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옷이 무척이나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가히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그 어떤 국가보다 득세하는 곳입니다.

수도 서울, 특히 동대문은 어떤 공간인가요? 한국 패스트 패션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죠. 디자인에서 봉제까지 하나의 옷이 하루 만에도 빠르게 만들어지는 동대문 한복판에 지금 그 공간의 근간인 ‘옷’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패스트 패션의 성지(聖地)에서 슬로우 패션(Slow Fashion)을 외치는 용감한 전시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요?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구름' / 제공. 이음해시태그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구름' / 제공. 이음해시태그
이 전시의 공식 타이틀은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입니다. 미나 페르호넨. 언뜻 북유럽 어딘가에 살고 있는 여성 이름 같지만, 실은 실존하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브랜드 이름이죠. 핀란드어로 '미나(minä)'는 '나', '페르호넨(perhonen)'은 '나비'를 뜻하는데요.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 같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름은 핀란드어지만, 브랜드 국적은 일본입니다. 이 전시는 ‘미나 페르호넨’을 창립한 남성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가 30년간 만든 옷,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인생 철학이 주인공입니다.

"패션 브랜드가 패션쇼가 아닌 전시회를 연다?” 상당히 독특하죠. 그러나 2019~2020년 일본 최대 공공 현대미술관인 도쿄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약칭 MOT)에서 열린 <미나 페르호넨-미나가와 아키라 츠즈쿠전>은 상당한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총 14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전시장을 찾았는데요. 순수 예술이 아닌 패션을 주제로 한 전시로는 놀라운 성과임이 분명합니다.

일본 전역과 대만에 이어 북유럽에서 같은 전시가 이어졌고, 아시아와 유럽의 관객들에게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2025년 2월까지 DDP에서 열리는 한국전은 일본과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로 이 전시의 피날레입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옷감의 벽’이 관람객들을 맞습니다. 천장까지 닿을 듯 형형색색 아름다운 자수와 패턴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가히 ‘옷감들의 향연’입니다. 모두 지난 30년간 옷으로 변신한 대표 옷감들인데, 한데 모아 놓으니 그대로 예술 작품입니다. ‘옷감의 벽’을 지나면 ‘원단의 막’이 이어집니다. 역시 미나 페르호넨에서 선보인 옷과 리빙 아이템에 쓰인 원단들입니다. 그저 원단일 뿐인데, 그 자체로 완벽한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실내 장식품)입니다. 예술이 멀리 있지 않고, 패션이 예술인 이유를 단박에 보여줍니다.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풍경' / 제공. 이음해시태그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풍경' / 제공. 이음해시태그
전시의 시작을 이렇게 원단들로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나 페르호넨은 원단에 진심입니다. 옷의 진정한 시작은 옷감이라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일깨우죠.

그리고 대담하게 원단을 주인공으로 앞세운 전시 동선은 관람객들에게 평소 주목하지 않던 옷감에 시선을 붙잡게 만듭니다. 최근 패션 소비자들은 옷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옷감보단 디자인에 민감하죠. 원가를 낮추기 위해 온갖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된 옷감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사실 옷은 디자인에 앞서 몸에 직접 닿는 원단이 참으로 중요한데 말이죠. 정작 ‘나’를 감싸는 건 원단임에도 ‘남’이 보는 디자인에 더 집중하는 것이 요즘 패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미나 페르호넨은 디자인에 치중하느라 정작 옷의 기본인 옷감의 중요함을 잊고 사는 이들에게 조용히 말을 겁니다.

‘옷의 기본은 옷감입니다’

미나 페르호넨은 “좋은 옷은 정성을 들여 만든 옷감에서 출발한다”고 믿는 신념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숙련된 장인들이 일본에서 생산하는 옷감만 고집합니다. 옷감은 물론 디자인과 봉제까지 옷을 만드는 전 과정이 일본에서 이뤄집니다. 그래서 모든 옷은 100%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죠. 자켓 하나에 가뿐히 1천만 원이 넘는 옷을 파는 명품 브랜드들도 인건비가 저렴한 외국에서 제품을 만드는 시대에 믿기 힘든 원칙이죠.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물' / 제공. 이음해시태그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물' / 제공. 이음해시태그
바로 이 지점이 미나 페르호넨이 일개 패션 브랜드를 넘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지점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신념을 옷에 투영하는 거죠. 그들에게 좋은 옷이란 ‘고품질의 옷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한 이들의 합(合)’입니다. 때문에 좋은 옷을 만드는 전 과정에 있는 이들과 상생(相生)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게 좋은 옷을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옷감에서 시작된 전시는 30년간 미나 페르호넨이 만든 옷들, 브랜드를 대표하는 문양의 제작 과정 등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집니다. 옷의 근간이 되는 원단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지는지, 원단 문양의 스케치가 그 자체로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등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예술 행위인 옷 만드는 과정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전시의 백미는 전시의 끝자락에 있는 실제로 미나 페르호넨을 입는 이들의 스토리입니다. 미나 페르호넨 옷을 입고 경험한 잊지 못할 기억들을 사연이 깃든 옷과 함께 소개한 부분은 참으로 뭉클합니다. 가족과 행복한 나날, 아끼는 이와 소중한 순간, 갑자기 닥친 고통스러운 시간 등에 함께 했던 옷들이 준 위로는 그 어떤 예술보다 감동적입니다.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숲' / 제공. 이음해시태그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의 전시공간 '숲' / 제공. 이음해시태그
관람자들에게도 각별한 순간에서 입었던 자신들의 옷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데, 옷의 가치란 결국 그 옷을 입고 경험한 기억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삶의 매 순간 나와 함께 하는 옷들은 내 인생의 말 없는 동반자였다는 사실도 말이죠.

추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묵묵히 나를 감싸는 나의 옷.

언뜻 보면 '패션 전시'지만, 사실 이 전시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무언의 '철학 강연'입니다.

옷이 너무도 흔해진 시대에 매일 입는 옷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미나 페로호넨은 이렇게 답합니다.

아끼는 옷을 입고 경험한 모든 기억들이, 사실은 인생의 전부이며,
추억이 담긴 옷을 계속 입으면, 아름다운 기억이 순환되면서 삶이 풍부해지고,
세월이 머문 옷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바로 삶을 그렇게 여기는 것과 다름 아니라고.


최효안 예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