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재 작가(오른쪽)와 제이슨 하울랜드(왼쪽)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김희재 작가(오른쪽)와 제이슨 하울랜드(왼쪽)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그 당시에 너무 가진 게 많았잖아요. 기업도 잘 크고 있었고, 가정도 있었죠. 그런데 왜 50세에 총 쏘는 걸 배워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선택을 했을까. 내면의 변화, 선택하기까지의 갈등에 초점을 맞췄어요."

일제 치하였던 1945년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OSS(미국 CIA 전신)가 비밀리에 준비한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인 19명. 자신의 모든 인생과 신분을 버리고 작전에 투입된 이들 중에는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가 있었다. 50세의 나이로 독립운동가를 자처한 그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탄생했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가 개막했다. 작품은 독립운동가로서의 결정적인 선택을 한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 '실미도'로 천만 관객 시대를 연 김희재 작가가 브로드웨이 스타 작곡가 제이슨 하울랜드와 손잡고 첫 뮤지컬에 도전했다. 작품은 3년여에 걸친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거쳐 마침내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최근 공연장에서 만난 김희재 작가는 자신을 "냅코 프로젝트가 뮤지컬화 하는 과정에서 제일 많이 준비된 창작자"라고 지칭했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유일한 박사에 관한 콘텐츠를 여러 형태로 만들어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고, 광복절이나 3·1절에 독립운동에 관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서 플래시몹으로 릴리즈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작가는 "유일한 박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러한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게 놀라웠다. '진짜 에이전트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응축된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인물이자 사건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독립운동을 당연하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당연한 게 아니라 그들이 버리고 선택해야 했던 많은 부분에 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신경을 썼다"고 전했다.

작업 과정은 유독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실화와 창작의 사이에서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다. 작품 속 실화의 비중은 15~20% 정도로, 김 작가는 "실제 사건 자체가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사업하던 걸 정리하고 들어와서 냅코 프로젝트에 합류했다는 것만 가져왔고, 디테일한 건 전부 다르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위인전처럼 보이지 않도록", "용비어천가가 되면 안 된다" 등의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한 김 작가였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시대의 뮤지컬 무대에 어울리는 이야기여야 하고,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성을 살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실제 유일한 박사님이 이 뮤지컬을 보고 '난 저러지 않았는데?'라고 할 정도의 창작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인물 내면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업가로서 무언가를 해냈고, 기업을 이뤘다는 내용 등은 극 속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알려진 유일한 박사와는 다른 창작물이 됐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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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굳이 뮤지컬이어야 했을까. 김 작가는 '실미도' 외에도 '공공의 적2', '한반도', '국화꽃 향기' 등 영화 쪽에서 활약해 왔다. 그는 "영화로 가면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던 건 맞다"라면서도 음악이 있는 뮤지컬 무대의 '생명력'이 이 작품에는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영화에서는 캐릭터들이 내면의 갈등을 대상화해서 얘기하진 못한다. 영화가 사건을 통해 증명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뮤지컬은 내면의 갈등을 노래할 수 있지 않냐.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들려줄 수 있다. 또 무대가 끝나도 넘버가 계속해 사랑받을 수 있으니 생명력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한 번 소비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오래도록 계속해 남아있었으면 해서 처음부터 뮤지컬로 기획했다"고 밝혔다.

첫 뮤지컬 도전이지만 사실 김 작가가 대학생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장르가 바로 뮤지컬이었다. 오랜 시간 무용을 해왔지만 뮤지컬의 매력에 끌려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더뮤지컬'이라는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김 작가는 "이야기를 짓는다는 점에서는 내 작업의 연장선이지만, 새로운 매체에 대한 문법은 늘 겸손한 자세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몸담았던 필드랑 너무 달라서 힘들어 죽겠다"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어 준 존재가 바로 제이슨 하울랜드였다. 제이슨 하울랜드는 그래미 어워즈에서 오리지널 캐스트 앨범상을 받고, 토니상 후보에도 오른 브로드웨이 스타 작곡가다. 국내에서도 '지킬 앤 하이드', '데스노트', '웃는 남자' 편곡자로 잘 알려져 있다.

김 작가는 "제이슨은 나의 좋은 선생님"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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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하울랜드는 "제안받고 아주 신중하게 생각했다"면서 "작곡가로서 가장 중요한 건 나와의 공감 포인트인 것 같다. 또 더 큰 세계와도 공감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면서 "이 작품의 중심에 실존 인물이 있고, 실제 갈등과 텐션을 잘 보여주고 있었고, 그 사람을 둘러싼 사건이 크게 느껴져서 매료됐다. 한국 역사의 특정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10년간 편곡자로 일하면서 한국 시장에 대해 많이 학습한 걸 가지고 작곡가 도전에 뛰어들 수 있었다"면서 "공연에서 음악의 역할은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스토리를 잘 서포트하는 거다.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시대, 이야기의 성격,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방식 세 가지가 충족됐던 덕분에 특정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사진=컴퍼니연작, 올댓스토리 제공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에는 약 1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김 작가는 "쇼도 많고, 액션도 많다. 여기에 제이슨의 음악이 확실히 무게감을 잡아주고 있다"고 전했다.

2003년 영화 '실미도' 개봉 당시 경쟁작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었다. 김 작가는 "그때 다들 '미쳤냐'는 말을 했다. 개봉일을 바꾸라고 그랬다"며 웃었다. 이번 역시 '알라딘', '지킬 앤 하이드', '마타하리' 등 연말 대작들과 맞붙는다.

김 작가는 "창작 초연이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지니까 위험할 수 있고 흥행이 안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좋은 작품들과의 경쟁 속에서 뮤지컬계에 대한 관심이 전체적으로 높아질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모두가 위너가 될 만큼 뮤지컬을 사랑하는 분들이 다 같이 작품을 보는 훈훈한 연말이 됐으면 한다. '2024년 연말에 뮤지컬이 풍성했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 만한 시장이 되길 감히 바라본다"며 미소 지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