뜻밖에도 조선업과 군함 건조·수리 협력 요청이었다. 한국과의 현안이라고 보좌진이 챙겨줬을 수도 있고,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의 인연으로 1998년 대우 옥포조선소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은 영향일 수도 있다. 세계 최강 해군을 보유한 미국이 K조선에 ‘SOS’를 친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군함 건조 사업이 들어가는 품에 비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지난해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한화오션을 출범시키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글로벌 방위산업 시장 성장과 함께 방산에 강점이 있는 한화가 힘을 쏟자 현대중공업도 맞불을 놓는 모양새다. 한국형 차기 구축함 사업에 이어 해외 잠수함 사업 수주를 놓고 양사가 ‘혈투’를 벌이고 있다. 함정 유지·수리·정비(MRO)사업에선 한화오션이 올해 미 7함대가 발주한 두 건을 모두 수주하며 선수를 쳤다. 지난 6월엔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 인수 계약을 통해 군함 수주를 위한 준비까지 끝냈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 뛰어난 조선업 파트너가 필요한 미국이다. 양사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트럼프의 ‘K조선 러브콜’에 함께 올라타길 기대한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