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작가 구본창, 추념과 사색으로 ACC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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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의 시선으로 본 구본창 전시]
사진작가 구본창의 '사물의 초상'전을 보기 위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Asian Cultural Center)를 향해 가면서 우연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KTX 시간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그렇다면 이건 대구와 같은 거리라는 셈인데, 포털 백과사전을 들춰 보니 두 도시 모두 북위 35도 선에 똑같이 걸쳐 있다는 것이었다. 두 도시는 동서를 정확하게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해 왔을까. 한쪽은 우. 한쪽은 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광주를 가 보면 예상보다 매우 가까운 도시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구본창의 '사물의 초상'전은 영어로 ‘The Looking of Things’이다. 한편으로 보면 사물을 쳐다본다, 응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사물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 그 시선에 대한 것이다.
구본창의 시선은 늘 다소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으로, 그래서 그의 작품이 독일식 관념 철학에 뿌리를 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작가들은 남들과 비교해서 얘기하는 것을 늘 싫어하겠지만 구본창의 사진은 (현재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배병우의 그것과 대구와 광주만큼 차이를 갖는 것이다.
배병우는 소나무 사이 단 한줄기의 햇살을 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산을 오른다. 트라이포드와 사진 가방을 메고 헉헉대며 오르다 저 정상 너머에서 기슭으로 여명이 들이닥칠 때쯤 셔터를 누른다. 순간의 찰칵이고, 그 소리에 흠칫 오르가즘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배병우의 사진은 노동집약형이며 그의 작품엔 노동자의 노고가 담겨 있다.
반면에 구본창은 말 그대로 ‘사물의 초상’을 찍어 온 사람이다. 닫힌 공간, 마주하고 있는 사물이 있고, 응시해야만 할 추념과 사색이 있다. 절대적 고독이 요구된다. 그는 마치 배병우가 한순간에 햇살을 찍어 내듯, 사물에 관통하는 통찰을 대신 여러 번에 걸쳐 조탁하듯 찍어 낸다.
구본창의 작업 또한 노고가 상당한 것이지만 노동집약형이라기보다는 추상의 산물이자 그 결정판이다. 구본창의 작품에는 늘 사유의 맥이 흐른다. 구본창을 향해 가면서 난 그가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서 정치성을 읽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한 일이다. 구본창은 그러나, 정치를 외면하고 정치성을 무시함으로써, 그렇게 스스로 사회성을 배제시킴으로써 오히려 탈정치의 정치학,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현실 정치의 초상을 거꾸로 더 구현해 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건 어쩌면 영화에서 홍상수가 하는 일련의 작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일 수 있다. 홍상수도 철저하게 비사회성의 캐릭터를 영화에 비벼 넣는다. 현실과 엮이지 않겠다는 의도된 고립이 느껴진다. 현실은 그만큼 논할 가치도 없으며 그보다 인간은 스스로의 초상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주의이다.
빔 벤더스가 ‘퍼펙트 데이즈’에서 그려낸 히라야마 상(야쿠쇼 코지)처럼 스스로 사회적 욕망을 제거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과연 어떤 눈으로 보이는지를 구본창은 이번 '사물의 초상'에서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실로 그 역설의 역학이 경이로운 전시이다.
구본창의 이번 전시는 진심으로 어마어마하다. 일단 공간에 압도당한다. 한국의 ACC(National Asian Culture Center 국립아시아문화전당)는 동양 최대의 공연장이자 전시장이다. 매년 가을이면 예술극장 빅도어에 스크린을 설치해 야외 영화 상영도 진행한다.
구본창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문화창조원 복합전시3관과 4관은 전체 전시장의 중간급인데도 층고가 10미터에 이른다. 전체 넓이는 합쳐서 약 2,000㎡ 규모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가로 세로 약 3.6mX6m 크기의 대형 스크린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엔 구본창의 DMZ 작품들이 슬라이드로 펼쳐진다. 이번 광주의 전시는 ‘무조건 크고, 크고, 또 크다’이다. 그게 1차 컨셉이다. 구본창 작품의 핵심인 조선 백자 사진들은 DMZ 스크린을 지나 전시장을 들어서는 입구에 각각의 대형 흰 천으로 프린트돼 마치 걸개처럼 하나하나 걸려 있다. 세로로 열병하듯 서 있는 흰 천의 조선 백자 사진들은 압도적이다. 또한, 복합전시4관으로 들어서면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코리아 판타지’도 가로 세로 6mX3.4m 스크린에 보여진다.
광주 전시를 오기 전 이미 그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2023년 12월~3월, 『구본창의 항해』전)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번 작품전에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이번 전시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구본창의 아카이빙 크로니클(archaving chronicle)이었다면 이번 광주 전시는 말 그대로 퍼스널 이그시비션(personal exhibition)이다. 둘은 같은 척, 사실은 큰 차이를 드러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는 이번 광주 전시의 전초전 격임을 보여준다. 그 정도로 다르다. 대규모 복합 전시공연장인 ACC는 사진 전시회 역시 공간의 예술이며 예술의 공간이라는 변증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건 엄청난 미장센이다. 구본창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배치와 구도의 미학을 보여 준다.
백자 시리즈의 ‘문 라이징’은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그의 ‘곱돌’ 작품들, ‘탈’ 시리즈의 작품들은 어디에 어떤 크기로 위치할 것인가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담아냈다. 그 디자인의 사유가 남다른 깊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캐나다 토론토의 한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실내임에도 경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달리는 것을 보고(마틴 스콜세이지의 ‘에이비에이터’ 촬영의 일부는 이 세트장에서 이루어졌다.) 깜짝 놀랐을 때와 같은 느낌 같은 것이다. 사진 역시 공간의 미학이며 이런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일한 작가 중의 한 명이 구본창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해 연말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다소 평면적이었다면 이번 광주 ACC 전시는 입체적이고 융합적이다. 미디어아트를 적극 수용한바 그것은 ACC가 지닌 이 분야의 물적 토대가 워낙 방대하고 고도화돼 있기 때문인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구본창의 '사물의 초상'전은 사진 전시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의외로 좋아하는 구본창의 작품은 ‘비누’이다. 쓰다 만 비누, 쓰고 있는 비누, 막 새로 뜯은 비누 등등 죽 진열된 비누 사진은 사물의 초상의 핵심 작품들이다. 구본창은 평범하고 버려진 사물에도 그만의 가치가 있으며 그런 사물과 인간의 정서가 겹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건 가냘프지만 숭고한 인본주의적 정신이다. 그는 저 비누들처럼, 이 세상에 버려진 양 혼자가 돼 사물과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건 반 고흐의 분열증과도 같은 것일 수 있으나 예술은 어쩌면 그런 이상성에서 통찰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본창은 어릴 적 '플란다스의 개'를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은 소년 네로와 강아지 파트라슈가 성당에서 얼어 죽는 장면에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구본창은 죽어가는 네로의 눈에 비친 성당 천장의 대형 벽화가 기억에 남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작품도 언제나 돼야 저렇게 대형 천정에 걸릴 수 있을까를 꿈꿔 온,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정신세계의 작가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구본창은 이번 전시로 소년 네로의 눈망울에 새겨진 꿈을 이룬 셈이 됐다.
배우들, 셀럽들의 포트레이트(portrait·초상사진)들은 한 구석에 조용히 걸려 있다. 작가 한강의 20대 때의 모습도 있다. 故 강수연의 모습이 지긋하다. 투병 중인 안성기의 모습은 안타깝다.
구본창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바야흐로 일가를 이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이은 이번 광주 ACC 전시는 그 방점을 찍었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
이번 전시는 개인의 감성으로 지극히 사적인 느낌으로 쓰려고 했다. 그와 나는 외사촌 관계이고 어릴 적부터 봐 온 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시에 압도당한 후 그 같은 개인적이고 미니멀한 감성은 사라졌다. 그는 사촌 형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이다. 어딜 감히 그러겠는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해 왔을까. 한쪽은 우. 한쪽은 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광주를 가 보면 예상보다 매우 가까운 도시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구본창의 '사물의 초상'전은 영어로 ‘The Looking of Things’이다. 한편으로 보면 사물을 쳐다본다, 응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사물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 그 시선에 대한 것이다.
구본창의 시선은 늘 다소 수동적이거나 관조적인 것으로, 그래서 그의 작품이 독일식 관념 철학에 뿌리를 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작가들은 남들과 비교해서 얘기하는 것을 늘 싫어하겠지만 구본창의 사진은 (현재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배병우의 그것과 대구와 광주만큼 차이를 갖는 것이다.
배병우는 소나무 사이 단 한줄기의 햇살을 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산을 오른다. 트라이포드와 사진 가방을 메고 헉헉대며 오르다 저 정상 너머에서 기슭으로 여명이 들이닥칠 때쯤 셔터를 누른다. 순간의 찰칵이고, 그 소리에 흠칫 오르가즘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배병우의 사진은 노동집약형이며 그의 작품엔 노동자의 노고가 담겨 있다.
반면에 구본창은 말 그대로 ‘사물의 초상’을 찍어 온 사람이다. 닫힌 공간, 마주하고 있는 사물이 있고, 응시해야만 할 추념과 사색이 있다. 절대적 고독이 요구된다. 그는 마치 배병우가 한순간에 햇살을 찍어 내듯, 사물에 관통하는 통찰을 대신 여러 번에 걸쳐 조탁하듯 찍어 낸다.
구본창의 작업 또한 노고가 상당한 것이지만 노동집약형이라기보다는 추상의 산물이자 그 결정판이다. 구본창의 작품에는 늘 사유의 맥이 흐른다. 구본창을 향해 가면서 난 그가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서 정치성을 읽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한 일이다. 구본창은 그러나, 정치를 외면하고 정치성을 무시함으로써, 그렇게 스스로 사회성을 배제시킴으로써 오히려 탈정치의 정치학,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현실 정치의 초상을 거꾸로 더 구현해 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건 어쩌면 영화에서 홍상수가 하는 일련의 작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일 수 있다. 홍상수도 철저하게 비사회성의 캐릭터를 영화에 비벼 넣는다. 현실과 엮이지 않겠다는 의도된 고립이 느껴진다. 현실은 그만큼 논할 가치도 없으며 그보다 인간은 스스로의 초상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주의이다.
빔 벤더스가 ‘퍼펙트 데이즈’에서 그려낸 히라야마 상(야쿠쇼 코지)처럼 스스로 사회적 욕망을 제거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과연 어떤 눈으로 보이는지를 구본창은 이번 '사물의 초상'에서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실로 그 역설의 역학이 경이로운 전시이다.
구본창의 이번 전시는 진심으로 어마어마하다. 일단 공간에 압도당한다. 한국의 ACC(National Asian Culture Center 국립아시아문화전당)는 동양 최대의 공연장이자 전시장이다. 매년 가을이면 예술극장 빅도어에 스크린을 설치해 야외 영화 상영도 진행한다.
구본창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문화창조원 복합전시3관과 4관은 전체 전시장의 중간급인데도 층고가 10미터에 이른다. 전체 넓이는 합쳐서 약 2,000㎡ 규모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가로 세로 약 3.6mX6m 크기의 대형 스크린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엔 구본창의 DMZ 작품들이 슬라이드로 펼쳐진다. 이번 광주의 전시는 ‘무조건 크고, 크고, 또 크다’이다. 그게 1차 컨셉이다. 구본창 작품의 핵심인 조선 백자 사진들은 DMZ 스크린을 지나 전시장을 들어서는 입구에 각각의 대형 흰 천으로 프린트돼 마치 걸개처럼 하나하나 걸려 있다. 세로로 열병하듯 서 있는 흰 천의 조선 백자 사진들은 압도적이다. 또한, 복합전시4관으로 들어서면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코리아 판타지’도 가로 세로 6mX3.4m 스크린에 보여진다.
광주 전시를 오기 전 이미 그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2023년 12월~3월, 『구본창의 항해』전)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번 작품전에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새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이번 전시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구본창의 아카이빙 크로니클(archaving chronicle)이었다면 이번 광주 전시는 말 그대로 퍼스널 이그시비션(personal exhibition)이다. 둘은 같은 척, 사실은 큰 차이를 드러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는 이번 광주 전시의 전초전 격임을 보여준다. 그 정도로 다르다. 대규모 복합 전시공연장인 ACC는 사진 전시회 역시 공간의 예술이며 예술의 공간이라는 변증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건 엄청난 미장센이다. 구본창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배치와 구도의 미학을 보여 준다.
백자 시리즈의 ‘문 라이징’은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그의 ‘곱돌’ 작품들, ‘탈’ 시리즈의 작품들은 어디에 어떤 크기로 위치할 것인가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담아냈다. 그 디자인의 사유가 남다른 깊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캐나다 토론토의 한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실내임에도 경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달리는 것을 보고(마틴 스콜세이지의 ‘에이비에이터’ 촬영의 일부는 이 세트장에서 이루어졌다.) 깜짝 놀랐을 때와 같은 느낌 같은 것이다. 사진 역시 공간의 미학이며 이런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일한 작가 중의 한 명이 구본창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해 연말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가 다소 평면적이었다면 이번 광주 ACC 전시는 입체적이고 융합적이다. 미디어아트를 적극 수용한바 그것은 ACC가 지닌 이 분야의 물적 토대가 워낙 방대하고 고도화돼 있기 때문인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구본창의 '사물의 초상'전은 사진 전시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의외로 좋아하는 구본창의 작품은 ‘비누’이다. 쓰다 만 비누, 쓰고 있는 비누, 막 새로 뜯은 비누 등등 죽 진열된 비누 사진은 사물의 초상의 핵심 작품들이다. 구본창은 평범하고 버려진 사물에도 그만의 가치가 있으며 그런 사물과 인간의 정서가 겹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건 가냘프지만 숭고한 인본주의적 정신이다. 그는 저 비누들처럼, 이 세상에 버려진 양 혼자가 돼 사물과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건 반 고흐의 분열증과도 같은 것일 수 있으나 예술은 어쩌면 그런 이상성에서 통찰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본창은 어릴 적 '플란다스의 개'를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은 소년 네로와 강아지 파트라슈가 성당에서 얼어 죽는 장면에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구본창은 죽어가는 네로의 눈에 비친 성당 천장의 대형 벽화가 기억에 남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작품도 언제나 돼야 저렇게 대형 천정에 걸릴 수 있을까를 꿈꿔 온, 그런 사람이다. 평범한 정신세계의 작가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구본창은 이번 전시로 소년 네로의 눈망울에 새겨진 꿈을 이룬 셈이 됐다.
배우들, 셀럽들의 포트레이트(portrait·초상사진)들은 한 구석에 조용히 걸려 있다. 작가 한강의 20대 때의 모습도 있다. 故 강수연의 모습이 지긋하다. 투병 중인 안성기의 모습은 안타깝다.
구본창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바야흐로 일가를 이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이은 이번 광주 ACC 전시는 그 방점을 찍었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
이번 전시는 개인의 감성으로 지극히 사적인 느낌으로 쓰려고 했다. 그와 나는 외사촌 관계이고 어릴 적부터 봐 온 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시에 압도당한 후 그 같은 개인적이고 미니멀한 감성은 사라졌다. 그는 사촌 형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이다. 어딜 감히 그러겠는가.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