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백화점 본점 디지털 사이니지가 감싼 100년이 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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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배세연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LIVE - 2024 SHINSEGAE CHRISTMAS MEDIA FACADE Show]
11월이 되면 연말을 맞이하기 위해 바뀌는 풍경들이 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오랫동안 보아왔고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분수에 전구가 설치되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다. 고전양식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엄숙한 듯 한 해를 보낸 장소에 정해진 기간 동안이지만 가장 생기가 돋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을 보면 진짜로 연말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된다.
여기에 몇 년 전부터 신세계 본점이 가세하여 외벽 전체를 대형스크린으로 사용하며 장소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극대화 하였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 장소를 찾을 정도로 이제는 연말을 대표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올해는 여기에 또 어떤 이미지가 펼쳐질지 기대하던 차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신세계 본점의 외관을 대형 디지털 사이니지가 감싸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장소에서 100여 년간 기념비처럼 서있던 건물의 외관이 사라져 버린다니. 1900년대 초반 한국 문학에는 '진고개' (지금의 충무2가 일대)라는 곳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등장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이유는 '뭐 사러 가는 곳'이다. 이곳과 얽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당시 자본주의의 유입과 이것이 사람들의 삶에 자리 잡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진고개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의 연장선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미츠코시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이다.
이곳은 1930년대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절충식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조선은행 본관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우체국 등과 함께 근대적 경관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였다. 서울이 경성이었을 때, 이곳에는 수많은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리고 자본의 표상에 압도된 사람들이 빈번히 방문하였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과 데이트를 하던 춘심이가 '난찌' (lunch의 일본식 발음)를 먹으러 가기를 희망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염상섭의 소설 '무화과'에서는 "미츠코시의 아래층을 휘더듬다가 구경만 하고 승강기로 맨 꼭대기로 올라가서 식당으로 들어갔다."는 문장으로 미츠코시백화점을 등장시킨다. 이를 통해 당시의 백화점이 지금의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 구성을 확립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상이 자주 찾았다고 알려진, 당시 미츠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은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경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이 천재 작가가 날기를 결심했던 이곳은 지금의 백화점에서도 그 역할을 이어가 남산타워가 보이고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트리니티 가든이 되어있다. 현대적 도시경관 속에서 쇼핑 후 피곤함을 잠시 달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백화점은 우리나라가 해방한 이후에는 동화백화점으로, 6·25 전쟁 때는 미군의 PX로 활용되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이 일을 하는 ‘휘황한’ 곳, 환쟁이들의 초상화부가 있던 곳이 이곳이다. 1963년이 되어서야 신세계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여러 번의 보수공사와 리모델링을 거쳤고, 본래 4층 건물이었던 것을 6층으로 증축하며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과정 중에도 중앙의 계단은 보존하는 등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지키는 방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100여년의 시간 동안 건물은 그 자리에서 빠르게 변하는 시대와 함께 하였다.
그랬던 신세계 본점의 외관이 미디어 파사드로 바뀐 것은 열린송현을 감싸고 있던 높고 긴 돌담이 사라진 것만큼이나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옛 양식의 파사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영상이 퍽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옛 양식 파사드 배경의 크리스마스 영상 - 매지컬 홀리데이, 신세계백화점 크리스마스 라이츠]
그런데 외관을 다 덮어버린 미디어 파사드에 영상으로 재현된 본래 파사드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 또한 그 건물이 담당할 시대적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여 년 전에 급변하는 시대와 함께 나타난 혁신적이었던 건물이 다시 한 번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현 시대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렇기에 다시 긴 시간이 지난 후 그 건물은,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
11월이 되면 연말을 맞이하기 위해 바뀌는 풍경들이 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오랫동안 보아왔고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분수에 전구가 설치되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다. 고전양식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엄숙한 듯 한 해를 보낸 장소에 정해진 기간 동안이지만 가장 생기가 돋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을 보면 진짜로 연말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된다.
여기에 몇 년 전부터 신세계 본점이 가세하여 외벽 전체를 대형스크린으로 사용하며 장소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극대화 하였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 장소를 찾을 정도로 이제는 연말을 대표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올해는 여기에 또 어떤 이미지가 펼쳐질지 기대하던 차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신세계 본점의 외관을 대형 디지털 사이니지가 감싸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장소에서 100여 년간 기념비처럼 서있던 건물의 외관이 사라져 버린다니. 1900년대 초반 한국 문학에는 '진고개' (지금의 충무2가 일대)라는 곳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등장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이유는 '뭐 사러 가는 곳'이다. 이곳과 얽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당시 자본주의의 유입과 이것이 사람들의 삶에 자리 잡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진고개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의 연장선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미츠코시백화점,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이다.
이곳은 1930년대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절충식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조선은행 본관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우체국 등과 함께 근대적 경관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였다. 서울이 경성이었을 때, 이곳에는 수많은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리고 자본의 표상에 압도된 사람들이 빈번히 방문하였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과 데이트를 하던 춘심이가 '난찌' (lunch의 일본식 발음)를 먹으러 가기를 희망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염상섭의 소설 '무화과'에서는 "미츠코시의 아래층을 휘더듬다가 구경만 하고 승강기로 맨 꼭대기로 올라가서 식당으로 들어갔다."는 문장으로 미츠코시백화점을 등장시킨다. 이를 통해 당시의 백화점이 지금의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 구성을 확립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츠코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상이 자주 찾았다고 알려진, 당시 미츠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은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경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이 천재 작가가 날기를 결심했던 이곳은 지금의 백화점에서도 그 역할을 이어가 남산타워가 보이고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트리니티 가든이 되어있다. 현대적 도시경관 속에서 쇼핑 후 피곤함을 잠시 달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백화점은 우리나라가 해방한 이후에는 동화백화점으로, 6·25 전쟁 때는 미군의 PX로 활용되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이 일을 하는 ‘휘황한’ 곳, 환쟁이들의 초상화부가 있던 곳이 이곳이다. 1963년이 되어서야 신세계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여러 번의 보수공사와 리모델링을 거쳤고, 본래 4층 건물이었던 것을 6층으로 증축하며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과정 중에도 중앙의 계단은 보존하는 등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지키는 방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100여년의 시간 동안 건물은 그 자리에서 빠르게 변하는 시대와 함께 하였다.
그랬던 신세계 본점의 외관이 미디어 파사드로 바뀐 것은 열린송현을 감싸고 있던 높고 긴 돌담이 사라진 것만큼이나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옛 양식의 파사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영상이 퍽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옛 양식 파사드 배경의 크리스마스 영상 - 매지컬 홀리데이, 신세계백화점 크리스마스 라이츠]
그런데 외관을 다 덮어버린 미디어 파사드에 영상으로 재현된 본래 파사드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보니 이 또한 그 건물이 담당할 시대적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여 년 전에 급변하는 시대와 함께 나타난 혁신적이었던 건물이 다시 한 번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현 시대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렇기에 다시 긴 시간이 지난 후 그 건물은,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