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한 선율과 남다른 사운드로 청중 압도한 조성진과 사이먼 래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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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내한 공연
사이먼 래틀 지휘, 피아니스트 조성진 협연
브람스부터 브루크너까지 빛난 밤
현대음악 베베른, 따뜻함으로 재해석
앙코르 없는 여운, 브루크너의 위엄
사이먼 래틀 지휘, 피아니스트 조성진 협연
브람스부터 브루크너까지 빛난 밤
현대음악 베베른, 따뜻함으로 재해석
앙코르 없는 여운, 브루크너의 위엄
유럽에는 여러 방송 교향악단이 있지만, 독일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그 가운데서도 한 손에 꼽을 만한 명가이다. 초대 상임지휘자인 오이겐 요훔부터 시작해 라파엘 쿠벨리크, 콜린 데이비스, 로린 마젤, 마리스 얀손스에 이르기까지 역대 상임지휘자 모두가 20세기 클래식 역사를 써 내려간 거장들이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인물은 2002~18년에 걸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사이먼 래틀이다. 갈수록 ‘독일 정통 사운드’를 보전하는 오케스트라가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몇 안 되는 예외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내한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협연자가 다름 아닌 조성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조성진과 래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조성진이 2015년 10월에 열린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을 때,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사이먼 래틀에게 전화를 걸어 조성진의 연주를 극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메르만은 평소에 남 칭찬을 거의 안 하는 성격이라 오죽하면 래틀이 “이 양반 뭐 잘못 먹었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단다. 이렇게 조성진을 주목하게 된 래틀은 머잖아 조성진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11월에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함으로써 둘의 ‘케미’가 어떤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이 지난 지금, 둘 사이의 관계는 한층 돈독해진 듯하다. 공연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래틀이 “그와 연주하면 염려가 없다”고 한껏 치켜세운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난 2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첫날 공연의 첫 순서인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일단 이 곡은 쇼팽이나 드뷔시 처럼 조성진의 장기에 속하는 레퍼토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대곡이자 난곡을 조성진이 어떻게 소화해낼지 궁금했다. 반어적인 농담을 즐겼던 브람스는 이 곡에 대해 ‘아주 작은 피아노 소품’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했을 때는 ‘기나긴 테러’라는 표현도 썼다. 이 말대로 이 곡은 피아니스트에게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협주곡은 브람스의 작품답게 적잖은 ‘두께’를 필요로 하는 곡이기도 하다. 브람스를 비롯한 낭만주의 작품에서 이러한 두께를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페달링으로 일부 음을 살짝 흐림으로써 연주에 음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성진은 이 방법을 거부하고 페달링을 극도로 절제했다. 굳이 말하자면 페달링을 안 한 건 아닌데 음색에 영향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만 구사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최저음역부터 최고음역까지 명징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셈여림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대처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양손의 비중을 거의 똑같이 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런 식의 연주는 바로크나 초기 베토벤까지의 고전파 음악, 또 슈베르트부터 쇼팽까지의 초중기 낭만파 음악에서는 아주 효과가 좋다. 그리고 음반으로 접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들은 조성진의 장기에 속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무척 흥미로웠다. 굳이 말하자면 ‘기분 좋은 이질감’이었다고나 할까. 2악장 중간부에서 조성진이 들려준 담백하고도 서정적인 연주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다만 특히 1악장에서 템포를 자주 변경한 것(이를 ‘루바토’라고 부른다) 역시 앞서 말한 두터움을 연출하려는 방책이었을지는 몰라도, 이 경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아 보였다. 앙코르로 연주한 슈만 <숲의 정경> 중 세 번째 곡 ‘고독한 꽃’은 담백하고 은은한 연주였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1악장 첫머리부터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첫머리의 호른 독주는 국내 악단에서도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부드럽고 유려했다. 오케스트라의 균형감은 대체로 적절한 수준이었다. 일부 악구에서 비올라가 두드러진 것은 근래에는 흔한 현상이지만, 이런 경향을 주도한 선구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래틀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3악장 첫머리를 여는 첼로 수석의 독주 역시 풍성하고도 따뜻했다.
2부 순서에서 연주한 ‘교향곡 제2번’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1악장은 무게감과 투명함이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었고, 악상이 자연스럽게 물결치듯 나아갔다. 2악장에서는 첼로 파트가 들려준 부드러운 연주가 특히 두드러졌고, 3악장은 응당 그래야 하듯 낙천적이었다. 4악장에서 팀파니가 들려준 적극적인 연주를 래틀이 타악기 주자 출신임을 새삼 일깨워주었고, 셈여림 구사가 앞서보다 더욱 폭넓어짐으로써 극적이고 상쾌한 대비를 연출한 해석은 훌륭했다.
앙코르로는 브람스 ‘헝가리 춤곡집’ 중 하나가 연주되었다. 지난 20여 년간의 공연을 살펴보면, 이 춤곡집 가운데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는 시기별로 비교적 뚜렷한 경향성을 보인다. 초창기에는 가장 대중적인 ‘5번’을 주로 연주했고, 그게 식상해질 무렵 간간이 ‘6번’이 등장하나 싶더니 이내 ‘1번’의 장기집권(?)으로 이어졌다. ‘4번’ 정도가 때때로 그 아성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3번’을 들고 나옴으로써 허를 찔렀다. 매우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악구와 한층 푸근하게 가라앉은 악구가 멋지게 대비를 이루는 곡인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별다른 겉치장 없이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둘째 날인 지난 21일의 첫 곡은 안톤 베베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개의 소품’이었다. 래틀은 일찍부터 신 빈악파에 관심을 보여 왔고, 베를린 필하모니 상임지휘자 재임 기간에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현대음악을 꾸준히 지휘했으므로 이런 선곡이 놀랍지는 않다. 그런데 신 빈악파, 특히 베베른의 작품을 연주하는 지휘자 상당수는 작품의 구조적 명료함을 부각하기 위해 선명하고 다소 차가운 음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는 결이 맞지 않는다.
래틀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바이에른 특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존중하는 가운데 셈여림을 섬세하게 조절했다. 그 결과 때때로 살짝 몽롱하지만 꽤 듣기 좋은 연주가 나왔다. 신 빈악파 동료였던 베르크의 작품을 공연할 때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색이지만 베베른에서 이런 음색을 대하려니 퍽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첫날 조성진이 들려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썩 훌륭했지만 어딘가 좀 미완성된 느낌을 준 반면, 둘째 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어느 모로 보나 완성된 해석이고 연주였다. 조성진은 전날과 대체로 비슷한 접근법으로 연주했는데, 이날이 더 효과적이었다. 명료하고 균일한 연주였으며, 기교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물 흐르듯 연주했다. 페달링도 한층 절제했는데, 2악장 후반부에서만은 페달링을 적극적으로 구사해 은은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이는 앞뒤와 대조적으로 이 대목에서 유독 쇼팽의 걸작 녹턴을 방불케 하는 시정이 돋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명랑하고 단정하며 기품 있는 3악장은 우리가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연주였다. 앙코르는 역시 슈만의 <환상 소곡집, Op. 12> 중 세 번째 곡 ‘어찌하여’였는데 역시 담백하고 차분한 연주였다. 첫날 프로그램은 1부와 2부의 균형이 얼추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둘째 날의 경우에는 무게추가 확실히 2부 쪽으로 기운다. 올해는 안톤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이고, 이 해가 가기 전에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또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행운이었다. 그게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9번’이라는 점 역시 의미를 더했다. 뛰어난 교회 오르가니스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브루크너는 이 작품을 ‘선하신 하느님께’ 바쳤다.
사이먼 래틀은 2011년 11월 16일에도 우리나라에서 지휘한 바 있다. 다만 그때는 오케스트라가 베를린 필하모니였고, 장소도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세종 특유의 답답한 홀톤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연주는 훌륭했다. 기억을 더듬어 비교해 보자면, 이번 공연에서 래틀은 이전보다도 조금 빠른 템포를 구사했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다. 지휘자는 대개 나이가 들수록 템포가 느려진다. 맥박이 점차 느리게 뛰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래틀이 취한 대담한 템포는, 올해 69세인 이 지휘자가 아직 노쇠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템포를 비교적 자주 변경한 것과 도도한 현악의 흐름 가운데서도 그때그때 이 파트 저 파트로 초점을 다르게 맞춘 것은 악상을 한층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싶었다. 코다 직전 총주에서 앙상블이 약간 흐트러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코다만은 위압감을 확실히 살려냈다.
2악장은 뚜렷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가운데 비교적 정석적으로 진행되었다.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은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3악장은 브루크너가 완성한 마지막 악장이며, 일부 음악학자가 4악장을 보필 완성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대다수 전문가는 3악장이 사실상 브루크너의 유언장이자 최후 진술이며 이 교향곡을 ‘미완성 상태로 완성한’ 악장이라고 간주한다. 작곡가 자신도 이 악장에 유독 자신의 이전 교향곡들에서 따온 악상을 많이 집어넣음으로써 이런 관점에 힘을 실어주었다.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시종일관 이 악장의 무게에 걸맞은 정성과 열의를 보여주었으며, 끝까지 힘과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다만 호른이 연주하는 맨 마지막 음은 실연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데, 이날 역시 사소한 실수가 있어 약간 아쉬움을 남겼다. 청중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접한 래틀은 악장과 한동안 귀엣말을 주고받았는데, 아마 앙코르를 연주할 것인가를 두고 얘기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날 공연은 결국 앙코르 없이 끝났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같은 곡 다음에 연주할 만한 앙코르용 곡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여운을 그대로 안고 귀가할 수 있게 해준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단원 일동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렇게 공연 자체는 이틀 모두 무척 만족스러웠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 두 공연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2024년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열린 것이다. 이 투어는 먼저 서울에서 2회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본 4개 도시에서 6회 공연을 거쳐 대만 3개 도시에서 4회 공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본은 인구도 많고 클래식 수용의 역사도 우리보다 훨씬 기니 그렇다 쳐도, 대만보다도 공연 횟수가 적은 것은 좀 불만스럽다. 대만이 이런 공연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 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지만, 섣부른 예단은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도 문화생활이 서울 일변도로 이루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그래서 서울과 다른 지역 사이의 문화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
조성진과 래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조성진이 2015년 10월에 열린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을 때,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사이먼 래틀에게 전화를 걸어 조성진의 연주를 극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메르만은 평소에 남 칭찬을 거의 안 하는 성격이라 오죽하면 래틀이 “이 양반 뭐 잘못 먹었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단다. 이렇게 조성진을 주목하게 된 래틀은 머잖아 조성진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11월에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함으로써 둘의 ‘케미’가 어떤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이 지난 지금, 둘 사이의 관계는 한층 돈독해진 듯하다. 공연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래틀이 “그와 연주하면 염려가 없다”고 한껏 치켜세운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난 2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첫날 공연의 첫 순서인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일단 이 곡은 쇼팽이나 드뷔시 처럼 조성진의 장기에 속하는 레퍼토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대곡이자 난곡을 조성진이 어떻게 소화해낼지 궁금했다. 반어적인 농담을 즐겼던 브람스는 이 곡에 대해 ‘아주 작은 피아노 소품’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했을 때는 ‘기나긴 테러’라는 표현도 썼다. 이 말대로 이 곡은 피아니스트에게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협주곡은 브람스의 작품답게 적잖은 ‘두께’를 필요로 하는 곡이기도 하다. 브람스를 비롯한 낭만주의 작품에서 이러한 두께를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페달링으로 일부 음을 살짝 흐림으로써 연주에 음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성진은 이 방법을 거부하고 페달링을 극도로 절제했다. 굳이 말하자면 페달링을 안 한 건 아닌데 음색에 영향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만 구사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최저음역부터 최고음역까지 명징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셈여림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대처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양손의 비중을 거의 똑같이 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런 식의 연주는 바로크나 초기 베토벤까지의 고전파 음악, 또 슈베르트부터 쇼팽까지의 초중기 낭만파 음악에서는 아주 효과가 좋다. 그리고 음반으로 접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들은 조성진의 장기에 속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무척 흥미로웠다. 굳이 말하자면 ‘기분 좋은 이질감’이었다고나 할까. 2악장 중간부에서 조성진이 들려준 담백하고도 서정적인 연주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다만 특히 1악장에서 템포를 자주 변경한 것(이를 ‘루바토’라고 부른다) 역시 앞서 말한 두터움을 연출하려는 방책이었을지는 몰라도, 이 경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아 보였다. 앙코르로 연주한 슈만 <숲의 정경> 중 세 번째 곡 ‘고독한 꽃’은 담백하고 은은한 연주였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1악장 첫머리부터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첫머리의 호른 독주는 국내 악단에서도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부드럽고 유려했다. 오케스트라의 균형감은 대체로 적절한 수준이었다. 일부 악구에서 비올라가 두드러진 것은 근래에는 흔한 현상이지만, 이런 경향을 주도한 선구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래틀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3악장 첫머리를 여는 첼로 수석의 독주 역시 풍성하고도 따뜻했다.
2부 순서에서 연주한 ‘교향곡 제2번’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1악장은 무게감과 투명함이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었고, 악상이 자연스럽게 물결치듯 나아갔다. 2악장에서는 첼로 파트가 들려준 부드러운 연주가 특히 두드러졌고, 3악장은 응당 그래야 하듯 낙천적이었다. 4악장에서 팀파니가 들려준 적극적인 연주를 래틀이 타악기 주자 출신임을 새삼 일깨워주었고, 셈여림 구사가 앞서보다 더욱 폭넓어짐으로써 극적이고 상쾌한 대비를 연출한 해석은 훌륭했다.
앙코르로는 브람스 ‘헝가리 춤곡집’ 중 하나가 연주되었다. 지난 20여 년간의 공연을 살펴보면, 이 춤곡집 가운데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는 시기별로 비교적 뚜렷한 경향성을 보인다. 초창기에는 가장 대중적인 ‘5번’을 주로 연주했고, 그게 식상해질 무렵 간간이 ‘6번’이 등장하나 싶더니 이내 ‘1번’의 장기집권(?)으로 이어졌다. ‘4번’ 정도가 때때로 그 아성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3번’을 들고 나옴으로써 허를 찔렀다. 매우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악구와 한층 푸근하게 가라앉은 악구가 멋지게 대비를 이루는 곡인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별다른 겉치장 없이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둘째 날인 지난 21일의 첫 곡은 안톤 베베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개의 소품’이었다. 래틀은 일찍부터 신 빈악파에 관심을 보여 왔고, 베를린 필하모니 상임지휘자 재임 기간에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현대음악을 꾸준히 지휘했으므로 이런 선곡이 놀랍지는 않다. 그런데 신 빈악파, 특히 베베른의 작품을 연주하는 지휘자 상당수는 작품의 구조적 명료함을 부각하기 위해 선명하고 다소 차가운 음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는 결이 맞지 않는다.
래틀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바이에른 특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존중하는 가운데 셈여림을 섬세하게 조절했다. 그 결과 때때로 살짝 몽롱하지만 꽤 듣기 좋은 연주가 나왔다. 신 빈악파 동료였던 베르크의 작품을 공연할 때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색이지만 베베른에서 이런 음색을 대하려니 퍽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첫날 조성진이 들려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썩 훌륭했지만 어딘가 좀 미완성된 느낌을 준 반면, 둘째 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어느 모로 보나 완성된 해석이고 연주였다. 조성진은 전날과 대체로 비슷한 접근법으로 연주했는데, 이날이 더 효과적이었다. 명료하고 균일한 연주였으며, 기교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물 흐르듯 연주했다. 페달링도 한층 절제했는데, 2악장 후반부에서만은 페달링을 적극적으로 구사해 은은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이는 앞뒤와 대조적으로 이 대목에서 유독 쇼팽의 걸작 녹턴을 방불케 하는 시정이 돋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명랑하고 단정하며 기품 있는 3악장은 우리가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연주였다. 앙코르는 역시 슈만의 <환상 소곡집, Op. 12> 중 세 번째 곡 ‘어찌하여’였는데 역시 담백하고 차분한 연주였다. 첫날 프로그램은 1부와 2부의 균형이 얼추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둘째 날의 경우에는 무게추가 확실히 2부 쪽으로 기운다. 올해는 안톤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이고, 이 해가 가기 전에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또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행운이었다. 그게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9번’이라는 점 역시 의미를 더했다. 뛰어난 교회 오르가니스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브루크너는 이 작품을 ‘선하신 하느님께’ 바쳤다.
사이먼 래틀은 2011년 11월 16일에도 우리나라에서 지휘한 바 있다. 다만 그때는 오케스트라가 베를린 필하모니였고, 장소도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세종 특유의 답답한 홀톤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연주는 훌륭했다. 기억을 더듬어 비교해 보자면, 이번 공연에서 래틀은 이전보다도 조금 빠른 템포를 구사했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다. 지휘자는 대개 나이가 들수록 템포가 느려진다. 맥박이 점차 느리게 뛰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래틀이 취한 대담한 템포는, 올해 69세인 이 지휘자가 아직 노쇠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템포를 비교적 자주 변경한 것과 도도한 현악의 흐름 가운데서도 그때그때 이 파트 저 파트로 초점을 다르게 맞춘 것은 악상을 한층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싶었다. 코다 직전 총주에서 앙상블이 약간 흐트러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코다만은 위압감을 확실히 살려냈다.
2악장은 뚜렷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가운데 비교적 정석적으로 진행되었다.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은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3악장은 브루크너가 완성한 마지막 악장이며, 일부 음악학자가 4악장을 보필 완성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대다수 전문가는 3악장이 사실상 브루크너의 유언장이자 최후 진술이며 이 교향곡을 ‘미완성 상태로 완성한’ 악장이라고 간주한다. 작곡가 자신도 이 악장에 유독 자신의 이전 교향곡들에서 따온 악상을 많이 집어넣음으로써 이런 관점에 힘을 실어주었다.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시종일관 이 악장의 무게에 걸맞은 정성과 열의를 보여주었으며, 끝까지 힘과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다만 호른이 연주하는 맨 마지막 음은 실연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데, 이날 역시 사소한 실수가 있어 약간 아쉬움을 남겼다. 청중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접한 래틀은 악장과 한동안 귀엣말을 주고받았는데, 아마 앙코르를 연주할 것인가를 두고 얘기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날 공연은 결국 앙코르 없이 끝났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같은 곡 다음에 연주할 만한 앙코르용 곡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여운을 그대로 안고 귀가할 수 있게 해준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단원 일동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렇게 공연 자체는 이틀 모두 무척 만족스러웠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 두 공연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2024년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열린 것이다. 이 투어는 먼저 서울에서 2회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본 4개 도시에서 6회 공연을 거쳐 대만 3개 도시에서 4회 공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본은 인구도 많고 클래식 수용의 역사도 우리보다 훨씬 기니 그렇다 쳐도, 대만보다도 공연 횟수가 적은 것은 좀 불만스럽다. 대만이 이런 공연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 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지만, 섣부른 예단은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도 문화생활이 서울 일변도로 이루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그래서 서울과 다른 지역 사이의 문화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