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1953년의 뜨거웠던 여름을 돌아보며
지난 10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출범에 대비하는 회의가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그 회의에서 나온 방안들은 ‘모범 답안’이다. 예측이 어렵고 대응은 더 어려운 일들이라, 시원한 방안들이 나오기 어려웠을 터다.

아쉽게도, 그 모범 답안은 가장 중대한 문제를 빼놓고 작성됐다. 트럼프 후보는 북한 지도자와 만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거듭 공언했다. 원래 남북한과 미국의 3자 회담이었는데, ‘운전석’에 앉았다’고 호언한 문재인 대통령이 ‘강제 하차’를 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따라 판문점 면담 장소로 가려던 문 대통령의 면전에서 트럼프의 경호원들이 문을 닫아버리는 광경은 대한민국 76년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 뒤로 미·북 양자 회담이 고착됐다.

당사자인 우리가 빠진 회담은 당연히 저지돼야 하고 우리가 참가하는 회담으로 바뀌어야 한다. 게다가 이번 미·북 양자 회담은 우리에게 무척 위험하다. 본질적 위험은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AP통신 기자가 “트럼프를 협박할 증거들을 가졌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푸틴은 “당시 그는 민간인이었으므로, 누구도 그가 모스크바에 있다고 내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푸틴의 답변엔 트럼프에 대한 위협이 담겼다. 이번 선거에서도 러시아가 지원했을 터이니, 트럼프에 대한 푸틴의 영향력은 늘어났을 것이다. 트럼프의 측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노골적으로 러시아 편을 드는 데서 그 점이 확인된다.

이제 북한은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맺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가했다. 당연히 푸틴은 트럼프에게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박할 것이다. 이 심중한 위험을 우리는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특히 트럼프가 미·북 회담을 공식화하기 전에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 힘든 일에서 1953년의 상황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역사에서 적절한 교훈을 얻는 요체는 외부 경계조건이 비슷한 경우를 살피는 것이다. 1953년의 여름은 지금과 외형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아주 비슷하다.

미국은 휴전 협상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게다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추종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연합군의 독일 진공 작전 계획을 미리 스탈린에게 알렸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던 미군을 엘베강 서안에 세우고 강을 건넌 부대들을 불러들인 뒤, 러시아군이 닿을 때까지 여러 날을 기다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미군을 회군시켜 러시아가 점령하도록 했다. 그래서 영국군 장군들은 그를 “헤이, 조”라 불렀다. 프랑스 매춘부들이 미군들을 유혹할 때, 그렇게 불렀다. 즉 ‘스탈린에게 몸을 판 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판을 뒤엎었다. 3개 사단이나 되는 반공 포로들을 석방함으로써, 휴전 회담은 마비됐다. 당시 미국은 이 대통령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작전’을 세워놓고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암묵적 동의를 얻은 터였다. 이 대통령은 그런 계획을 알고도 파천황(破天荒)의 결단을 내렸다.

미군 지휘부가 그 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궁극적 이유는 국민과 국군이 이 대통령에게 보낸 절대적 지지였다. 그렇게 해서, 이 대통령은 휴전 뒤에도 미국이 한국의 방위를 책임진다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었다. 흥미롭게도, 이 조치는 중공이 포로 송환의 원칙에서 미국 주장을 따르도록 해서 휴전을 앞당겼다.

지금 미·북 회담을 뒤엎을 길은 원래의 협의체였던 ‘6자 회담’을 복원하는 것이다.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포함한 ‘7자 회담’을 제안하는 방안도 있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가로 북한 문제는 이미 유럽의 문제가 됐다는 논리다. 이 방안의 묘미는 트럼프에게도 반가우리라는 점이다. 푸틴의 압박으로 북한 지도자와 만나 기괴한 합의를 하는 것이 그에게 어찌 즐겁겠는가?

온 국민이 ‘휴전 결사반대’를 외쳤던 1953년의 그 뜨거운 여름은 지금 나약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일러준다. 지도자에겐 대담하게 상상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라고. 국민들에겐 지도자가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지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