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적 논란과 도쿄 코리아타운의 탄생
수천 년간 하나의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그 ‘천황’들은 무수한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명령이 뭔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마지막은 역사에 선명하게 기록돼 있다. 1947년 5월 2일 ‘일본에 거주 중인 식민지 출신자는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명령인데 많은 이들이 ‘마지막 방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날 24시 신헌법이 발효되며 천황은 더 이상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미군정이 제시한 헌법 초안을 일본이 뒤집은 부분이 ‘피플(People)’이라는 단어다. 원안에는 ‘주권의 원천인 피플’, 일본어로 인민(人民)이었는데 ‘천황의 백성’이라는 의미인 신민(臣民)에서 파생된 ‘국민(國民)’, 국가의 백성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조선 출신들은 그 국민으로 인정 못 하겠고 필요도 없어졌으니 그만 사라져 달라는 게 방귀였다. 기존 헌법에서도 일본의 신민들에게는 투표권과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는 참정권이 있었으나 조선인들은 그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신민조차 아니었다.

한반도는 미군정의 지배 아래에 있었고 정부 수립도 안 된 그 시점에 당분간 외국인으로 분류된 그들의 국적은 어떻게 정리됐을까? 일본은 어이없게 38년 전 자기들이 지워버린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그들의 불안한 일본 체류는 1965년 한일국교가 수립되고 난 뒤에야 안정적으로 보장됐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는 한국 또는 북한 국적을 선택한 ‘그들’이 참정권 없이 살아가고 있다. 놀라운 건 동족끼리 전쟁하는 꼴이 싫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일본 국적은 더 싫어 기존의 상태로 버티는 ‘조선적’이라는 엄청난 분들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국적은 여전히 124년 전에 사라진 조선이고 지금도 해외에 나갈 때는 일회용 임시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헌법 발효 하루 전 마지막 방귀를 날린 그들은 세금은 칼같이 징수하면서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참정권도 없는데 ‘국토와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땅’에 살고 있다고, 또 해외에 나갈 때 일본의 임시 증명서를 지참했다고 해서 그들이 일본 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은 그냥 무국적일 뿐이다.

1945년 일본땅에는 무려 200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전쟁 막판까지 조선인을 군대에 징집하는 걸 망설인 이유는 총구를 거꾸로 돌릴까 봐 겁이 나서였다. 일본군에 끌려간 대학생 장준하(민주화운동가), 김준엽(고려대 총장) 등은 그 총을 들고 수천 리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했다. 상황이 이러니 900만 명의 일본인이 군대로 가고 비어 있는 탄광을 조선인들로 채울 수밖에. 가기 싫은 걸 강압으로 끌고 간 게 맞고 그래서 200만 명이나 된 것이다.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140만 명은 징글징글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와도 기댈 연고가 없는 60만 명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그곳에 남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시민권을 받으려 애쓰는 미국 동포들과 달리 강력한 압박에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40만 명이 한국, 북한, 조선이라는 국적을 부둥켜안고 이방인의 삶을 견디고 있다.

1950년 급성장하던 롯데는 일본 도쿄 외곽에 신공장을 건설했다. 당시 재일 동포의 실업률은 75%! ‘국적 없는 신격호’가 그들이 기피한 ‘국적 없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 모이다 보니 된장찌개, 김치찌개, 막걸리가 당길 수밖에. 공장 앞에 그런 밥집들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도쿄가 커지면서 그곳은 번화가로 변해갔지만, 점점 더 많이 모여 그들의 ‘삶터’는 커져갔다. 신주쿠역에서 한 정거장인 신오쿠보, 도쿄 최대의 코리아타운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장은 얼마 전에 이전했지만 그 삶터는 더 커졌다. 한때 식민지였던 우리의 1인당 소득이 더 커진 세상, K푸드에 매료된 일본 손님이 더 많은 그곳 단골집에 앉았다. 차별을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고초를 고향의 음식과 술로 달래던 ‘국적 없던’ 그들을 위해 처음처럼 한잔, 과거를 정직하게 성찰하고 반성하고 고치기를 기피하면 빠르지 않더라도 지속해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곳 사람들의 변화를 위해 또 한잔의 건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