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연주자의 리사이틀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2년간의 대장정이 될 그의 모차르트 프로젝트를 응원하고자 찾은 발걸음이었다. 하우스콘서트(하콘) 무대에서 들려준 연주와 그동안 나눈 대화의 결로만 보아도 그 깊이가 가늠되는 좋은 연주자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콘이 모르는 좋은 연주자들이 아직 많다는 방증이기도 해 미안한 마음마저 들곤 했다. 그 의미는 곧 팬덤이 있거나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연주자는 아니라는 뜻일 테다.

공연이 시작되기 10분 전, 객석에 착석한 나는 왠지 낯선 곳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늘 제자나 가족, 친구들로 객석이 가득 차던 오늘의 이 공간은 소수의 관객만이 자리해 대략적인 수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초대를 하지 않았구나.’

객석에 앉은 소수의 사람이 모두 유료 관객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연주자의 그 단호한 결심이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 사람의 유료 관객으로서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힘찬 박수를 보냈다.
하우스콘서트의 관객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하우스콘서트의 관객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초대권이 없는 하우스콘서트

하우스콘서트에는 초대권이 없다. 지인들이 초대받아 오는 것이 아닌, 비록 소수일지라도 연주자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진짜’ 관객들과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객석의 집중도는 좋을 수밖에 없고, 연주자들도 찾아준 관객들에게 더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것이 음악의 완성도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럽고 건강한 연결고리가 초대권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음악계에 안착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봉착한 난관은 물론 관객이 적을 때다. 초대가 있었다면 가득 채울 수 있었겠지만, 원칙을 지키느라 10명도 채 되지 않는 관객을 놓고 공연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기획자로서 잠깐은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음악계의 현실을 더 정확하게 마주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스타 연주자가 아니라면 객석을 채우기 어렵다는 현실 말이다.
[위] 소수의 관객과 함께한 공연 [아래] 2017년 피아니스트 안종도의 하우스콘서트 - 22명의 관객이 함께했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위] 소수의 관객과 함께한 공연 [아래] 2017년 피아니스트 안종도의 하우스콘서트 - 22명의 관객이 함께했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이보다 더 어려운 건 연주자 본인이 초대를 원할 때였다. 초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요청하는 연락을 받을 때면 ‘죄송하지만 저흰 초대권이 없어서…’라며 운을 띄우곤 했는데, 때때로 우리가 괜한 고집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대체로는 ‘아, 그렇군요’ 하고 받아들여졌지만 가끔은 난색을 보이는 연주자도 있었다. 개런티도 뻔한 공연에 안 된다고 하니 팍팍하게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조금 느슨한 시기도 있었다. 초대권은 없다고 말하는 우리의 입장도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 공연에 두 자리까지는 초대가 가능한 걸로 계획을 바꿔보았더니, 이번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한 공연에 두 자리였지만, 연주자들은 대체로 한 사람당 두 명까지 초대가 가능한 걸로 생각해 여섯 명이 앙상블로 출연하는 날에는 초대 리스트가 열두 명이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 공연 당 두 자리라는 점을 재차 설명하며 서로가 난감한 일이 반복됐다. 원칙에서 조금 물러서려던 타협점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저 돈 내야 돼요?

초대권 없는 하우스콘서트로 다시 돌아왔어도 부딪혀야 하는 어려움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연주자가 초대하고 싶은 인원만큼 티켓을 사는 경우가 그중 하나다. 가능하면 오는 분들이 직접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안내를 해보지만, 사전 예약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로는 그것까지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게 됐다.

가장 잦고 어려운 상황은 공연 현장에 와서 초대권을 기다리는 경우다. 하우스콘서트는 실물 티켓이 없어 예약한 관객들이 안내 데스크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후에 입장하게 되어 있다. 대체로 공연 직전에 관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날은 명단에서 이름을 빠르게 확인하고 입장 안내를 도와야 하는데, 가끔 해당 연주자들의 지인이나 가족들이 예약하지 않은 채로 현장에 와 명단에 있을 리 만무한 자신의 이름을 찾으며 뒷사람의 입장을 가로막는다.

그럴 때면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닌 스태프들이 친절하게 웃으며 “예약자 명단에는 없네요. 입장료는 3만원입니다.”라고 안내하는데, 그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마지못해 입장료를 내는 사람, 입장료를 내기 싫어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람, 복도에서 듣겠다는 사람, 연주 직전의 연주자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 대기실로 직접 찾아가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로 입장료 3만 원에 대처한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연주자의 지인으로 온 어느 유명 젊은 연주자의 한마디다.

“저 돈 내야 돼요?”

하우스콘서트 초창기부터 끈질기게 노력한 초대권 없는 공연 만들기의 노력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다. 하우스콘서트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은 이제 여러 설명 하지 않아도 초대권 없는 공연에 기꺼이 동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고 긴 과정에서 때론 타협도 해보고, 때론 고민하며 현재의 하우스콘서트를 만들었다.
하우스콘서트의 관객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하우스콘서트의 관객들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오래전 박창수 선생님의 부모님이 아들의 공연에 오며 꼭 입장료를 내시던 모습을 보던 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역시 자연스럽게 체득해왔다. 연주자들이 가끔 공연 초대의 메시지를 보내올 때면 직접 예약하는 것으로 화답해 온 것도 나름의 노력이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리사이틀을 앞두고, 초대권에 대한 과감한 결정을 내려 행동으로 보여준 연주자의 SNS 글 일부를 덧붙인다. 하우스콘서트가 초대권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실천으로 옮겨온 것처럼 이 연주자의 작은 실천이 부디 오래 지속되기를, 앞으로는 더 많은 ‘진짜’ 관객들로 채워지기를, 그러한 노력이 또 다른 연주자들로, 또 음악계로 천천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번 연주회에 관객석이 가득 차지는 않았을지언정, 처음 뵙는 여러 낯선 분들과 눈 맞추며 내게 정성을 다해 보내주시던 힘찬 박수와 진심 어린 찬사는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떻게들 알고 오셨는지 경로가 모두 궁금했지만, 그 역시 서로에 대한 신비로움 내지는 호기심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내 연주회에 참석할 날만을 기다려왔다는 이야기만큼 가슴 뛰는 일도 없다. 다음번에는 더 좋은 연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나는 내 음악을 정말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분들과만 은밀히 공유하고 싶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확실히 보답할 생각이고. 몇 년간 국내에서 여러 차례 무대에 서며 겪어온 내적 갈등 끝에 찾은 최선의 방법이다. 음악에 대한 순수함과 연주자로서 본분을 한결같이 지키기 위해서는 다소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연주자는 언제나 좋은 연주로 증명해야 하고, 나 자신과 청중에게 늘 떳떳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양윤희
하우스콘서트에서의 피아니스트 양윤희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하우스콘서트에서의 피아니스트 양윤희 / 사진.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