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기업의 총수는 그제도 경영 일선 대신 법정에 섰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희가 맞이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녹록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을 반드시 극복하고 나아가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2심의 결심 공판에 출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최후진술이다.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다. 이 사건으로만 100회 넘게 법정에 섰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재판은 2016년 ‘국정 농단’ 사건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참여연대 등의 의혹 제기와 합병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특검팀의 판단이 발단이 됐다. 그 후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2020년 9월 부정 거래와 시세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로 이 회장과 삼성 임원들을 기소했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자본시장법을 과도하게 적용했다는 이유 등으로 이 회장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지만, 검찰은 무시했다. 3년 반을 법정에 끌려다닌 끝에 올해 2월 1심 판결에서 이 회장과 임원들은 검찰이 기소한 19개 혐의 전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애초부터 무리한 기소였다고 볼 수 있는 결과지만 검찰은 포기하지 않고 항소했고 ‘징역 5년, 벌금 5억원’이라는 구형량 조정조차 없었다.

이 회장은 이미 국정 농단 사건으로 2017년 구속돼 수년간 실형을 살았다. 가석방 후 2022년엔 사면 복권까지 됐지만, 그와 삼성에 채워진 ‘사법 족쇄’는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다. 2심 선고가 나올 내년 2월이면 10년째다. HBM(고대역폭메모리) 개발 지연 등 인공지능(AI) 시대 대비를 제대로 못 했다는 우려와 질책을 받는 삼성전자다. 사지를 족쇄로 묶어 놓고 잘 뛰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 족쇄를 풀어줄 때가 됐다.