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홀딩스 서울 본사. 사진=HL홀딩스
HL홀딩스 서울 본사. 사진=HL홀딩스
"10년간 (HL홀딩스) 주가가 반토막도 더 나도록 기다려 줬는데 배신감이 너무 크다. 회삿돈으로 산 자사주를 재단에 무상으로 증여할 생각을 하다니…돌아선 주주들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포털사이트 HL홀딩스 종목토론방에 한 주주가 올린 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HL홀딩스의 자사주 무상 재단 출연 결정을 놓고 시장 안팎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사회 공헌'이라는 미명 아래 회삿돈으로 손쉽게 대주주 의결권을 강화하려는 꼼수라는 지적이다. 주요 주주인 VIP자산운용과 베어링자산운용조차 일반 주주들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개미들 위한다더니…"주주가치 파괴 결정" 날벼락

HL홀딩스 보고자별 대량보유(5%이상) 현황. 자료=한국거래소
HL홀딩스 보고자별 대량보유(5%이상) 현황. 자료=한국거래소
2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HL홀딩스는 지난 11일 이사회를 열고 현물 보유 중인 자사주 56만720주 중 83.85%인 47만193주를 추후 설립할 비영리재단에 무상 출연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이는 이사회 결의일 전 거래일(11월8일) 종가 기준 163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회사는 처분 목적에 대해 '사회적 책무 실행을 위한 재단법인에의 무상 출연'이라고 적었다. 이 재단은 아직 설립 전으로, 주무관청 인허가를 준비 중이다.

HL홀딩스는 HL만도와 HL디앤아이한라 등을 보유한 HL그룹의 사업 지주회사다. 자동차 AS 부품 유통업과 자동차 부품 모듈 사업, 물류업 등을 자체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대주주인 정몽원 회장(25.03%) 등 특수관계인이 지분 31.58%를 갖고 있다. 이와 함께 VIP자산운용(10.41%)과 베어링자산운용(6.59%), 국민연금공단(5.37%) 등이 주요주주다.

시장 안팎에서는 회삿돈으로 사들인 자사주를 공짜로 재단에 증여해 편법으로 정 회장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쓰려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제3자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일명 '자사주 의결권 부활'이다. 제3자에게 넘겨 더는 자기주식이 아니기 때문에 의결권도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HL홀딩스의 경우 제3자 주체가 회사의 우호세력인 '재단법인'이다. 무상 출연분이 발행주식 총수의 약 4.6%에 해당하는 만큼, 자사주 소유권이 재단으로 옮겨가면 그만큼의 의결권이 부활한다.

자사주 취득 목적에 반하는 결정이라는 점도 지적 사항이다. 이번에 회사가 재단으로 넘기겠다는 자사주는 HL홀딩스가 2020년 2월과 2021년 5월 매입한 자사주(56만720주)의 83.8%에 해당하는 물량이어서다. 취득 당시 회사는 '주주 친화 정책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를 이유로 들었다. 이 두 번의 자사주 취득 발표 당시 주가는 각 4만1350원, 4만4350원이다. 직전 거래일인 지난 22일 종가가 3만4150원인 점을 감안하면 취득 이후 지금까지 주가는 약 17%, 23% 빠졌다.
자사주 취득 공시 이후 HL홀딩스 주가 변동 추이.
자사주 취득 공시 이후 HL홀딩스 주가 변동 추이.
결국 자사주 취득의 주된 목적인 '주가 관리'와 '주주가치 제고' 등을 지키지 못한 가운데, 자사주 무상출연 결정은 기존 취지를 역행한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포털사이트의 HL홀딩스 종목토론방에서 한 주주는 "정 회장 지분이 30%도 안 되니 경영권 빼앗길까 봐 이런 비상식적인 결정을 한 것이냐"며 "속이 뻔히 보이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하고도 강행하면 더는 이 주식, 나아가 한국 주식을 믿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주주는 "이런 결정에도 금융당국이 놔두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법이 문제인 것"이라고 밝혔다.

"무력감·배신감 든다" 12년 정든 운용사도 비판

이 회사의 오랜 투자자였던 VIP운용과 베어링운용도 실망스럽다는 입장이다. 이들 자산운용사는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삼는 대표적 가치투자 하우스로 각각 HL홀딩스의 2대, 3대 주주다. 두 운용사는 공격적인 행동주의를 펴기보다는, 기업과 소통하며 우호적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기업가치를 높여 왔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이번 결의는 주주가치를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라며 "큰돈이 이사회 결의만으로 넘겨지는 것도 의문이지만, 햇수로 12년을 투자해 온 우리와 아무런 사전 협조나 상의가 없었다는 데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편법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데 무력감도 든다"고 말했다. 이어 "무상출연이 강행될 경우 일시에 약 166억원(취득원가 기준)의 회계상 손실이 반영될 것이며, 이는 과거 3년 평균 지배주주순이익의 30%에 해당하는 큰 규모로 일반주주들은 주가 하락으로 추가 손실을 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종학 베어링운용 대표도 "사측 결정을 갑작스럽게 접했다"며 "우리의 지분이 적지 않은 만큼 어떤 식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 여러가지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경영 참여 목적으로 투자하는 게 아닌 만큼 기본적으로 회사와의 '윈-윈' 구도를 지향하고, 가급적 적대적 방법은 고민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HL홀딩스 세종물류센터 전경. 사진=HL홀딩스
HL홀딩스 세종물류센터 전경. 사진=HL홀딩스
기관과 소액 주주들 반발에 사측은 최근 "최소 5년간은 공익재단에 무상증여한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여전히 싸늘한 상황이다. '주주 의결권 행사여부'로 자사주 무상출연에 대한 논점을 흐린다는 지적이다. 5년이란 기한을 조건으로 단 점도 논란거리다.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계획이 전제됐단 것이다. '재단의 독립성은 없고 정 회장과 HL홀딩스 경영진이 실질적 의결권 행사주체임을 인정하는 셈'이라는 비판이다.

'거수기 이사회' 논란도…이사들은 묵묵부답

이사회의 견제·감독 기능이 제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자사주 재단법인 무상출연 안건에 대해 전부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HL홀딩스 이사회는 정 회장·김광헌 사장·김준범 사장 등 사내이사 3명과 김명숙 고려대 교수·이용덕 전 KB국민은행 부행장·정지선 서울시립대 교수·조국현 하와이퍼시픽대 교수 등 사외이사 4명으로 꾸려져 있다. 한경닷컴은 이들 중 사외이사 두 명에게 이의 제기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김 대표는 "이사회가 대주주로부터 독립적인지, 모든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는지 의문"이라며 "이사들은 과거 이사회에서 결의한 자사주 취득 목적(주주가치 제고)을 변경할 만큼 충분히 주주가치가 높아진 상황인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줘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서 "그렇지 못한다면 이사회는 불합리한 결정에 사과하고 최대한 빨리 자사주 출연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 조짐에 서둘렀나…"이런 작태 고리 끊어내야"

시장 일부에서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게 골자인 상법 개정의 조짐이 일자, 회사가 서둘러 논란거리가 될 만한 결정을 통과시켰단 분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지정했다. 재계는 소송이 남발될 위험이 크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재계 측에 찬반 공개 토론회를 제안한 상태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이 시장 최대 화두인데도 두산밥캣 합병과 고려아연 유상증자, 이수페타시스 유상증자에 이어 HL홀딩스 사례까지 줄줄이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상법 손질 전 거래를 마무리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시국에 이런 작태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법상 회색지대가 존재해서다"라며 "이런 사례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자사주 보유한 다른 회사들이 모두 공익법인 설립해서 대주주 경영권 보호를 손쉽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HL홀딩스 관계자는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향후 방향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하기 어렵다"면서도 "(기관 주주의 회신 요청이 있어) 내부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VIP운용은 회사에 이번 재단 출연 관련 우려사항을 보내고 이달 말까지 답신을 요구한 상태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HL홀딩스 관련 시장 논란을 알고 있다"면서도 "한국거래소가 회사의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을 끼쳐선 안 된다. 악재든 호재든, 바른 결정이든 잘못된 결정이든 법 위반이 아닌 이상 거래소 차원에서 개별 회사 결정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