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농장 사람들로 브라질의 절망 그려낸 포르치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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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
땅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문제
브라질 '농민'의 화가
칸지두 포르치나리 (1903-1962)
땅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문제
브라질 '농민'의 화가
칸지두 포르치나리 (1903-1962)
가난에 맞서는 방법
그림 속에는 어른이 넷, 아이가 다섯이다. 두 아이는 어른의 팔 위에 있고 세 아이는 서 있다. 흰 천에 싸인 아이는 튀어나온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흡사 유령 같다. 다른 팔에 안긴 아이는 등뼈가 훤히 보인다. 기본적인 위생 시설이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흔하게도 아이들 배는 물이 차 부풀어 올라와 있다. 그들 뒤로 건조하고 생명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위와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지평선에 보이는 것은 거의 불분명한 산의 윤곽뿐이다. 지평선은 맑으나 하늘은 어둡고, 죽음을 기다리듯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새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눈빛은 아득하고 쓸쓸하고 어른들의 표정은 절망에 가깝다.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이 그림은 초상화 같기도 하다. 모두가 맨발이고 고단하다. 크게 눈 뜬 이에게 남겨진 것은 그저 도움을 구하는 것뿐, 다른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피난민들>은 포르치나리가 1944년에 그린 것으로 <죽은 아이>와 짝을 이룬다. 이 작품에서 그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는 브라질의 슬픈 현실인 ‘북동부 이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식민지 시대 사탕수수 생산이 수출 목록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때, 이 지역은 브라질에서 가장 번영했으나 사탕수수 농업의 수익성이 끝난 이후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농업 다각화 실패로 인한 경제 침체와 대지주로의 소득 집중, 지속적인 가뭄이 북동부 이주의 시작이었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브라질의 산업화가 절정에 달하면서 남동부 지역, 특히 상파울루주와 리우데자네이루주로 이주가 활발해졌다. 북동부 주민이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풍요로운 도시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우리는 브라질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가령 <별의 시간>에서 주인공 마카베아는 북동부 출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타이피스트로 빈곤과 소외감을 경험하며 자랐다.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했고 꿈과 희망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소설 곳곳에 인간 존재의 취약성이 구체화한다.
그림에는 가뭄, 굶주림, 빈곤을 면하려 고향을 떠나 이주하는 가족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난다. 캐릭터의 어두운 윤곽선은 작품에 무거운 톤을 더해준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포르치나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중립적인 예술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한다. 화가의 의도가 없더라도 그림은 언제나 사회적 의미를 가리킨다.”
가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바로 가난에 맞서는 한 방법이라고 포르치나리는 전한다. ‘피난민’이라는 주제를 포르치나리는 평생에 걸쳐 변주했다. 1958년 작품을 보면 표현주의를 수용한 그의 네오리얼리즘이 한층 다양해진 색채 팔레트와 더불어 추상주의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칸지두 포르치나리는 1903년 상파울루주 내륙 브로도비스키에서 태어나 자랐다. 커피 농장에서 일했던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인 포르치나리는 고향 마을의 교회 복원 작업에서 화가의 조수로 미술 작업을 시작해 15세에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주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29세에 전시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아 2년 동안 파리에 살게 되었을 때 조국과 그 색채, 문화에 느낀 깊은 향수는 그에게 브라질에 대한 작품을 개발하게 했다.
그에게 브라질의 현실이란 브라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겸손한 농부와 노동자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농민의 것’이라고 정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는 공산당에 가입했고, 당시 브라질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집요하게 묘사했다. 그는 멕시코 벽화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벽화를 남기기도 했다.
폭력의 종식을 호소
<전쟁과 평화>는 포르치나리가 1952년과 1956년 사이에 그린 두 점의 그림이다. (그는 앞선 1941년 워싱턴 D.C. 의회 도서관 히스패닉 열람실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4개의 벽화 <대지의 발견>, <금광의 발견>, <숲의 입구>, <원주민의 가르침>을 완성한 바 있다) 높이 14.32m, 각각의 너비 10.66m인 초대형 패널이다. 브라질 정부의 기증으로 뉴욕 유엔 본부의 유엔 총회 건물에 영구 전시하기 위해 그려졌으나 포르치나리의 공산당 활동 이력이 패널 제막식 참석을 위한 미국 입국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 패널은 원래 유엔 총회 입구 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국가 원수 또는 총회에 연설하는 대표자만 볼 수 있었다가 2010-14년 복원 과정을 거쳐 2015년 대중에 공개되었다.
두 패널에는 무기가 등장하지 않으나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고통을 표현하여 그 야만성을 드러낸다. 혼돈과 조화의 대조는 평화 유지와 폭력적 갈등의 종식을 염원한다. 그런데 포르치나리는 벽화의 완성과 자신의 생명을 바꾼 셈이 되고 말았다. 장기간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사용한 페인트로 인한 납중독으로 6년을 고생하다가 1962년 세상을 떠났다.
브라질 땅의 특성과 겸손한 노동
커피 농장 노동자의 아들이었기에 포르치나리는 자신이 커피 농업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포르치나리 시대의 커피는 브라질 정체성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국가의 경제는 이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사회적 불의와 빈곤 및 사회적 기회 부족으로 인해 농촌 인구가 직면한 셀 수없이 많은 어려움 또한 이 커피 산업과 연관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대륙 전체는 산업주의의 발흥, 봉건적 생산의 쇠퇴, 나폴레옹 전쟁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빈곤, 질병, 사회적 불평등의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이민 가운데 북부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미 중에서도 커피 재배 도입이 가장 많이 증가한 남부 및 남동부 지역에 정착했다. 커피 농업은 당시 브라질 경제의 중심이었지만, 급속한 재배 확대를 담당할 노동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커피 생산은 여전히 커피 대농장주에게 상당한 수익을 제공했으나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고, 브라질인의 통합이라는 과제는 요원해질 뿐이었다. 이 작품으로 카네기 재단이 미국에서 주최한 현대 미술 국제 전시회에서 수상하면서 포르치나리는 해외에서 상을 받은 브라질 최초의 모더니스트 화가가 되었다.
<카카오 수확>(1954)은 파란색과 녹색 톤을 조합하고 가볍게 붉은색을 더해 카카오를 수확하는 농부의 이미지를 묘사한다. 세 농부의 모습을 통해 카카오가 소비되기까지 거치는 여러 단계를 보인다. 우리가 보는 가장 먼 인물은 카카오 열매를 모으는 남자이고, 그로부터 우리는 몸을 정면으로 향한 채 가득 찬 바구니를 든 두 번째 남자를 본다. 세 번째 인물은 바라보는 이에게 가장 가깝고 그는 열매를 자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전체 과정에서 원경을 이루는 것은 그림의 배경으로 반복되고 아스라이 사라져감으로 영원히 계속될 듯 보이는 카카오나무다. 노란 태양 빛과 푸른 나무 그림자, 그리고 붉은 얼굴과 손이 열대의 리듬을 형성한다.
포르치나리가 천착했던 ‘농민’들의 삶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주요 작물과 관계가 깊었다. 사탕수수, 옥수수, 쌀, 콩, 커피, 카카오 등 숱한 작물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콩 수확>(1957)에서는 전체 구도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잘 정의된 격자를 장면에 겹쳐 인물과 공간을 동시에 양식화했다. 이 그림에서는 콩을 말리는 마당의 수직과 수평의 그물망이 몸과 의복 안으로 들어가 작업자와 땅 사이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남성은 체력이 필요한 활동을 담당하고 여성은 세부 사항을 담당한다. 브라질 음식의 기본 재료를 통해 전통과 국가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려는 포르치나리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 시기, 방법론적으로는 (같은 주제로 그린 1940년대 작품들에 비해) 입체파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화면 분할이 돋보이는 반(半)추상으로 나아갔다.
원형의 시공간
작가의 어린 시절은 축구공, 팽이, 그네를 가지고 놀고 친구들과 강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던 단순한 소년의 추억과 함께 화폭에 담긴다. 단순한 사람의 원형이 그의 어린아이 그림을 통해 펼쳐진다. 그네를 타고 재주를 넘는 가운데 고향의 색인 짙푸른 하늘색과 붉은 흙색은 한층 깊어졌다. 달빛이 아이들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운동감 있는 팔다리에서, 또 양의 등허리에서 색 블록으로 쪼개지는 광경은 섬세하고 강한 순수, 존재 자체로 충만한 상태, ‘거기 너와 내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깊은 그리움, 포르투갈어 ‘사우다지’의 시각화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그림 속에는 어른이 넷, 아이가 다섯이다. 두 아이는 어른의 팔 위에 있고 세 아이는 서 있다. 흰 천에 싸인 아이는 튀어나온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흡사 유령 같다. 다른 팔에 안긴 아이는 등뼈가 훤히 보인다. 기본적인 위생 시설이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흔하게도 아이들 배는 물이 차 부풀어 올라와 있다. 그들 뒤로 건조하고 생명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위와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지평선에 보이는 것은 거의 불분명한 산의 윤곽뿐이다. 지평선은 맑으나 하늘은 어둡고, 죽음을 기다리듯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새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눈빛은 아득하고 쓸쓸하고 어른들의 표정은 절망에 가깝다.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이 그림은 초상화 같기도 하다. 모두가 맨발이고 고단하다. 크게 눈 뜬 이에게 남겨진 것은 그저 도움을 구하는 것뿐, 다른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피난민들>은 포르치나리가 1944년에 그린 것으로 <죽은 아이>와 짝을 이룬다. 이 작품에서 그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는 브라질의 슬픈 현실인 ‘북동부 이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식민지 시대 사탕수수 생산이 수출 목록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때, 이 지역은 브라질에서 가장 번영했으나 사탕수수 농업의 수익성이 끝난 이후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농업 다각화 실패로 인한 경제 침체와 대지주로의 소득 집중, 지속적인 가뭄이 북동부 이주의 시작이었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브라질의 산업화가 절정에 달하면서 남동부 지역, 특히 상파울루주와 리우데자네이루주로 이주가 활발해졌다. 북동부 주민이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풍요로운 도시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우리는 브라질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가령 <별의 시간>에서 주인공 마카베아는 북동부 출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타이피스트로 빈곤과 소외감을 경험하며 자랐다.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했고 꿈과 희망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소설 곳곳에 인간 존재의 취약성이 구체화한다.
그림에는 가뭄, 굶주림, 빈곤을 면하려 고향을 떠나 이주하는 가족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난다. 캐릭터의 어두운 윤곽선은 작품에 무거운 톤을 더해준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포르치나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중립적인 예술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한다. 화가의 의도가 없더라도 그림은 언제나 사회적 의미를 가리킨다.”
가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바로 가난에 맞서는 한 방법이라고 포르치나리는 전한다. ‘피난민’이라는 주제를 포르치나리는 평생에 걸쳐 변주했다. 1958년 작품을 보면 표현주의를 수용한 그의 네오리얼리즘이 한층 다양해진 색채 팔레트와 더불어 추상주의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칸지두 포르치나리는 1903년 상파울루주 내륙 브로도비스키에서 태어나 자랐다. 커피 농장에서 일했던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인 포르치나리는 고향 마을의 교회 복원 작업에서 화가의 조수로 미술 작업을 시작해 15세에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주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29세에 전시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아 2년 동안 파리에 살게 되었을 때 조국과 그 색채, 문화에 느낀 깊은 향수는 그에게 브라질에 대한 작품을 개발하게 했다.
그에게 브라질의 현실이란 브라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겸손한 농부와 노동자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농민의 것’이라고 정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는 공산당에 가입했고, 당시 브라질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집요하게 묘사했다. 그는 멕시코 벽화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벽화를 남기기도 했다.
폭력의 종식을 호소
<전쟁과 평화>는 포르치나리가 1952년과 1956년 사이에 그린 두 점의 그림이다. (그는 앞선 1941년 워싱턴 D.C. 의회 도서관 히스패닉 열람실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4개의 벽화 <대지의 발견>, <금광의 발견>, <숲의 입구>, <원주민의 가르침>을 완성한 바 있다) 높이 14.32m, 각각의 너비 10.66m인 초대형 패널이다. 브라질 정부의 기증으로 뉴욕 유엔 본부의 유엔 총회 건물에 영구 전시하기 위해 그려졌으나 포르치나리의 공산당 활동 이력이 패널 제막식 참석을 위한 미국 입국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 패널은 원래 유엔 총회 입구 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국가 원수 또는 총회에 연설하는 대표자만 볼 수 있었다가 2010-14년 복원 과정을 거쳐 2015년 대중에 공개되었다.
두 패널에는 무기가 등장하지 않으나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고통을 표현하여 그 야만성을 드러낸다. 혼돈과 조화의 대조는 평화 유지와 폭력적 갈등의 종식을 염원한다. 그런데 포르치나리는 벽화의 완성과 자신의 생명을 바꾼 셈이 되고 말았다. 장기간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사용한 페인트로 인한 납중독으로 6년을 고생하다가 1962년 세상을 떠났다.
브라질 땅의 특성과 겸손한 노동
커피 농장 노동자의 아들이었기에 포르치나리는 자신이 커피 농업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포르치나리 시대의 커피는 브라질 정체성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국가의 경제는 이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사회적 불의와 빈곤 및 사회적 기회 부족으로 인해 농촌 인구가 직면한 셀 수없이 많은 어려움 또한 이 커피 산업과 연관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대륙 전체는 산업주의의 발흥, 봉건적 생산의 쇠퇴, 나폴레옹 전쟁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빈곤, 질병, 사회적 불평등의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이민 가운데 북부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미 중에서도 커피 재배 도입이 가장 많이 증가한 남부 및 남동부 지역에 정착했다. 커피 농업은 당시 브라질 경제의 중심이었지만, 급속한 재배 확대를 담당할 노동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커피 생산은 여전히 커피 대농장주에게 상당한 수익을 제공했으나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고, 브라질인의 통합이라는 과제는 요원해질 뿐이었다. 이 작품으로 카네기 재단이 미국에서 주최한 현대 미술 국제 전시회에서 수상하면서 포르치나리는 해외에서 상을 받은 브라질 최초의 모더니스트 화가가 되었다.
<카카오 수확>(1954)은 파란색과 녹색 톤을 조합하고 가볍게 붉은색을 더해 카카오를 수확하는 농부의 이미지를 묘사한다. 세 농부의 모습을 통해 카카오가 소비되기까지 거치는 여러 단계를 보인다. 우리가 보는 가장 먼 인물은 카카오 열매를 모으는 남자이고, 그로부터 우리는 몸을 정면으로 향한 채 가득 찬 바구니를 든 두 번째 남자를 본다. 세 번째 인물은 바라보는 이에게 가장 가깝고 그는 열매를 자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전체 과정에서 원경을 이루는 것은 그림의 배경으로 반복되고 아스라이 사라져감으로 영원히 계속될 듯 보이는 카카오나무다. 노란 태양 빛과 푸른 나무 그림자, 그리고 붉은 얼굴과 손이 열대의 리듬을 형성한다.
포르치나리가 천착했던 ‘농민’들의 삶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주요 작물과 관계가 깊었다. 사탕수수, 옥수수, 쌀, 콩, 커피, 카카오 등 숱한 작물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콩 수확>(1957)에서는 전체 구도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잘 정의된 격자를 장면에 겹쳐 인물과 공간을 동시에 양식화했다. 이 그림에서는 콩을 말리는 마당의 수직과 수평의 그물망이 몸과 의복 안으로 들어가 작업자와 땅 사이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남성은 체력이 필요한 활동을 담당하고 여성은 세부 사항을 담당한다. 브라질 음식의 기본 재료를 통해 전통과 국가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려는 포르치나리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 시기, 방법론적으로는 (같은 주제로 그린 1940년대 작품들에 비해) 입체파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화면 분할이 돋보이는 반(半)추상으로 나아갔다.
원형의 시공간
작가의 어린 시절은 축구공, 팽이, 그네를 가지고 놀고 친구들과 강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던 단순한 소년의 추억과 함께 화폭에 담긴다. 단순한 사람의 원형이 그의 어린아이 그림을 통해 펼쳐진다. 그네를 타고 재주를 넘는 가운데 고향의 색인 짙푸른 하늘색과 붉은 흙색은 한층 깊어졌다. 달빛이 아이들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운동감 있는 팔다리에서, 또 양의 등허리에서 색 블록으로 쪼개지는 광경은 섬세하고 강한 순수, 존재 자체로 충만한 상태, ‘거기 너와 내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깊은 그리움, 포르투갈어 ‘사우다지’의 시각화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