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당선 날 '거래 정지'…발칵 뒤집힌 '한국 주식' 뭐길래 | 공시탐구생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2차전지주 수난시대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이 일찌감치 확정된 지난 6일부터 2차전지주 주가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앞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전기차 세액공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혀왔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6일 대선 당일 주가가 떨어지지 않은 2차전지주가 있었습니다. 코스닥 시가총액 7위 기업 엔켐입니다. 주가를 방어한 것은 아닙니다. 하필 이날 하루 엔켐은 공교롭게도 거래정지가 됐습니다. 한국거래소가 엔켐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코스닥 시총 7위 ‘거래정지’
지난 5일 거래소는 엔켐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하고 6일 주식매매를 거래정지한다는 공시를 했습니다. 거래소는 엔켐에 벌점 9점을 부과했습니다. 코스닥 상장사는 벌점을 8점 이상 받으면 다음날 하루 거래가 정지됩니다.
거래정지 조치가 내려진 이유는 엔켐이 해야 하는 공시를 10건이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래소와 엔켐에 따르면 오정강 엔켐 대표는 지난해부터 최대주주 변경을 수반하는 주식 담보제공 계약을 체결했으나 이를 신고기한 내 공시하지 않았습니다.
최대주주 변경을 수반하는 주식 담보제공 계약이란 담보로 잡은 주식을 모두 빼앗길 경우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는 계약을 뜻합니다. 그만큼 대출 규모가 크다는 뜻이겠죠.
공시에 따르면 오 대표가 담보로 잡힌 엔켐 주식은 306만8181주로, 오 대표가 보유한 엔켐 주식 수(312만8643주)의 98.1%에 달합니다. 채무는 약 1700억원으로 담보권을 전부 실행하면 남는 주식 수는 6만여 주, 지분율 0.29%밖에 안 됩니다.
상장사 지분 5% 이상을 갖고 있는 주주는 지분 변동이 있을 때 공시를 해야 합니다. 이들은 주식 담보대출처럼 주식과 관련된 계약을 맺어도 공시 의무가 있습니다. 주식 담보대출을 받았다가 갚거나, 대출을 연장하거나 추가로 받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지분이 바뀌지 않아도 향후 기한 내 지분이 변동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 하락하면 증권사가 반대매매를 할 수도 있지요.
엔켐 공시에 따르면 오 대표는 지난해 2월 메리츠증권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위해 보유한 엔켐 주식을 담보로 제공했습니다. 이 때는 2대 주주였지만, 지난해 4월 기존 최대주주인 브라만피에스창인신기술사업투자조합 제1호가 지분을 매도하면서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오 대표가 이후 대출을 추가로 받기 위해 더 많은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고, 담보로 제공한 상환전환우선주(RCPS)가 보통주로 바뀌면서 담보 주식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최근 공시된 엔켐의 기업실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 대표는 대출금 중 약 393억원은 회사의 사업확장 등에 사용하고, 약 1432억원은 대출을 상환하거나 주식을 다시 인수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지분을 늘린 셈입니다.
자꾸만 바뀌는 공시…거래소 조치 늦어졌다
엔켐이 이 사실을 처음 알아차리고 공시를 낸 시기는 지난 9월입니다. 그러나 5일 거래소가 거래정지 조치를 내리기까지 약 2개월이 걸렸습니다. 절차가 상당히 지연된 것입니다.상장사가 공시를 번복하거나 규정을 불이행하면 거래소가 우선 사안을 파악한 후 ‘불성실공시법인의 지정예고’를 합니다. 상장사는 이후 7일 동안 이의 신청을 할 수 있고, 이 기간이 끝나면 거래소는 열흘 안에 위원회를 열어 심의를 해야 합니다.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및 거래정지 여부는 심의한 날로부터 3일 안에 결정됩니다.
엔켐은 9월 초 미공시 10건을 이실직고하는 공시를 올렸지만, 9월 말까지 2차례 정정을 거쳤습니다. 미이행 건수가 많았고 10월에 법정 공휴일이 다수 있었던 탓인지, 거래소는 당초 10월 29일이었던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여부 발표를 11월 5일로 미뤘습니다. 결과적으로 미 대선날 엔켐 주식 거래가 정지됐지요.
미 대선 다음날인 7일 엔켐 주가는 9.28% 폭락했습니다. 이날 다른 2차전지주보다 낙폭이 컸습니다. 주가에 대한 판단은 투자자마다 다르겠지만, 미 대선 같은 중요한 날 거래가 멈추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투자자의 몫이 됐습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