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다시 한번 성장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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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방치할 수 없는 성장률 하락
포퓰리즘 아닌 '포용 성장'이 해법
유경준 前 통계청장
포퓰리즘 아닌 '포용 성장'이 해법
유경준 前 통계청장
외환위기 이후 역대 정부는 문재인 정권을 제외하면 모두 한목소리로 구조개혁을 강조해 왔다. 구조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당연히 급속도로 하락하는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경제는 성장 논의 자체가 사라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성장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 투입 그리고 총요소생산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총요소생산성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술 진보나 경영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제도와 같은 추상적 요소를 의미한다.
이는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등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요소로 언급한 경제 제도와 그를 결정하는 정치 및 정치 제도와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들은 단번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는 ‘멀고도 험한 길’(long and winding road)을 계속 걸어가는 과정에서 결정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즉 아제모을루는 서로 쟁투(鬪爭)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와 사회(또는 독재와 시장)가 끊임없이 견제하며, 바로 옆의 낭떠러지를 피해서 나아가야 하는 ‘좁은 회랑’(narrow corridor)을 통해 달성된다고 논술하고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0년대 2% 정도로 추정되지만, 이를 지켜내기도 녹록지 않으며,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이 다시 한번 성장하려면 인구를 늘리고, 기업의 자본 투자도 확대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흐트러진 제도 개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반대로 성장은 뒷전에 두고 ‘먹사니즘’인지 ‘막사니즘’인지 모를 달콤한 용어로, 있지도 않을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이야기만 한다면 한국도 급속한 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권을 위해 달콤한 유혹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제대로 된 성장의 밑그림은 백안시(白眼視)하다가 결국 망가진 나라는 수없이 많다. 필자는 성장 논의가 사라지는 지금의 상황에 큰 위기감을 느낀다.
지금의 한국은 아제모을루가 말한 그 좁은 회랑의 낭떠러지를 다시 마주치는 게 아닌가 싶다. 즉, 다시 한번 성장하고 그 과실을 잘 배분해 포용적 민주국가로 가느냐, 아니면 포퓰리즘에 빠져 독재국가로 가거나 무기력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서민이 고통을 받느냐는 ‘결정적 분기점’(critical juncture) 말이다.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분배 시스템을 갖추고 성장의 과실이 서민에게 더 많이 배분되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을 지향해야 한다. 포용적 성장을 위해 현 정부가 추진하는 ‘약자 보호를 위한 과도한 기득권의 제약’을 핵심으로 하는 4+1 개혁은 기본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각지대를 방치한 채 누더기가 돼가는 복지전달 체계를 개혁하고 증가하는 복지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재정·세제 개혁과 공공부문 개혁, 금융 개혁 등이 추가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 경제가 회춘은 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한번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1’도 힘든데 추가 개혁은 정말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누군가 앞장서 가야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뒤따라오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또 그래야 솜사탕으로 유혹해 국민을 좁은 회랑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으려는 악마 같은 포퓰리즘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 투입 그리고 총요소생산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총요소생산성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술 진보나 경영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제도와 같은 추상적 요소를 의미한다.
이는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등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요소로 언급한 경제 제도와 그를 결정하는 정치 및 정치 제도와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들은 단번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는 ‘멀고도 험한 길’(long and winding road)을 계속 걸어가는 과정에서 결정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즉 아제모을루는 서로 쟁투(鬪爭)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와 사회(또는 독재와 시장)가 끊임없이 견제하며, 바로 옆의 낭떠러지를 피해서 나아가야 하는 ‘좁은 회랑’(narrow corridor)을 통해 달성된다고 논술하고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0년대 2% 정도로 추정되지만, 이를 지켜내기도 녹록지 않으며,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이 다시 한번 성장하려면 인구를 늘리고, 기업의 자본 투자도 확대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흐트러진 제도 개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반대로 성장은 뒷전에 두고 ‘먹사니즘’인지 ‘막사니즘’인지 모를 달콤한 용어로, 있지도 않을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이야기만 한다면 한국도 급속한 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권을 위해 달콤한 유혹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제대로 된 성장의 밑그림은 백안시(白眼視)하다가 결국 망가진 나라는 수없이 많다. 필자는 성장 논의가 사라지는 지금의 상황에 큰 위기감을 느낀다.
지금의 한국은 아제모을루가 말한 그 좁은 회랑의 낭떠러지를 다시 마주치는 게 아닌가 싶다. 즉, 다시 한번 성장하고 그 과실을 잘 배분해 포용적 민주국가로 가느냐, 아니면 포퓰리즘에 빠져 독재국가로 가거나 무기력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서민이 고통을 받느냐는 ‘결정적 분기점’(critical juncture) 말이다.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분배 시스템을 갖추고 성장의 과실이 서민에게 더 많이 배분되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을 지향해야 한다. 포용적 성장을 위해 현 정부가 추진하는 ‘약자 보호를 위한 과도한 기득권의 제약’을 핵심으로 하는 4+1 개혁은 기본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각지대를 방치한 채 누더기가 돼가는 복지전달 체계를 개혁하고 증가하는 복지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재정·세제 개혁과 공공부문 개혁, 금융 개혁 등이 추가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 경제가 회춘은 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한번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1’도 힘든데 추가 개혁은 정말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누군가 앞장서 가야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뒤따라오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또 그래야 솜사탕으로 유혹해 국민을 좁은 회랑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으려는 악마 같은 포퓰리즘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