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달러 표시 ETF 도입하자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과 싱가포르 증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국 통화가 아니라 미국 달러로 사고팔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몇몇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금융투자협회에 달러 표시 ETF를 도입하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달러 표시 ETF는 가격이 미국 달러로 표시되고 거래도 달러로 이뤄지는 상품을 말한다.

국내 ETF 시장은 순자산총액이 160조원을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지난 20여 년간 연평균 순자산 증가율이 30%에 달한다. 상장된 ETF 수는 900개가 넘었다. 상품 개수로 따지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

외국인 왜 안 사나

하지만 외국인들의 거래 비중은 미미하다. 올해 들어 국내 증시에서 759조원어치 ETF가 거래됐는데, 이 중 외국인 순매수액은 17조원에 불과하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해외 기관투자가들을 만나 보면 한국 시장에는 다양한 ETF가 있기 때문에 사고 싶은 상품도 많다는 말을 많이 한다”며 “하지만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손 등을 이유로 선뜻 매수에 나서기 힘들다고 토로한다”고 전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일찍이 달러 표시 ETF를 도입해 외국인 자금을 흡수하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은 같은 상품을 두 가지 클래스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글로벌X 중국 소비재’는 홍콩달러로, ‘글로벌X 중국 소비재 USD’는 미국 달러로 매매할 수 있다. 미국 달러 강세가 이어지고 중국 내수시장도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투자자가 있다면 ‘글로벌X 중국 소비재 USD’를 고르면 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투자 국경은 없어졌다. 개인 투자자들은 각국 증시 움직임뿐만 아니라 통화 가치까지 고려해 투자한다. 일본 엔화 가치가 저점을 찍었고 미국 경제도 활황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하는 개미들은 일본 증시에 상장된 S&P500 ETF를 매수할 정도로 똑똑해졌다. 서학개미들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이달 들어 1000억달러를 돌파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1년 전에 비해 60% 증가했다.

한국 증시 매력도 높여야

반면 국내 증시에서는 개인, 기관, 외국인 가릴 것 없이 돈을 빼고 있다. 한국 기업의 투자 매력도가 떨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해외 투자자를 끌어들일 만한 유인책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최근 홍콩에서 투자설명회(IR)를 하는 등 금융당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해외 투자자에게 말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 도입일 수 있다.

과거 한국거래소 내부에서도 ETF 시장 활성화를 위해 달러 표시 상품을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ETF 거래량이 많지 않았고 증권사 중 달러 결제 시스템을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초기 투입 비용을 생각하면 시기상조라는 판단에 실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ETF가 주요 재테크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증권사 대부분은 24시간 달러 매매 주문을 소화할 정도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달러 표시 ETF는 투자 선택의 폭을 넓혀 한국 증시의 매력을 키우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