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국회 상임위원회의 내년도 예산안 예비심사 과정에서 대규모 증액을 요구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내년 예산을 올해(656조6000억원)보다 3.2%(20조8000억원) 늘린 677조4000억원으로 편성했는데, 정치권 증액 요구를 모두 반영하면 예산 총지출 증가율이 이보다 최소 1%포인트 이상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정감사 등을 이유로 이달 들어서야 시작한 ‘부실 늑장심사’와 함께 선심성 사업을 앞세운 무리한 증액 요구로 예비심사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민 전기료 지원·지방도로 건설…표 의식한 예산증액 벌써 8.6조

요구 반영하면 예산 4.4% 늘려야

17일 국회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15일까지 17개 상임위 중 보건복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 국토교통,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 국방, 외교통일, 법제사법 등 7개 상임위가 전체회의에서 내년 예산안 예비심사 보고서를 채택했다. 국회법 84조에 따르면 상임위는 예비심사 결과를 국회의장에게 보고한 후 의장은 심사보고서를 첨부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회부해야 한다.

외교부 예산안이 가결되지 않은 외교통일위를 제외한 6개 상임위가 요구한 내년도 예산 순증액은 8조5913억원(증액 9조3325억원-감액 7412억원)에 달한다. 순증액 기준으로 보면 보건복지위가 2조9720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농해수위(2조4762억원) 국토교통위(1조4701억원) 산업위(1조492억원) 순이었다. 검찰 특수활동비 80억원과 특정업무경비 507억원 등 법무부 예산을 대폭 삭감한 법사위만 384억원 순감했다.

이들 6개 상임위가 요구한 증액안이 모두 반영되면 내년 예산은 686조원가량으로 늘어난다. 올해 대비 예산 증가율은 4.5%에 달해 건전재정 기조가 무색해진다. 남은 11개 상임위까지 추가되면 순증 요청 규모는 지난해(12조원)를 웃돌 전망이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핵심 공약인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사업 예산을 행정안전위에서 대폭 증액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2022년부터 3년 연속 지역화폐 국비 지원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

지방인프라·농어민 지원 예산 증액

사업별로 보면 전기료 및 재해대책비 등 농어민 지원금과 지역 철도·도로 분야 예산이 대거 증액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 지역 표심을 의식해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사용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농업인 부담 경감을 위한 예산 2196억원이 신규 편성됐다. 시설농가 면세유 유가연동보조금 한시 지원과 도축장 전기료 인상분 한시 지원을 위한 예산도 각각 119억8000만원, 400억원 신규 반영됐다. 농작물 피해에 따른 재해대책비는 1200억원 증액됐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내년도 핵심 사업으로 제시한 농업수입안정보험은 정부 편성안(2078억원) 중 1119억원이 감액됐다.

국토위를 통과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중 교통시설특별회계에 반영된 철도 예산이 7000억원가량 늘어났다. 신안산선 복선전철 민간투자사업(529억원), 광주도시철도 2호선 건설(500억원), 서해선 소사~원시 구간 신호시스템 개량(480억원) 등 조만간 개통하는 노선 위주로 증액됐다. 고속철도 예산도 호남고속철도(277억원)와 인천발(70억원) 및 수원발(53억원) 고속철도가 증액됐다. 지방도로 건설을 위한 용역 예산은 수억원씩 20건 이상 늘어났다.

상임위 예비심사를 통과했다고 해서 증액된 예산이 그대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결특위 본심사를 거쳐야 하는 데다 예산 증액을 위해선 국가재정법 69조에 따라 정부 동의를 받아야 한다. 다만 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이 핵심 사업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에 일부 양보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