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타도 언젠가 대중들에게 잊히듯 공연 예술도 쇠락을 거듭한다. 때로는 아예 명맥이 끊기는가 하면, 오래전 유행했던 공연이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 음악극 여성국극이 그런 예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은 짧은 전성기를 누린 후 빠르게 쇠락했고, 간헐적으로 공연이 열리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오랜 시간 외면받은 여성국극이 올해 예기치 못하게 재조명 받고 있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정년이>가 인기를 끌면서 판소리뿐 아니라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은 것. 70년 간 잊혔다가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여성국극의 역사는 하나의 공연 같은 이야기다.

희미해져 가던 여성국극의 기억을 되살린 <정년이>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정년이'로 70년 만에 돌아왔다
올 연말 안방가 최고 화제작은 <정년이>다. 1950년대 시골 장터에서 소리를 팔던 주인공 '정년이'가 부자가 되기 위해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최고의 국극 스타가 되는 성장기를 그린다. 우리 전통 소리와 음악의 매력을 잘 녹여내면서, 탄탄한 서사가 합쳐져 인기몰이 중이다. 정년이 역을 맡기 위해 3년간 소리 훈련을 받은 김태리를 포함해 주·조연배우들의 완성도 높은 소리꾼 연기도 인기 비결 중 하나. 지난 10월 12일 처음 공개된 이후 11월 10일에는 전국 시청률 14.1%를 달성했다.

OTT 시장에서 인기몰이는 더욱 돋보인다. 지난 5일 기준 글로벌 OTT 서비스인 디즈니+ 글로벌 TV 프로그램 부문 세계 6위에 올랐다. 한국뿐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세계 각지에서 같은 부문 1위, 일본에서는 4위에 올랐다.

외신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미국 포브스지에서도 <정년이> 열풍을 조명하며 여성국극을 소개했다. 싱가포르 매체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와 인도 매체 발리우드 헝가마까지 <정년이>를 호평했다. 원작 만화를 두고 해외에서도 판권계약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의 기억에도 희미해져가던 전통 공연 양식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성국극이 이렇게 재조명받기까지 여성국극은 드라마만큼이나 파란만장한 흥망성쇠를 거쳐왔다.

짧고 굵었던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 전성시대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정년이'로 70년 만에 돌아왔다
여성국극은 창극의 한 갈래다. 창극은 우리나라 전통 음악극이다. 연극처럼 이야기를 전하면서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 연주가 얹혀진 형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오페라에 비유되기도 한다.

여성국극은 창극과 형식은 같지만, 여자 소리꾼만 등장한다는 게 차이점이다. 남자 역할까지도 여자 소리꾼이 남장하고 남녀 역할을 모두 맡는다. 배우가 성별에 상관없이 배역을 맡는 '젠더프리' 공연인 셈이다.

전통 공연 장르지만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8년 국악원에서 박록주 명창을 필두로 여성 단원 30여 명이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면서 시작했다. 1948년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끈 여성국극은 6·25전쟁 중에도 공연하는 등 기세를 이어갔다.

여성국극은 화려한 무대 장치와 춤·연기·노래까지 합쳐진 공연으로 수많은 열성 팬을 만들었다. 당시 '오빠 부대'라고 불리는 광팬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여성 관객들도 남장 배우들을 만나기 위해 밤을 지새고 선물을 주는 팬클럽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아이돌 문화에 뒤처지지 않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엄청난 인기는 되레 독이 됐다. 여성국극 열풍에 편승해 지나치게 많은 단체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구성원 간 분열로 여성국악동호회가 해체된 이후 주요 단원들이 모여 세운 햇님국극단을 포함해 여성국악동지사, 여성국극협회, 삼성창극단 등이 설립됐다. 최전성기였던 1955년에는 무려 12개의 여성국극단체가 활동했고, 1948~1969년 사이에 무려 25개 정도의 단체들이 활동했다.

문제는 급속도로 늘어난 단체 수에 비해 제대로 우리 전통 소리 훈련을 받은 소리꾼은 부족했다는 점. 단체와 공연 수만 늘고 출연진의 실력은 하향 평준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시대의 흐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5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영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TV가 보급됐다. 영화, TV 등 다른 대중문화 콘텐츠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여성국극은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문제점으로는 고리타분한 주제가 꼽혔다. 당대의 시대적인 주제 대신 오래전부터 무대에 올랐던 우화적인 이야기를 답습했다. 대중이 영화와 TV 방송으로 다채로운 영상과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옛날 옛적 왕자님과 공주님' 이야기에 머물렀던 여성국극은 대중들에게 빠르게 외면 받고 갔다.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여성국극을 이끌었던 음악인들도 다시 전통 소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에서 후학 양성도 미진해 사실상 대가 끊겼다. 80년대 이후 과거 여성국극을 했던 국악인들이 다시 공연을 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홍성덕을 중심으로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가 설립돼 1년에 한 편 공연을 열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빠르게 쇠퇴한 짧고 굵은 전성기가 끝났다.

만화는 공연으로, 공연은 드라마로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정년이'로 70년 만에 돌아왔다
잊혀가는 장르였던 여성국극이 다시 조명받게 된 계기는 만화였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의 원작 만화 <정년이>는 서이레 만화가가 2019년부터 2022년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한 온라인 연재만화다. 주제 선정부터 작품의 완성도까지 호평받으며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다.

단단한 여성 서사가 특히 호평받았다. 선악 갈등 대신 당대 여성들의 성공을 향한 열망과 꿈을 그리기 위한 연대를 세련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하는 '오늘의 우리의 만화상',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콘텐츠상을 받았다.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정년이'로 70년 만에 돌아왔다
만화의 인기 덕분에 <정년이>는 실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국립창극단이 2023년 3월 17일부터 29일까지 선보인 창극 <정년이>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관객을 만났다.

이 작품은 여성 배우뿐 아니라 남자 소리꾼도 등장해 여성국극이 아닌 창극으로 분류됐다. 원작 만화 속에서 여성으로 등장하는 패트리샤라는 캐릭터를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이에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색과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비판이 일면서 SNS상에서 공연 불매를 촉구하는 글이 퍼지기도 했다.

작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공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정년이>가 무대에 오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200석이 공연 시작 20일 전부터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공연 시작 전 안내 방송 멘트는 “명절 귀성 표보다 더 구하기 힘들다는 창극 정년이 표를 구하신 관객 여러분…”으로 시작할 정도였다. 웹툰, 창극, TV 드라마까지 이어진 <정년이>의 흥행은 우리 소리와 여성국극이 현대 관객에게도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방증이 됐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 … 분주해진 국악계
'0세대 아이돌' 여성국극…'정년이'로 70년 만에 돌아왔다
'정년이 열풍'이 불자 국악계도 술렁이고 있다. 창극을 포함해 우리 전통 공연 예술로까지 관심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퍼지면서다. 지난 10월 31일 창극 <이날치전> 기자간담회에서 유은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겸 단장은 "<정년이> 작중 등장하는 캐릭터 연구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갖춰야할 균형과 자세는 본받을만해 국립창극단원들 모두가 <정년이>를 봤으면 좋겠다"며 "<정년이>를 통해 창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높아진 관심을 기회 삼아 실제로 여성국극 공연도 열릴 예정이다. 과거 여성국극 전성기를 이끌었던 원로 배우들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 12월 3일 여성국극 특별 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이 무대에 오른다. '여성국극 2세대'로 불리는 홍성덕(80), 이옥천(78), 허숙자(85), 이미자(79), 남덕봉(79) 등 원로 배우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원로배우의 토크 콘서트가 진행된다. 2부에서는 여성국극 '선화공주'가 이어진다. '선화공주'는 1950년대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 레퍼토리로 백제의 서동과 선화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는 이야기다. 공연은 12월 3일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다.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